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23. 3. 2. 빼앗긴 집에도 봄은 오는가?

아~ 네모네! 2023. 3. 11. 11:49

빼앗긴 집에도 봄은 오는가?

이현숙

 

  베란다에 있는 화분에 물을 준다. 아무 생각 없이 물을 뿌리다 보니 난에 꽃대가 길게 올라왔다. 대충 봐도 30cm는 넘겠다. 이렇게 자라도록 보지 못한 게 놀랍다. 이걸 눈이라도 달고 다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남편이 있을 때는 항상 남편이 물을 주었다. 남편은 화분을 일일이 욕실로 옮겨 샤워기로 물을 충분히 준 다음 몇 시간을 기다려 물이 빠지면 다시 거실로 옮긴다. 나는 이게 귀찮아서 모조리 베란다로 내쫓은 후 물뿌리개로 대충 휘휘 물을 뿌린다. 설마 얼어 죽지는 않겠지 하고 겨울에도 그냥 방치했다. 식물들도 이런 나의 무성의함에 그대로 반응한다. 한 마리 두 마리 죽어 나갔다. 별로 언 것 같지는 않은데 왜 죽는지 모르겠다. 성의 없게 준 물은 안 먹겠다고 반항하는 것인가?

  화분의 흙을 만져봐도 별로 마르지 않은 것 같다. 한 마리씩 죽어 나갈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죽은 식물과 흙을 비닐봉지에 담아 망우산 자락에 갖다 버렸다.

  요새 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배수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화분 받침에 물이 항상 고여있으니 흙이 마를 새가 없고 뿌리가 썩은 것 같다. 식물들에게 미안하다.

  남편이 있을 때는 화분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쩌다 남편이 며칠씩 집을 비워도 물 줄 생각을 못 했다. 남편이 돌아와서 식물들이 말랐다고 해서 쳐다보면 시들시들하여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그제서야 눈에 들어온다. 나는 참 무심한 사람이다. 식물이고 동물이고 인간이고 알뜰살뜰 챙길 줄 모른다. 생각이 미치질 않는다. 너무 이기적이라서 그런가? 이렇게 무심한 성격이니 남편이 견디지 못하고 일찍 하늘나라로 가버렸나 보다.

  남편은 젊어서는 70~80개나 되는 화분을 베란다에 가득 놓고 키웠다. 남편의 손은 신의 손인지 식물들이 싱싱하게 잘도 컸다. 허구한 날 들여다보며 정을 준다. 나는 마누라 보는 시간보다 꽃 보는 시간이 더 많네.” 하며 빈정거렸다.

  남편은 화분 파는 가게를 지날 때는 유심히 들여다보며 예쁜 화분이 있으면 자꾸 사들였다. 나는 청소기 돌릴 때 걸리적거린다며 쳐다보지 말라고 했다. 남편은 내가 진공청소기를 휘두르다가 꽃대라도 분지를까 봐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자 힘에 부치는지 화분을 대폭 줄였다. 그래도 열 개 이상은 되었는데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이 아이들도 제 명에 못 죽을 것 같다. 일단 물이 잘 빠지게 하려고 화분 받침을 모두 뒤집어 놓았다. 그래도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다. 아마 1년이 안 되어 모두 죽어 나갈 것 같다. 이렇게 무정한 사람을 만난 꽃들의 팔자가 기구한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 지 팔자다. 식물이나 동물이나 사랑을 먹고 사는지도 모른다. 이토록 사랑을 주지 않는데도 꽃대를 올려 꽃을 피운 난이 신통방통하다. 가장을 빼앗긴 집에도 봄은 오는가 보다.

  망우산 자락길을 걷다 보면 생강나무도 꽃망울을 터트리고, 북방산개구리도 겨울잠에서 깨어나 시끄러울 정도로 울어대며 봄을 찬미한다. 또 열심히 짝짓기도 하며 연못 가득 알을 낳는다. 만물은 죽은 것 같아도 봄이 되면 이렇게 다시 소생하는데 한 번 간 남편은 왜 소생할 줄을 모를까?

  힘들게 산을 오르는 할아버지를 보면 불쌍하기도 하다. 저 영혼은 아직도 저 육신에 갇혀서 나오지 못하고 괴로워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 남편은 감옥 같은 육신에서 빠져나와 그 영혼이 영원한 생명에 합쳐졌다.

  로봇 청소기가 청소를 마치면

청소가 완료되었습니다. 더욱 깨끗한 청소를 위해 물걸레를 세척해 주세요.”하며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이끌려 충전기로 이동한다. 충전기를 향해 곧장 가다가 장애물이 있으면 살짝 비켜서 잘도 찾아간다. 충전기 가까이 가면 요리조리 방향을 맞춰 안으로 쏙 들어가 철썩 자리를 잡고 합체되어 하나가 된다. 내 남편도 이렇게 보이지 않는 영의 힘에 이끌려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을까? 자유로운 영혼이 된 내 남편은 생각할수록 참 복 많은 사람이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3. 4. 1. 꽃눈이 내리네  (0) 2023.04.02
2023. 3. 27. 팔자 좋은 년  (0) 2023.03.27
2023. 2. 13. 맘 놓고 뀌는 방귀  (0) 2023.02.19
2023. 2. 11. 죽어서도 남편 노릇?  (0) 2023.02.12
2023. 1. 25. 너나 잘 하세요.  (4) 2023.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