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과 후
이현숙
인생을 나누는 방법에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남편이 가기 전과 후로 나누어지는 듯하다. 남편이 있을 때 보이던 세상과 가고 난 후의 세상은 왜 이리도 다를까? 모든 것이 새로워진 것 같다. 산은 같은 산이요, 나무도 같은 나무들인데 너무도 생경하게 보인다. 하늘의 구름도 달라진 듯하다. 남편이 있을 때는 어깨에 힘주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녔는데 지금은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어깨가 축 처져서 다닌다. 내가 죽으라고 한 것도 아닌데 무슨 살인자라도 된 것 같다.
용마산 자락길에 있는 오거리 쉼터 앞에 커다란 아까시나무 두 그루가 있다. 그게 멋져 보여서 여러 번 사진을 찍었다. 남편의 모습이 두 나무 사이에 박혀있다. 남편이 간 후 어느 날 가보니 한 그루가 무참히 잘려 나갔다. 언제 잘렸는지 잘린 단면을 보면 좀 시간이 된 듯하다. 이게 없어진 줄 왜 몰랐을까? 몇 달을 다니며 두 눈을 분명히 뜨고 다녔는데 왜 안 보였는지 모르겠다. 사람이 눈을 떴다고 다 보는 게 아니다. 본다고 보는 게 아니고 안다고 아는 게 아니다. 본다고 생각할 뿐이고 안다고 생각할 뿐이다.
두 그루 중 하나가 없어지니 남은 나무가 처량해 보인다. 내 모습을 보는 듯하다. 잘린 나무는 남편을 보듯 애처롭다. 이 세상의 삶을 무참히 잘리고 저세상으로 간 남편을 보는 것 같아 지날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잘린 단면에 누군가 ‘나무야 사랑해’라고 볼펜으로 써놨다. 자르고 껍질까지 벗기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잘린 나무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참 인간이란 아이러니한 존재다.
지인 중 한 사람의 아버지는 일찍 가시고 어머니는 아직 살아있다. 아버지가 가신 후 몇십 년이 지났는데 어머니는 지금도 자식들에게 자기가 죽으면 절대 남편 옆에 묻지 말라고 당부한단다. 살아있을 때 얼마나 힘들게 했으면 여태 그런 말을 할까?
내 남편은 자기가 죽으면 가족 납골당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나는 어둡고 썰렁한 납골당에 덩그러니 들어있는 게 싫다. 나는 화장한 유골을 가루로 만들어 땅에 뿌려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땅속에 묻혀야 빨리 자연으로 돌아갈 것 같다. 그런데 남편 혼자 납골당에 있는 모양을 보니 불쌍한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나도 남편 옆에 그냥 들어가야겠다. 내가 무슨 열녀도 아니고 살았을 때 잉꼬부부도 아니었는데 왜 맘이 이렇게 변했는지 모르겠다. 사람의 마음이란 열두 번도 넘게 변하니 이러다가 또 딴소리할지 나도 모른다. 죽음 후의 처리는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다. 아이들 마음이다. 어차피 나는 내 몸에서 빠져나와 하늘로 올라갈 텐데 남은 육신의 가루가 어디 있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늘도 잘려 나간 나무를 보며 데크길을 걷는다. 얼마나 오랜 세월이 지나야 무심한 마음으로 이 자리를 지나갈 수 있을까? 육신의 상처도 평생을 가는데 마음의 상처는 얼마나 더 오래갈까? 그저 모든 것을 잊는 수밖에 도리가 없을 듯하다.
남편이 병원에 있을 때 면회가 안 되니 매일 아침저녁 전화를 했다. 어느 날은 얼마나 고통이 심한지
“아이고 나 좀 살려줘.” 한다. 그냥 좋은 말로 위로해주면 좋으련만
“내가 어떻게 살려 하나님에게 살려달라고 해.”하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기적이 일어나 살아난다고 해도 다시 한번 이 고통을 겪을 생각을 하면 가슴이 저렸다. 어차피 여기까지 왔으니 그냥 여기서 죽음의 문턱을 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살아난 나사로는 예수님께 감사했을까? 나라면 왜 살렸느냐고 할 것 같다. 그 문턱을 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왜 다시 이리로 데려왔느냐고 따질 것 같다. 어쩌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은 죽음이 아닐까? 우리의 최후 피신처가 죽음일 것이다.
남편이 간 지 5개월이나 되었건만 지금도 산책길에서 왜 혼자 다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지난 8월에 하늘나라에 갔다고 하면 깜짝 놀라며 왜 갑자기 가셨느냐고 묻는다. 처음부터 다시 설명하려면 또 마음이 아프다. 오늘도 데크길을 내려오다가 나에게 언니라고 부르는 아줌마를 만났다. 요즘 왜 혼자 다니느냐고 묻는다. 하늘나라 갔다고 하면 그렇게 열심히 산에 다니며 운동했는데 왜 갑자기 갔느냐고 묻는다. 암이 말기가 되도록 몰랐다고 하면 무슨 암이냐? 왜 미리 발견을 못 했냐? 하고 시시콜콜 묻는다. 이 아줌마는 우리를 만날 때마다 잉꼬부부라고 같이 가는 사람들에게 말하곤 했다. 우리가 잉꼬부부였냐 하면 그건 아니다. 잉꼬가 다 죽었다면 모를까 그건 천부당만부당한 소리다. 무늬만 잉꼬였나보다.
일일이 설명할 때마다 속이 아리다. 이 영감탱이 혼자 편한 세상에 가서 나만 고생시킨다고 생각하면 야속하기도 하고 내가 고생할까 봐 오래 앓지 않고 빨리 갔다고 생각하면 고맙기도 하다.
어찌 생각하면 세상은 참 공평하다.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모두 죽으니 말이다. 내 남편만 죽었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아무리 큰 소리 땅땅 치는 사람도 다 죽게 되어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갑부도 빈털터리 거지도 죽음 앞에서는 똑같다. 모든 걸 다 버리고 빈손으로 가야 한다. 모든 사람이 다 가는 길인데 너무 억울해하지 말고 담담히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남편 간 후 식탁에 앉아 혼밥을 먹을 때마다 앞에 남편이 없는 게 이상하게 느껴진다. 남편이 가기 전에도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아니 안 것이 아니고 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전혀 몰랐던 것이다. 50년을 함께 살았으니 앞으로 50년이 지나야 적응되려나? 50년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내가 무슨 열녀도 아닌 데 따라 죽을 수도 없다. 가급적 이 기간이 짧기만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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