짠다고 나오나?
이현숙
어제 다큐온이란 TV프로를 보았다. ‘네팔에 간 K-젖소, 엄마가 되다.’라는 제목이다. 1년 전 한국 젖소 101마리를 네팔로 보냈는데 이 중 74마리가 임신에 성공했고 그중 신들리 마을에 있는 토실이라는 암소가 첫 번째 출산을 하게 되었다. 토실이의 출산을 도우려고 77세 된 김영찬 수의사는 네팔행 비행기에 오르는데 야속하게도 토실이는 예정일보다 3일 앞서 진통이 시작됐다. 홀스타인 젖소의 출산을 경험한 적이 없는 현지 수의사들이 어쩔 줄 모르는 상황에서 주민 모두 모여서 무사히 출산하기를 기원한다.
우리나라 촬영팀이 도착하여 토실이의 출산 장면을 찍어 김영찬 수의사에게 보내며 다리가 보인다고 하자 30분만 더 기다렸다가 그래도 안 되면 다리를 잡아당겨 뽑으라고 한다. 세상 모든 일은 때가 있다. 때가 될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한다.
30분을 기다려도 나오지 않고 토실이가 지쳐 쓰러지자 수의사들이 달려들어 송아지 다리를 잡고 잡아당겼다. 송아지가 쑥 빠져나오자 토실이가 혓바닥으로 핥아 깨끗이 닦아준다. 이렇게 젖소도 보내주고 출산도 도와준 한국인에게 감사하다고 송아지 이름을 ‘감사’라고 지었다.
젖소를 지원받은 농가는 처음 낳은 암송아지를 이웃에게 기증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감사를 우마라는 18세 소녀에게 기증했다. 우마는 너무도 기뻐서 감사에게 꽃도 달아주고 입도 맞추며 애지중지한다.
출산을 기뻐하는 것은 송아지를 얻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말을 듣는 순간 깜짝 놀랐다. 나는 젖소란 365일 주야장천 죽을 때까지 젖이 나오는 줄 알았다. 이름도 젖소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란다. 출산을 해야 젖이 나온단다. 하긴 사람도 마찬가지다. 젖이 달렸다고 다 젖이 나오는 게 아니다. 애를 낳아야 젖이 나온다.
토실이는 젖도 잘 나와서 새끼에게 먹이고도 한 번에 20ℓ를 짜냈다. 이걸 집유소에 가서 검사를 받는데 유지방이 많을수록 비싼 값을 받는다고 한다. 우리나라 젖소는 보통 3. 몇 정도인데 토실이는 5.8이다. 그것도 한 번에 20리터씩 하루에 두 번을 짜니 40ℓ가 나오는 것이다. 토실이 주인은 너무 좋아서 싱글벙글 입이 귀에 걸려 내려올 줄을 모른다.
나는 결혼하고 첫 임신이 되었을 때 방광염에 걸렸다. 치료가 잘 못 되었는지 재수가 없으려고 그랬는지 방광염이 위로 쭈욱 올라가 신우신염까지 진행됐다. 내과에 가니 치료과정에서 방광부터 신장까지 엑스레이를 수십 장 찍었다. 내과 의사는 내가 임신 중이라고 미리 말했는데도 잊었는지 다 찍고 나서는 산부인과에 가보라고 했다. 산부인과 의사는 산부인과에 먼저 와야지 이렇게 다 찍고 나서 이제 오면 어떡하냐고 했다. 초기에 이렇게 많이 찍었으니 기형이 될 수도 있고 이미 유산기가 생겼으니 유산을 시키자고 한다. 그런데 처음 임신한 걸 수술하면 불임이 될 수도 있으니 그냥 낳아보자고 했다.
4개월밖에 안 된 아이를 낳으려니 사흘 밤낮으로 자궁 수축 촉진제를 맞으며 진통을 해도 애는 기를 쓰고 나오지 않았다. 배에 주사기를 꽂아 자궁 속에 약물을 주입해도 안 되고 아래로 풍선처럼 생긴 고무주머니를 넣고 공기를 주입해서 부풀린 다음 밖에 무거운 추를 줄에 매달아 구멍을 넓혀보려고 해도 안 된다. 이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내가 앞으로 애를 한 다스 낳는 한이 있어도 절대 유산은 안 시킨다고 다짐했다. 천신만고 끝에 낳기는 낳았다. 간호사는 딸이라고 했다. 4개월이면 성별을 알 수 있나 보다.
자궁 수축으로 애를 낳아서 그런지 젖이 엄청나게 부풀었다. 젖이 너무 아파서 젖을 끌어안고 밤을 꼴딱 새웠다. 젖이 불어 돌덩이처럼 딱딱해졌다. 날이 밝자 병원으로 달려가니 의사도 놀라면서 젖을 말리는 약을 먹어야겠다고 한다. 그래서 약으로 젖을 말려 가라앉혔다.
그 후 내과 의사를 만나러 갈 때마다 미안했는지 임신 안 됐느냐고 물었다. 6개월이 지나 다시 임신하여 딸을 낳았다. 첫 아이를 유산시키지 않았으면 내 딸은 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처음 임신했을 때 젖을 말려버려서 그런지 젖이 불어 터질 것 같아도 나오지를 않았다. 딸에게 젖을 주어야 하니 약을 먹을 수도 없고 뜨거운 수건으로 찜질을 한 후 일하는 할머니가 열심히 주물러도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아기에게 우유를 먹이며 일주일을 착유기로 잡아 뽑기도 하고 매일 찜질을 하면서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다 주물러 터쳐도 나오지 않는다. 아기가 빨아야 젖이 빨리 나온다고 해서 젖을 물리면 아무리 빨아도 안 나오니까 울음을 터트린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겨우 젖이 돌아 나오기 시작했다.
그 후에는 순조롭게 나와서 잘 먹였다. 그때는 출산 휴가를 한 달밖에 주지 않아 한 달 만에 학교에 나갔다. 낮에는 젖을 먹일 수 없으니 화장실에 가서 젖을 짜내어 버리고 저녁에 와서 먹였다. 미처 짜지 못하면 쓰르르 아파오며 젖이 흘러나와 속옷을 적시곤 했다.
다음에 아들을 낳았을 때는 쉽게 젖이 나와 잘 먹였다. 1년 가까이 되니 젖의 양은 점점 줄어드는데 먹는 양은 많아지니 너무 세게 빨아대서 젖꼭지가 부르트고 갈라져서 그 통증 때문에 도저히 먹일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이유식과 우유만 주니 젖 달라고 밤새 울어대는 바람에 업고 꼴딱 날밤을 새웠다. 참 인간 하나 만들기 힘들다.
방송에서 여자 수의사가 네팔에 간 101마리 젖소 중 51마리를 자기가 인공수정 시켰다고 한다. 토실이도 이 사람이 인공수정 시킨 젖소다. 요새는 개나 소나 모두 인공수정을 시키는 듯하다. 심지어 식물도 인공수정 시킨다. 내가 아는 지인은 키위 농장을 하는데 꽃이 피면 꽃가루를 받아서 붓으로 일일이 인공수정 시킨다고 한다. 그래서 요즘은 길거리에서 짝짓기하는 개를 볼 수 없다. 내가 어렸을 때는 동네 길에서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런 장면을 보면 동네 아이들이 빙 둘러서서 구경했다. 어떤 아이는 떼어놓겠다고 집에 가서 바가지에 물을 떠다가 들이붓기도 했다. 그때는 이게 뭔지 몰랐는데 나중에 커서야 이에 짝짓기 행위이고 이런 행위를 통해서 아기가 태어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때가 찰 때까지 조바심하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 성장하기를 기다려야 하고 임신 되기를 기다려야 하고 출산일을 기다려야 한다. 출산도 자궁 수축이 일어나 얘기가 밖으로 나오길 기다려야 한다. 그래야 다음 세대를 이어갈 수 있다. 심지어 별도 생성과 소멸이 반복된다. 우주 먼지가 강력한 중력으로 뭉쳐져 그 열로 빛을 발하게 되고 오래되면 부풀어 폭발하며 다시 먼지가 되어 우주 공간을 떠돌게 된다. 내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 있다면 때가 안 된 것이니 마음 편히 먹고 느긋하게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젖이란 무조건 짠다고 해서 나오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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