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24. 5. 9. 가장 잘한 일

아~ 네모네! 2024. 5. 18. 17:38

가장 잘한 일

이현숙

 

  작년 4월에 남편 산소에 다녀온 지 1년이 넘었다. 올해도 가려고 했는데 아이들과 시간 맞추기가 힘들어 여태 못 갔다. 며칠 전 4번 동생이 카톡방에 산소에 가겠느냐고 묻는다. 형부 산소가 대전 둘레 산길 근처에 있는 것 같은데 산소에 갔다가 대전 둘레 산길을 걷자는 것이다. 나야 뭐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남편 산소는 대전과 옥천 경계에 있다.

  수서역에서 SRT를 타고 대전역에 내렸다. 길을 건너가 501번 버스를 타고 삼괴동 덕산마을에서 내렸다. 등산 준비를 하고 산길로 들어섰다. 닭재를 향해 가는 길은 작은 오솔길이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려니 개갓냉이, 꿀풀, 뱀딸기가 평화롭게 피어있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도 정겹다. 이런 곳에 남편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하다.

  계현산성을 지나 닭재에 올라서니 오른쪽은 만인산, 왼쪽은 식장산이란 이정표가 보인다. 대전 둘레 산길 4코스다. 닭재를 넘어가니 옥천군 표지판이 나온다.

  길을 따라 내려가니 왼쪽으로 남편 산소가 보인다. 눈에 익은 납골당을 보니 반갑다. 납골당 문을 열고 들어가 남편 유골함이 잘 있는 걸 보니 안심이 된다. 가지고 간 포와 술, 과일을 놓고 간단히 성묘를 마쳤다.

  납골당 문을 닫고 산행을 시작했다. 다시 닭재로 올라가 정자에서 동생 부부가 가져온 김밥을 먹고 오르막길을 걷는데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어지럽다. 다리가 천근만근 무겁고 한 발짝도 떼기 힘들다. 혼자서 천천히 걷는데 앞서가던 동생이 기다리며 어디가 안 좋으냐고 묻는다. 어지러우니 잠시 쉬었다 가자고 했다. 마침 길옆에 긴 벤치도 있다. 거기 누워 하늘을 바라본다. 남편이 가지 말라고 붙드는 것 같다. 살았을 때도 서로 살갑게 굴지 못했고 잘해준 것도 없는데 왜 같이 있자고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동생이 준 소화제를 먹고 한참 누워있으니 어지럼증도 사라지고 걸을 만하다.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겨본다.

  문득 남편이 나에게 잘해준 일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저 주는 대로 잘 먹고 군소리 없이 잘 살아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자기 몸을 너무 돌보지 않고 살다가 큰 병을 얻었다. 자기가 암인 줄도 모르고 입원했다가 한 달도 안 돼서 죽었다. 남편이나 나나 서로 소 닭 보듯 살았다. 지금 생각하면 좀 안타까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잘해줄 것 같기도 하다. 뭐니 뭐니 해도 남편이 내게 가장 잘해준 일은 빨리 죽은 게 아닌가 싶다. 코로나 때문에 문병도 못 하니 병원에서 고생도 안 하고 오래 끌지도 않았으니 나는 고생한 게 없다.

  그렇다면 내가 남편에게 잘해준 건 무엇일까. 아마도 남편 먼저 보내준 일이 아닌가 싶다. 힘든 독거노인 생활을 내가 맡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남편은 마음도 약하고 살림살이도 서툴러서 혼자 남았다면 나보다 훨씬 힘들었을 것이다. 혹시 착하고 예쁜 여자 만나서 재혼이라도 했다면 더 좋았으려나.

  친정엄마가 가신 후 홀로 계신 아버지를 보았을 때 너무 마음이 아팠다. 엄마의 제사상에 쪼그리고 앉아 술을 올리는 모습도 애처로워 보기 싫었다. 그런 모습을 본 나는 남편에게 내가 먼저 죽으면 하루도 기다리지 말고 즉시 재혼하라고 했다. 남편은 웃으며 어디다 미리 마련해 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토록 빨리 재혼할 수 있겠냐고 했다. 그 꼴 나지 않고 먼저 간 남편은 참 복이 많은 사람이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한 후 갈비뼈를 꺼내서 하와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냥 암수한몸으로 놔두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짝을 찾아 헤맬 일도 없고, 잘못 찾아서 칼부림 날 일도 없을 것이다. 한날한시에 죽을 테니 혼자 남아 고독을 씹는 일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하나님이 실수한 것 같다.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남편을 보면 인간은 한 방울의 이슬이 아닌가 싶다. 수증기가 응결되어 수많은 물 분자가 뭉쳐 있을 때는 우리 눈에 보이지만 온도가 올라가면 하나하나 분리되어 공기 중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러면 우리는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이다. 우리 몸도 수많은 분자들이 모여 있을 때는 눈에 보이다가 하나하나 분리되어 흙으로 들어가는 순간 보이지 않는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 자체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우리 존재는 잠시 뭉쳐진 이슬인지도 모른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면 우주 속 먼지로 흩어져 버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