12월 11일 고베
아침에 일어나니 빨래가 바짝 말랐다. 너무 건조하여 키피 포트 뚜껑을 열어 놓고 물을 펄펄 끓였다.
5층에 가서 일식으로 아침을 먹었는데 일본 여자들과 합석했다. 일본 여자들은 어찌나 조신하게 식사 하는지 천하의 요조숙녀 같다. 우리가 일어나려니 '안녕히 가세요.'하며 한국말로 인사도 한다.
방으로 오다보니 우리 앞쪽 태극기 걸린 방이 열려있고 청소 중이다. 살짝 들여다보니 밖으로 바다가 보이는 게 우리 방보다 훨씬 쾌적하게 보인다. 돈이 좋기는 좋다.
대충 닦고 다시 나와 갑판 돌기를 했다. 반시계 방향으로 돌라고 표시되어 있다. 세 바퀴를 돌면 1.6km라고 쓰여있다. 하루 세 번 식후에 세 바퀴씩 돌기로 했다. 그래봤자 4.8km 밖에 안 된다.
안으로 들어와 5층으로 가니 공연 중이다. 피아노를 치며 'Let it be,'를 부른다. 아는 노래가 나오니 좋다.
점심 먹고 데크길을 또 걸었다. 한 할머니가 보행기를 밀며 열심히 걷는다. 한국말을 하기에 옆의 여자에게 물으니 90세인데 자기는 딸이란다. 효녀 심청이 따로 없다. 할머니와 사진을 찍었다. 이 할머니에 비하면 우린 이직 청춘이다.
요즘 일본말을 조금씩 배운다.저녁인사는 '곰방와'라고 하는데 '금방 와'로 외웠다.
고베에서 승객을 태운 후 또 출항식을 했다.우리 배에는 1850명의 승객이 탔는데 20개 국가에서 참여했다.우리 배의 이름이 피스 보트 peace boat 인데 세계평화를 위해서 많은 기부 물품을 세계 각국에 전달한다고 한다. 이번에도 200박스의 물품을 전달 한다. 올해 노벨평화상은 일본이 받았다.평화는 나로부터 시작된다.
알리모프 선장은 우크라이나 사람이다. 우크라이나 현실을 생각하니 어쩐지 측은한 생각이 든다.
승객들의 말도 들어보는데 115회에도 참가한 큐슈에서 온 여자의 말도 듣고 미슈우라 안나의 이야기도 들었다. 이 여자는
코로나로 5년 동안 기다렸다고 한다.
대만에서 온 남자도 이번이 두 번째라고 한다. 이번 항해는 119번째 항해다.
그 후 핸드폰 후래쉬를 켜서 흔들며 부두의 환송객들과 이별을 하고 스탭들과 신나게 춤을 추며 즐겼다. 흰구름은 음악만 나오면 흰구름을 탄 듯 신나게 흔들어댄다. 보는 사람도 흥이 난다.
출항식을 마치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일본 할머니는 우리가 한국 사람이라고 하자 자기가 아는 한국말을 총동원하며 아주 신이 났다. 여보세요는 모시모시, 감사합니다는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맛있어요는 오이씨란다. 일본 사람들이 한국말 열심히 배우는 걸 보면 뿌듯하다. 몇 년 전 어느 공항에서 한 일본 할아버지가 한국말 배우는 중이라고 하며 두 년 전에 한국 왔었다고 한 기억이 난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다가 2년 전이란 걸 알고 힌참 웃었다.
내 오른쪽에 앉은 할머니는 타이완에서 왔단다. 두 아가씨와 왔는데 친구라고 한다. 그러면서 자기 나이가 85세라고 한다. 깜짝 놀랐다. 나보다 10년 연상인데 엄청 젊어보인다. 이 소리를 듣더니 중국어 배우는 금형씨가 우리들의 나이를 알려준다. 중국어 배운다더니 뭐라고 쏼라 쏼라 말도 잘 한다. 몇 십 년을 배웠다고 하니 당연하다. 물 만난 물고기 같다. 그 할머니가 나를 보고 핸드폰 글 쓰는 속도가 엄청 빠르다고 한다. 옆에서 유심히 봤나보다. 별로 빠르지도 않은데 말이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갑판으로 나와 또 세 바퀴 돌았다. 돌고 나서 14층 부페식당에 가서 과일을 먹었다. 요즘 하루 세끼 꼬박 꼬박 먹고 밤참까지 먹으니 한국 갈 때는 떼굴떼굴 굴러갈 것 같다. 방으로 돌아와 선내 신문을 보며 내일 스케줄을 짰다.너무 많아서 과로사 할 지경이다. ㅎ ㅎ
12월 12일 항해 1 (고베~홍콩)
7시에 14층 가서 아침 식사를 하고 8시에 7층으로 내려가 갑판 돌기를 했다. 망망 대해에 어쩌다 화물선이 가끔 보인다.
배의 한 쪽은 겨울이고 한쪽은 여름이다. 햇빛의 힘이 이토록 강력한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
갑판 돌기를 마치고 안으로 들어오니 6층에 웬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뭔가 했더니 배에서 쓸 수 있는 데이터를 사려는 사람들이다. 우린 급할 게 없으니 나중에 사기로 했다. 요즘 통신 비용을 3중으로 물고 있다. 국내 요금과 로밍 요금에다가 배에서 쓸 수 있는 데이터를 또 사야한다. 10기가에 90달러다.
9시부터 음악감상이라고 신문에 써 있었는데 안 하는지 조용하다. 10시에 한국인을 위한 안내를 한다고 해서 7층으로 갔다. 요코하마에서 들었던 것인데 다시 한 번 더 들었다.
6층 샵에 가서 10기가 사서 연결 방법을 배우려 건너편 이벤트 홀에 가니 금형씨 것은 잘 되는데 내 것은 에러 메시지가 뜬다. 직원이 해도 안 되니까 2시에 다시 오란다.
점심을 먹고 한국인 끼리의 소개 장소로 갔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시작하기 전에 한 사람이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자며 기타를 들고 나와 함께 노래하자고 한다. 레크레이션 강사라고 한다.
아들 두 명을 데리고 온 젊은 부부도 있다. 작은 아들은 1살이다. 육아휴직 중이라 왔다고 한다. 참 현명한 사람들이다. 한국인 소개 시간이 끝나고 김민재 소장님에게 선내 와이파이 연결하는 법을 물으니 5층 로비에 와서 김가현씨를 소개해 준다. 가현씨가 조근 조근 잘 설명해 주는데도 잘 못 알아들으니 몇 번씩 로그인, 로그아웃 하는 법을 연습 시켜준다, 이거 배우다가 대가리 터질 뻔 했다.
4시 30분에 공연을 보러 갔다. 대극장에서 한다. 노가꾸라는 전통극 연기자가 우연히 같이 승선하게 되어 공연하게 되었다. 이 공연은 세계문화유산이라고 한다. 후지 마사꾸는 70세다. 45년간 공연하다가 1년 휴식하게 되어 이 배에 탔단다. 원래는 30명이 1시간 30분 동안 하는데 두 곡만 하겠단다. 우연히 제자도 승선하여 둘이 함께 공연했다. 그는 50년간 노가꾸 공연을 가르쳐왔다. 2001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되었는데 노가꾸가 가장 오래된 공연이라서 지정 됐다고 한다. 연기자들은 보통 3살부터 죽을 때까지 연습하고 공연한다.
극중의 미하토 미하는 친절한 여신이다. 원래는 노후맨이란 가면을 쓰고 하는데 오늘은 생얼로 한다.
소나무가 배경으로 나오는데 노가꾸에서는 신이 소나무를 통해 지상에 내려온다고 믿는다. 빨간 색은 태양, 검은 색은 땅을 나타낸다.181곡으로 구성 되었는데 그중 두 곡을 공연했다. 그 노래는 모든 생물을 표현는 노래다. 마지막 곡인 '오노노 시마치라'는 100세 노인의 삶을 표현했다. 곡이 너무 길어서 곡을 그만 끝내달라고 오시마오라고 했다는데 그 말이 끝내 달라는 뜻이 되었다.
완전히 절제된 모습과 소리가 천상의 신선들 같다. 육신을 떠난 영혼이 노래하는 듯하다. 입은 조금 밖에 안 벌리는데 머리에서 나오는 소리같다. 서양의 성악가들은 입이 찢어지도록 크게 벌리는데 참 대조적이다. 뭔소린지는 한 마디도 못 알아 듣겠는데 영혼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우리나라 버선은 한 통인데 일본 버선은 엄지 발가락이 분리 된 것도 특이하다.
후지 마사꾸는 유투브에서 라파엘.0501을 검색하면 나온다고 하며 관중들을 배경으로 셀카도 찍는다. 이 사진도 올리겠단다.
12월 13일 항해 2 (고베에서 홍콩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요가를 하러 8층으로 가니 사람들이 엄청 많다. 노인들이 많으니 몸 풀기가 필요한가 보다.
방에 들어와 조금 쉬다가 갑판 걷기를 했다. 오늘은 잔뜩 흐렸다. 점심을 먹으러 6층 식당에 가니 창가 자리로 안내해준다. 모처럼 우리끼리 앉으니 마음이 편하다.
환영 세리머니에 가보니 모두 성대하게 차려 입었다. 우린 등산복 차림이라 너무 미안해서 얼른 6층으로 올라갔다.
선장 알리모프가 인사한다. 119항차 이번 여행을 기대해 달라고 하며 승무원들을 소개한다. 모두 소개한 후 건배를 했다.
그 후 피스보트 직원도 소개하고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선생님들도 소개했다. 동시 통역사도 소개해주는데 눈에 익은 한국인도 많다.
모든 소개를 마친 후 직원들은 들어가고 댄스 파티가 열렸다. 흰구름은 또 물 만났다. 예쁘게 춤도 잘 춘다.
파티장에서 나와 5층 식당으로 가서 저녁을 먹었다. 식당에 들어 가니 내일 시간을 한시간 늦추라고 방송이 나온다. 식탁에도 써서 꽂아놨다.
일본 할머니들과 같이 앉았는데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코리아라고 했더니 한국사람은 몇 명 왔느냐고 한다. 50명 fifty라고 했더니 15명 fifteen이냐고 다시 묻는다. 그래서 열 손가락을 펴서 다섯 번 보여주었더니 놀라는 표정이다.
샐러드가 맛있어서 모처럼 지난 번 일본 할머니가 알려준 '맛있어요.'를 일본말로 해보려고 했더니 그새 까먹었다. 금형씨에게 물어보니 '오이씨'란다. 금형씨는 나보다 한 살 적은데 총기가 참 좋다. 용기를 내서 한 번 말해봤더니 담박 알이듣는다. 그러면서 '맛있어요.'라고 우리 말로 한다. 한 여자가 한국 가서 감천문화마을에 가겠다는데 우린 도통 모르겠다. 검색해보니 부산에 있는 문화마을이다. 우리보다 더 잘 안다.
흰구름이 금형씨가 킬리만자로도 갔다고 하니 깜짝 놀라며 정상까지 갔느냐고 묻는다. 금형씨가 킬리만자로 정상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올해 깄다고 하니 더 놀란다. 나는 작년에 후지산 갔다고 하니 또 정상까지 갔느냐고 한다. 그렇다고 하니 또 놀란다.
후식까지 먹고 나오려니 커피는 안 마시느냐고 한다. 카페인 때문에 잠이 안 온다고 잠 자는 흉내를 냈더니 담박 알아 듣는다. 그야말로 바디 랭귀지가 최고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갑판 걷기를 했다. 어제부터 파도가 심해서 이리 비틀 지리 비틀 좀비처럼 걷는다.
흰구름이 밖에 나갔다 오더니 한심하다고 하며 자기 신발을 보여준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정심 먹을 때 주웠던 곰 모형이 자기 것인 줄 몰랐다는 것이다. 바닥에 떨어져 있어서 창틀에 올려놓았더니 우리가 나올 때 식당 직원이 들고 와서 이거 두고 갔다고 하는 걸 우리 것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흰구름 신발 한 짝에 그런 곰모형이 붙어 있다. 전화를 하면서 무심코 신발을 보니 한쪽만 붙어있더란다. 셋이서 매일 매일 실수 연발이다. 그래도 이 정도는 애교에 불과하다.
방에 와서 씻고 내일 신문을 가져다가 내일 스케줄을 짰다.
12월 14일 항해 3 (고베에서 홍콩으로)
아침식사하러 14층에 가는데 엘리베이터에 일본 남자 혼자 있다. 아침인사를 하고 싶은데 모르겠다. 그냥 '굳모닝' 하고 흰구름이 일본말 메모 해온 것을 찾이보니 '오하이오 고자이마스'다. 다시 '오하이오 고자이마스'라고 인사 했더니 그 남자가 맞다고 끄덕인다.
14층에서 식사를 하는데 마침 김민재씨가 보인다. 우리 테이블로 오라고 한 후 요코하마에 내려서 도쿄 가는 방법을 자세히 물어봤다. 김민재씨는 항상 겸손한 자세로 손님 대하는 태도가 보기 좋다.이렇게 손님들에게 호감을 주니 10여명에 불과하던 손님이 이번에 50명으로 늘었나보다.
홍콩 입국 심사원이 배에 타서 미리 50명을 무작위로 뽑아서 입국 심사를 했다는데 우린 용케 안 걸렸다.
식사 후 8층으로 가서 요가를 했다. 한국말로 번역해주는 동시 통역사가 있기는 한데 알아 듣기가 힘들다. 그냥 대충 옆사람을 보면서 흉내만 내고 왔다.
방에 와서 양치하고 7층 갑판으로 나가 갑판 돌기를 했다. 한 번에 세 바퀴 씩 하루 세 번 돌면 만보가 넘는다. 그러면 '손목닥터 9988'에서 200포인트 주니 꿩 먹고 알 먹고다.
걷기를 마치고 방에 와서 쉬었다. 흰구름은 수채화를 그린 후 살사를 추러 간다고 원피스를 예쁘게 차려입고 나간다. 살을 사는지 뼈를 사는지 모르지만 금형씨와 나는 엄두가 안 나서 그냥 방에서 쉬기로 했다.
6층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부산에서 온 아저씨가 옆에 앉았다. 뭘 하던 분인지 오르겠는데 일본 할아버지들과 영어와 일본말로 자유자재로 소통한다. 부럽다. 오늘의 애피타이저는 꽃보다 예쁘다. 셰프는 음식 솜씨도 좋아야겠지만 데코레이션 실력도 좋아야겠다. 나 같으면 죽었다 깨나도 못하겠다.
밖으로 나와 걸으러 가다가 흰구름이 의자에 앉아있는 총각에게 다가가 홍콩 여행에 대해 이것 저것 물어본다. 한국인 소개할 때 거제도에서 왔다는 총각이다. 친절하게 이것저것 알려준다.
홍콩 여행 설명회를 들으러 갔다. 통역기를 써서 한국말로 들었다. 홍콩에 내려서 볼것, 먹을 것, 마실 것을 이것 저것 알려준다. 설명회를 마치고 갑판으로 나가니 갑판이 젖어 일부 구간을 막아놨다.
할 수 없이 같은 구간을 왔다갔다 했다. 그런데 위에 매달린 구명정을 자세히 보니 아래가 둥근 것과 움푹한 것, 터빈이 한 개인 것과 두 개인 것 등 모양이 다양하다. 구명정의 번호도 배의 한 쪽은 홀수이고 다른 쪽은 짝수다. 저거 탈 일이 없기를 빌어본다.
방에 와서 쉬다가 저녁을 먹으러 같다. 요새 먹고 자기를 반복한다. 현숙이 팔자가 늘어졌다. 그런데 한 끼 먹기를 도구가 아홉개나 된다. 포크 세 개, 나이프 세 개, 스푼 세 개다. 설겆이 하는 사람 엄청 힘들겠다.
주문한 후 음식이 나오면 내가 무얼 시켰었는지 까먹을 때가 많다. 이걸 머리라고 달고 다녀야할랑가 모르겠다.
오늘 저녁에는 같은 식탁에 타이완 여자 한 명, 일본 남자 두 명, 일본 여자 한 명, 우리 셋, 이렇게 앉았다. 타이완 여자가 우리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묻기에 코리아라고 했더니 담박 "안녕하세요?" 한다. 일본 남자가 '오이씨'가 뭐냐고 하기에 '맛있어요,' '맛있다.'라고 하니 어떻게 다르냐고 한다. '맛있어요'는 윗 사람에게, '맛있다'는 같은 레벨의 사람에게 말 할 때 쓴다고 설명했더니 끄떡 끄떡 한다.
저녁 식사 후 갑판으로 나가니 물기를 다 닦고 전체를 돌 수 있게 해놨다. 둥근 달이 둥실 떴다. 그 아래로 밝은 별이 있어 무엇인가 스텔라리움 앱으로 보니 목성이다.
한국 떠날 때는 반달앴는데 내일이 보름이라 벌써 풍선처럼 부풀었다. 내 몸도 점점 부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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