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2024. 6. 6. 지리산 기행문

아~ 네모네! 2024. 6. 13. 17:17

백수(白首)의 백화 종주

이현숙
 

  작년에 이어 올해도 지리산 종주에 나섰다. 5번 동생의 산 친구 상보가 운 좋게 대피소 예약에 성공했다고 한다. 동생이 전화해서 네 명분을 예약했는데 같이 가겠느냐고 묻는다. 상보와 5번 동생은 걸음이 빨라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으니 상보 동생 상숙이가 가면 같이 가겠다고 했더니 잠시 후 연락이 왔다. 상숙이도 간다는 것이다. 겁 없이 또 따라나섰다.
 
6월 6일 백무동에서 세석까지
  어젯밤 12시에 동서울터미널에서 출발하여 백무동에 도착하니 새벽 4시도 안 됐다. 캄캄한 새벽에 버스터미널 앞 의자에서 빵과 두유를 먹고 간단한 준비운동을 했다. 상보는 체구는 작은데 야무지고 짐도 어마무시하게 많이 진다. 15kg은 되나 보다. 나는 들지도 못하겠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이 딱 맞는다.

 
  날이 서서히 밝아오자 홀딱 벗고 새가 울어댄다. 원래 이름은 검은등뻐꾸기라고 하는데 네 음절로 울어대는 소리가 마치 "홀딱 벗고~ 홀딱 벗고~"하는 것 같다. 언젠가 지인들과 산에 갔을 때 한 사람이 "저 새는 맨날 홀딱 벗고 있는데 왜 여태 시집을 못 갔냐?" 하니까 다른 사람이 "홀딱 벗으니까 못 갔지. 반만 벗었으면 벌써 갔을 텐데." 해서 한 바탕 웃었던 기억이 난다.
  소지봉을 지나 더 올라가니 휘파람새가 울어댄다. 휘파람새 울음소리는 마치 휘파람을 부는 것 같다. 장터목대피소에서 햇반을 사서 오뎅 국을 끓여 먹었다. 상보가 무거운 코펠과 버너를 가져오고 오뎅까지 사 와서 포식했다. 5번 동생과 상숙이가 가져온 반찬으로 푸짐한 식사를 하고 커피까지 마셨다. 장터목대피소 화장실은 푸세식이라 냄새도 심하고 파리도 많다. 하지만 자연환경을 보호하려면 이 정도는 참아야 한다.
  상숙 씨는 몸살 기운이 있다고 장터목에서 쉬고 세 명이 천왕봉으로 출발했다. 가파른 오르막 길을 오르니 제석봉이다. 제석봉 고사목은 언제 봐도 멋지다. 따지고 보면 나무의 해골인데 왜 이리도 멋질까? 아무 죄도 짓지 않아서 그런가?


  고사목을 찍느라고 5번 동생과 느릿느릿 올라가려니 상보한테서 전화가 온다. 정상에서 인증사진을 찍으려고 줄을 서 있는데 순서가 거의 다 됐으니 빨리 오라는 것이다. 통천문을 지나 부지런히 올라가니 앞에 몇 명밖에 없고 뒤에는 줄이 한없이 길다.

 
  상보 덕에 우리는 금방 사진을 찍었다. 관리소 직원이 사람들 핸드폰을 받아서 계속 찍어준다. 몇 시간씩 뙤약볕 아래서 이 일을 하려면 엄청 힝들 것 같다.

 
  조금 내려와서 상보가 가져온 사과주스를 먹고 한참 내려오니 장터목대피소가 보인다. 상숙 씨와 만나 세석으로 출발했다. 세석대피소를 향해 걸으려니 많은 사람들이 내 꼴을 보며
"멋지다."
"대단하다."
"만나봐서 영광이다." 하면서 찬사를 보낸다. 사실 내 나이가 만으로 75살밖에 안 됐으니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다. 머리가 백발인데다 어깨가 구부정하니 80살도 넘어 보이나 보다. 어쨌건 지리산만 오면 졸지에 내가 엄청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어깨가 으쓱해진다.
  연하봉 아래서 간식을 먹으며 지리산의 너른 품을 바라본다. 산에 안겨 있으면 세상에 부러운 놈 하나 없다. 세상살이가 힘들다가도 산을 바라볼 때면 한 번쯤은 와볼 만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너무 일러 촛대봉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상보는 다리를 높이 올리고 눕고 상숙 씨는 큰대자로 누웠다.

 
  세석대피소에 도착하여 방 배정을 받고 밖의 탁자에서 저녁을 먹었다. 여기저기서 삼겹살 굽느라고 바쁘다. 우린 오뎅국과 라면으로 조촐한 식사를 한 후 차도 한 잔씩 마셨다.

 
  너무 일찍 잠자리에 들었더니 10시도 안 돼서 깼다. 소변을 보려고 밖으로 나가니 하늘에 별이 가득하다, 스텔라리움 앱을 켜서 견우성도 찾아보고 직녀성도 찾아봤다. 북쪽 하늘에는 북두칠성도 보인다. 북극성도 찾았다. 밖에 앉아 낮에 찍은 꽃들을 모야모에 올려 물어보고 한참 있다가 다시 들어와 잠자리에 들었다.
 
6월 7일 세석에서 연하천까지
  세석대피소에서 느긋하게 출발하여 연하천을 향해 걸었다. 아침부터 휘파람새는 잘 가라고 휘파람을 불고 함박꽃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마중 나온다. 눈개승마도 눈부시게 피었다.

 
  두루미꽃도 보이고 백당나무꽃도 보인다. 백당나무꽃은 산수국과 똑같은데 잎이 다르다. 산수국 잎은 갸름한 깻잎 모양인데 백당나무 잎은 세 갈래로 갈라져 있다.

 
  칠선봉에 도착하니 상보가 여기 올라갈 거냐고 묻는다. 올라가는 사람 있으면 올라가겠다고 하니 성큼성큼 올라간다. 상보만 믿고 나도 따라 올라갔다.

 
  천왕봉이 보이는 곳에서 네 명이 인증사진을 찍었다. 오리방풀은 깻잎 모양인데 오리 방뎅이처럼 빵빵하고 잎에 꼬리가 있다.

 
  곳곳에 대나무 꽃이 피었다. 대나무는 죽을 때가 되면 꽃이 핀다는데 지리산 대나무는 거의 다 죽을 것 같다.

 
  벽소령대피소에서 식사를 하고 연하천 대피소로 출발했다. 형제봉에 다다르니 상보와 5번 동생이 사진을 찍어준다고 기다리고 있다. 상숙이와 나는 속도가 느리니 상보와 5번 동생이 계속 기다린다. 여기서 팔 들고 찍고, 발 들고 찍고 온갖 포즈로 사진을 찍었다.

 
  길을 걷다 보면 곳곳에 똥이 보인다. 똥이 있으면 똥파리가 있다. 상숙 씨는 좀 숲속으로 들어가서 누지 이렇게 길에다 누는 사람은 참 매너가 없다고 툴툴댄다. 내가 너무 급해서 그랬나보다고 하자 똥 모양이 설사는 아닌 것 같다고 조금만 참고 안으로 들어가면 될 텐데~ 하며 궁시렁거린다. 관찰력과 추리력이 대단하다. 그러면서 어찌 보면 파리에게 똥은 밥이라고 한다.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다. 파리에게 밥을 줬다고 생각하면 좋은 일 한 거다.
  대학교 1학년 때 제주도 한라산에 갔다. 관음사 쪽에서 올라가 영실 쪽으로 내려왔다. 55년 전이라 해변의 비포장길밖에 없었다. 버스도 별로 없어서 먼지가 풀풀 날리는 길을 마냥 걸었다. 걷다가 볼일을 보려고 시골집의 화장실에 들어갔다. 용변을 보려는 순간 아래쪽에서 꿀꿀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 똥을 먹으려고 구석에 있던 돼지가 내 밑으로 왔다. 나오려던 똥이 쏙 들어갔다. 이 돼지에겐 내 똥이 밥이었을 텐데 밥도 안 주고 깜짝 놀라 뛰쳐나온 내가 야속했을 것이다.
  똥 타령을 하며 걷다 보니 곳곳에 취나물이 보인다. 상숙 씨는 나물 뜯어 먹으려고 고추장도 가져왔단다. 그것도 유리병에 담아서 배낭 옆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나물 채취하면 안 되는 건 알지만 고추장 가지고 온 게 아까워서 1인당 곰취 1개, 참취 1개만 뜯기로 했다. 대피소에서는 먹을 수가 없으니 연하천 못 미쳐 데크길에 앉아 물병의 물로 대충 씻어서 고추장을 찍어 먹었다. 그야말로 꿀맛이다. 며칠째 채소를 못 먹었더니 더 맛있다. 입에 짝짝 붙는다.

 
  작년에는 여기에 물이 많아서 얼굴도 닦고 발도 닦았는데 그동안 비가 별로 안 왔는지 물이 없다. 아쉽다. 연하천 대피소 팻말 옆에는 시가 적힌 나무판이 걸려있다.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아무리 머리통을 돌려봐도 뭔 소린지 모르겠다. 오지 말라는데 만석이 되도록 몰려오는 우리들은 견딜 수 없어서 온 것일까?

 
  방 배정을 받고 저녁을 먹었다. 구름이 슬슬 몰려온다. 우리는 2층이라 오르내리기가 힘들다. 하지만 2층이라 따뜻해서 좋다. 추운 줄 모르고 잘 잤다. 여기는 전기장판이 아니고 라디에이터뿐이다.

 
 
6월 8일 연하천에서 노고단까지
  새벽부터 비가 내리고 안개가 자욱하다. 가다가 밥 먹기는 힘들 것 같아 햇반을 사서 주먹밥을 만들었다. 5번 동생이 가져온 오이지 무침과 상숙 씨가 가져온 멸치볶음을 넣고 김으로 싸서 그릇에 담았다.


  온종일 비가 내린다. 빗줄기가 약해질 때 길옆에 서서 김밥을 먹었다. 미리 온 상보와 5번 동생은 추워서 입술이 퍼렇게 변했다. 내가 전생에 무슨 덕을 쌓아서 이리도 동생 복이 많은가 모르겠다. 상보는 모든 예약부터 집행까지 다 알아서 해준다. 대장에, 가이드에, 총무에, 찍사와 포터까지 1인 5역을 한다. 이런 동생까지 얻었으니 천하를 얻은 기분이다.


  온몸이 폭삭 젖어 쫓기듯 노고단대피소에 도착하니 1인실이다. 전기장판도 있고 전기 콘센트도 있어 충전도 맘껏 할 수 있다. 금상첨화로 와이파이도 된다. 연하천 대피소에서 어떤 여자가 노고단대피소는 호텔급이라고 하더니 정말이다.


  젖은 옷을 방바닥에 다 펴놓으니 호텔이 피난민수용소로 변했다. 오늘은 비에 쫓겨 다니느라 사진도 못 찍었다. 등산화도 폭삭 젖어서 신문 대신 런닝셔츠와 팬티를 쑤셔 넣고 물기를 빨아들인 후 꺼내서 바닥에 널었다.

 
 
6월 9일 노고단에서 화엄사까지
  새벽에 일어나 화장실에 가니 벌써부터 성삼재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의 불빛이 번쩍인다. 안개가 가득한데 안개비가 보슬보슬 내린다.
  다시 들어가 누웠다가 5시에 출발하여 노고단에 오르니 여기도 안개가 가득하다. 공단 직원에게 예약증 바코드를 보여주니 카톡을 보여달라고 한다. 가끔 바코드를 캡처하여 다른 사람이 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참 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더니 머리도 좋다. 안으로 들어가니 왜우산풀도 보이고 노루오줌도 보인다.
  노고단은 지리산에서 천왕봉, 반야봉 다음으로 세 번째로 높은 봉우리다. 老姑는 지리산 신령인 삼신할머니를 뜻한다.

 
  다시 노고단대피소로 내려와 햇반과 수프, 남은 반찬을 다 꺼내서 먹고 커피까지 완벽한 아침 식사를 했다.
대피소를 나와 성삼재 방향으로 가다가 화엄사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어제 하루 종일 비가 오더니, 신록이 눈부시다. 한창 나이의 젊은이 모습이다.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그니 날아갈 듯 발이 가볍다. 상보와 5번 동생은 머리까지 감았다. 4일째 씻지를 못했으니 온몸이 꿉꿉하다.

 
  화엄사에 내려와 이 구석 저 구석 보고 있는데 갑자기 스님 한 분이 범종각으로 들어가더니 종을 친다. 웅웅대는 울림이 어찌나 크고 긴지 하늘의 짐승이 우는 듯하다. 그 소리만 들어도 저절로 감화되는 것 같다. 저 종을 만든 사람의 간절한 소원이 깃들어 있어서 그런가 보다.
 

 

  국보인 대웅전도 보고 각황전도 보았다. 각황전은 수리 중이다. 대웅전 앞 오층석탑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깊은 잠에 빠졌다. 그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며 사진을 찍는데도 눈 한번 뜨지 않고 잘도 잔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이 고양이도 절에서 도를 많이 닦아서 그런가 보다.

 
  석탑 꼭대기에는 비둘기 한 마리가 올라앉아 있다. 이곳 동물들은 국보급 보물에서만 노나 보다.


  일주문으로 나오는 길에는 입 막고, 귀 막고, 눈 가린 부처상이 있다. 나쁜 것은 말하지 말고, 듣지도 말고, 보지도 말라는 뜻인가 보다.

 


  일주문 앞에서 택시를 불러 타고 구례로 왔다. 버스터미널 근처 맛집을 물어보니 기사님이 다슬기 요리로 유명한 부부식당으로 데려다준다. 사람들이 번호표를 받고 기다리고 있다. 우리도 68번 대기표를 받고 기다렸다. 한참 기다리니 들어오란다. 안에 들어가 앉으니 금방 음식이 나온다. 다슬기 무침은 새콤달콤 맛있고 다슬기 수제비도 깔끔하니 맛있다.
  커피까지 마시고 버스터미널로 오니 한 시간이 넘게 남았다. 구례 버스터미널은 지붕도 기와지붕으로 멋진데 안의 인테리어도 멋지다.

 
  5번 동생이 아이스커피를 가져와 나누어 마시려는데 웬 아주머니가 "컵을 줄까요?"하고 묻는다. 웬일인가 의아해하며 달라고 하니 안내소로 들어가 종이컵을 갖다준다. 안내소 직원인가 보다. 참 전라도 인심은 끝내준다. 서울서는 자기네 가게에서 산 커피도 여분의 컵을 안 주는데 말이다.

 
  구례에서 출발하여 이인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상보가 설레임을 사 와서 쭉쭉 빨아 먹으니 더위가 싹 가신다. 남부터미널에 내려 각자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4일간의 여행이 한 달은 되는 듯 아득하다. 동생들 덕에 4일간 잘 먹고 잘 놀았다. 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왜 이리도 동생 복이 많은가 모르겠다.
 
  이번 여행은 빡세고 보람차고 뿌듯한 만점짜리 여행이었다. 이 나이에 동생들 덕에 백화 종주(백무동에서 화엄사까지)도 해보고 꼬부랑 깽깽 백수(白首) 할머니가 졸지에 화백(화려한 백수) 됐다.

'기행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4. 7. 1. 체코여행  (2) 2024.07.17
2024. 6. 21. 독일여행  (2) 2024.07.13
2024. 3. 25. 경주여행  (2) 2024.03.30
2023. 12. 29. 남미여행 5  (2) 2024.02.24
2023. 12. 29. 남미여행 4  (4) 2024.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