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24. 2. 17. 기슴팍이 하는 일

아~ 네모네! 2024. 2. 27. 16:47

가슴팍이 하는 일

이현숙

 

  가슴팍이란 존재는 아무 일도 안 하고 룰루랄라 놀면서 완전 날로 먹는 줄 알았다. 아니 이런 생각조차 안하고 싹 무시했다.

  지난 화요일 평창군에 있는 백덕산에 갔다. 문재에서 산행을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눈이 엄청나게 쌓여있다. 40일 동안이나 남미 여행을 다녀와서 눈길에 대한 감각이 떨어졌는지 아니면 시차 적응이 덜 되어 정신이 멍했는지 자꾸 미끄러진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이 꽤 가파르다. 길옆의 나무를 잡고 조심스럽게 비탈길로 발을 내딛는 순간 미끄덩하며 몸이 획 돌아가버렸다. 몸이 돌면서 옆의 나무에 가슴팍을 정통으로 부딪쳤다. 숨이 콱 막혔다.

  억지로 참고 내려오는데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가슴팍은 그냥 달려있는 게 아니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을 늘였다 줄였다 하며 숨 쉴 수 있게 해준다. 기침도 힘들고 트림할 때도 아프다. 말할 때도 가슴이 아프고 걸을 때도 가슴이 울려서 아프다.

  다음 날 동네 병원에 갔더니 엑스레이를 찍고 초음파로 보고 하더니 뼈에는 별 이상이 안 보인다고 가슴에 주사를 놓고 약을 처방해줬다. 약을 이틀 정도 먹고 또 병원에 갔다. 엑스레이 사진을 다시 보더니 늑골이 약간 어긋났고, 가슴뼈와 갈비뼈 사이 연골에 염증이 생겼다고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실금이 갔을 수도 있으니 한 달간은 조심하는 게 좋겠다고 한다. 이 날도 초음파로 다시 보고 가슴에 주사를 맞았다.

  설상가상으로 기침까지 나니 죽을 맛이다. 기침할 때는 양손으로 가슴을 누르고 최대한 살살하려고 노력한다. 코를 풀 때도 아프고 콧물을 들이마셔도 가슴이 아프다. 소파에 앉을 때나 일어설 때, 현관문을 당길 때도 아프다. 양말을 신으려면 두 손으로 양말의 고무줄을 당겨야하니 아프고, 등산화 끈을 고리에 걸 때도 아프다. 옷을 벗으려면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려 엇갈린 후 당겨야하니 이것도 죽을 맛이다. 더 한심한 것은 용변을 볼 때다. 힘을 주어야하는데 가슴이 아파서 힘을 줄 수가 없다. 보고 나서 휴지로 닦으려면 손을 뒤로 돌려서 닦아야하는데 가슴이 아파 손을 돌릴 수가 없다. 엉거주춤 서서 앞에서 닦는다. 몸을 앞으로 숙이면 또 가슴이 아프니 머리 감기도 힘들고 세수하기도 어렵다. 바닥의 물건을 집으려면 몸을 숙일 수가 없어 다리를 구부리고 물건을 잡은 후 일어서야 한다.

  도대체 모든 동작이 가슴팍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가슴팍이 중심에서 균형을 딱 잡고 조절을 해주어야 한다. 가슴팍이 이토록 많은 일을 하는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 모든 것의 존재 가치는 그것이 고장 나거나 사라졌을 때 알 수 있다. 이 사회에는 무위도식하면서 놀고 먹는 사람들이 있다. 언뜻 보면 이 사회에 별 필요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이런 사람들이 엄청 많은 일을 감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도 남의 눈에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보일지라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중요한 일을 감당하는 가슴팍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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