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궁 속 인생
이현숙
망우산 능선길을 걷는다. 앞에서 오는 아주머니가 “행복하세요.” 한다. 나도 “네, 행복하세요.” 하고 답례 인사를 한다. 지나오면서 “행복이 뭔디?”하고 혼잣말을 한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생각한다. 이렇게 걷는 것이 행복이 아닐까? 걸을 수 있는 것 자체가 행복이지 싶다. 지난달에 가슴팍을 다쳐서 걷기도 힘들었다. 3주가 다 돼가는데도 기침을 하려면 아프다. 한동안 산책도 못 했다. 걸을 수 있는 건 정말 큰 행복이다.
오전에 소파에 잠깐 누웠다가 잠이 들었다. 길을 걷는데 갑자기 앞이 안 보인다. 한쪽 눈을 가려보니 하얀 바탕에 까만 눈 한 개와 3이라는 숫자만 보인다. 다른 쪽을 가려보니 역시 하얀 바탕에 눈 한 개와 J라는 알파벳 하나가 보인다. 이걸 어떻게 하나 오늘은 3.1절이라 안과도 안 하는데. 걱정하다가 눈을 번쩍 떴다. 꿈이다.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꿈에서 깰 수 있다는 것도 큰 행복이다.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한다면 얼마나 끔찍할까. 엊저녁 TV프로 ‘명의’에서 황반 변성과 백내장에 대해 나왔다. 황반 변성이 되면 시야의 어느 부분이 안 보이거나 변형되어 보인다고 했다. 그걸 보면서 저렇게 되면 어쩌나 걱정했더니 그게 마음속에 남아있었나 보다.
우리에겐 행복의 조건도 많고 불행의 조건도 많다.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아플 때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남편이 부럽기도 하다. 남편은 하늘나라에 갔으니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고 배고프지도 않을 것이다.
인간이 자궁 속에 있을 때는 이런 고통이 없으려나. 열 달 동안은 엄마 뱃속에서 배고픔도 모르고 춥지도 덥지도 않고 편안하게 잘 살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자궁 수축이 일어나면서 사방이 조여올 것이다. 작은 통로를 찾아 나오려면 머리가 빠개지도록 아플 것이다.
내가 딸을 낳을 때 남편은 출근하고 친정엄마와 함께 김원자 산부인과로 갔다. 손으로 만져 보더니, 아기 머리가 너무 크다고 낳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대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오란다. 아픈 몸을 이끌고 이대병원에 가서 찍고 그 사진을 가지고 다시 왔다. 사진을 보며 이리 재보고 저리 재보고 하더니 머리도 크지만 내 골반도 크니 잘하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아침부터 밤까지 아무리 애를 써도 나오지를 않는다.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흡입기로 잡아 뽑았다.
흡입기로 뽑을 때 아래가 크게 상했는지 많이 꿰맸나 보다. 분만실에 들어왔던 엄마는 언니 애 낳을 때도 갔다고 했다. 애는 안 나오고 자궁 속에서 배내똥을 싸서 위험하다고 수술하고 낳았다. 그때 엄마의 마음이 너무 아팠나 보다. 나를 보고는 세 겹으로 꿰맸다고 하면서 수술해서 낳은 거나 다르지 않았다고 했다.
“내가 딸이 여섯인데 그때마다 애 낳는 걸 어떻게 보나?” 하면서 울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이 60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이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아들을 낳을 때는 저녁을 먹고 남편과 함께 산부인과에 갔다. 남편은 분만실에 들어오지 않았으니 어떤 상황이었는지 모르겠다. 이때도 흡입기로 잡아뽑았다. 나는 애 낳는 기술이 없나 보다. 둘 다 흡입기로 뽑아서 그런지 우리 아이들은 태어나서 며칠 동안 토했다. 그걸 볼 때마다 안쓰러웠다.
좁은 자궁 속에 있다가 이 세상으로 나올 때는 힘들고 아프고 어려웠겠지만 이토록 아름답고 경이로운 세상이 있는 줄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우리의 육체는 또 하나의 자궁이 아닐까? 여기서 나가기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 온몸이 여기저기 아플 때마다 내 영혼이 여기서 나가기 위해 애를 쓰는구나 싶다. 진통 기간이 짧은 사람도 있고 몇십 년씩 고생하는 사람도 있다. 모든 사람은 잠자다가 편안히 저세상으로 가고 싶어 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이 육체라는 자궁에서 빠져나가면 더 아름답고 더 경이로운 세상이 나타날지 모른다.
어쩌면 지구도 다른 하나의 자궁일지 모르겠다. 지금은 지구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지만, 나의 영혼은 지구를 벗어나 무한한 우주에서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을 것이다. 우리네 인생은 자궁에서 시작해서 자궁을 벗어나기까지 살아가는 자궁 속 인생인지도 모른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4. 3. 17. 짠다고 나오나? (2) | 2024.03.18 |
---|---|
2024. 3. 8. 서릿발 같은 인생 (2) | 2024.03.08 |
2024. 2. 17. 기슴팍이 하는 일 (0) | 2024.02.27 |
2023. 12. 23. 징징대는 년 (2) | 2023.12.25 |
2023. 12. 14. 어항 속 금붕어 신세 (4) | 2023.1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