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의 인생
이현숙
1. 내 인생
태어나서 결혼할 때까지는 내 인생을 산 듯하다. 부모 밑에서 부모님이 해주는 밥 먹고 학교 다녔다. 초등학교 들어갈 때의 공포감이 생각난다. 효제초등학교 예비 소집에 갔다. 강당으로 학생들만 데리고 들어갔다. 엄마를 떨어져 혼자 들어가려니 왜 그리도 겁에 질렸는지 선생님이 무슨 소리를 했는지 전혀 모르고 계속 울기만 했다. 다시 운동장으로 나오니 엄마가 다가와
“이 바보야 울기는 왜 우니? 언니는 선생님만 똑바로 쳐다보고 잘 있었는데.” 한다. 팅팅 부은 눈으로 집에 오는데 동네 아줌마들이
“현숙아 너 울었구나.” 한다. 어찌나 부끄러운지 쏜살같이 집으로 들어갔다.
그 후로도 학교가 바뀔 때마다 곤욕을 치렀다. 경기여중에 들어가니 다들 어찌나 똑똑한지 주눅이 잔뜩 들어 구석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지냈다. 특히 영어 시간은 소가 도살장에 끌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영어책을 다 떼고 왔는데 나는 집에서 겨우 알파벳만 외어갔다. 책을 읽는데 나는 어디를 읽는지도 몰라서 다른 애들이 책장을 넘기면 따라 넘겼다. 선생님이 나에게 읽으라고 할까 봐 심장이 쪼그라지는 것 같았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에 들어가니 이런 세상이 있나 싶게 자유로웠다. 산악회 선배들을 따라 전국의 산을 누비고 다녔다. 대학을 졸업하고 용산중학교에 발령받아 교사 생활을 시작했고 1년이 지난 후 결혼했다. 여기까지가 내 인생을 산 것 같다.
2. 엄마로서의 인생
결혼 후 밥을 해 먹으려니 아는 게 없다. 25년 동안 엄마가 뭘 먹여줬는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엄마는 쉽게 쉽게 우리 7남매를 잘도 먹였다. 평생 반찬 걱정을 해야 하는 여자의 신세가 한심했다. 그래도 남편이 까탈스럽지 않아 다행이다.
남편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지내다 보니 딸 아이가 태어났다. 이건 더 장난이 아니다. 퇴근 후 집에 와서 아이를 돌보다가 저녁이면 녹초가 됐다. 밤에 우유를 먹이려면 조느라고 우유병 젖꼭지가 아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정신을 못 차렸다. 2년 후 아들이 태어났다. 점점 더 바빠졌다. 나의 팔다리가 무엇엔가 단단히 묶인 기분이다. 꼼짝달싹을 못 하겠다. 그래도 아이들이 큰 문제 없이 다 잘 자랐다.
아이들과 함께 나도 제2의 인생을 살았다. 다시 초등학교 들어가고 중학교에 들어갈 때마다 긴장하며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아이들과 만화 영화도 보고 어린이대공원도 다니며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간 듯했다. 아이들이 짝을 찾아 떠나자 나의 두 번째 인생도 끝났다.
3. 할머니로서의 인생
외손자 외손녀가 태어나자 제3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같이 소꿉장난도 하고 등에 태워 놀며 다시 어린이가 되었다. 외손자가 커서 재수를 하게 되자 내가 다시 대학시험을 치르는 것처럼 긴장된다. 군대에 가기 위해 신체검사를 받으러 간다고 하니 내 아들이 논산 훈련소에 가던 기억이 난다. 생전 처음 아들을 혼자 떼어두고 오려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구친다. 내 딸도 이런 아픔을 겪어야 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프다.
얼마 전 아들네와 뮤지컬 마틸다를 보았다. 손자가 이걸 꼭 보고 싶다고 해서 같이 갔다. 물질주의에 찌들어 TV를 좋아하고 책을 증오하는 부모와 멍청한 오빠, 폭력적이고 아이들을 싫어하는 교장 선생님 사이에서 어린 천재 소녀 마틸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걸 보고 있자니 또다시 어린이로 돌아간 기분이다. 나는 지금 75살의 나이에 손자 덕에 다시 11살로 돌아가 초등학생의 삶을 살고 있다.
남편도 없이 빈집에서 독거노인으로 살면서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나 모르겠다. 전에는 TV에서 독거노인 소리가 나오면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살다 보니 내가 독거노인이 되었다. 그래도 아이들과 손주 덕에 제2, 제3의 인생을 살 수 있으니 난 참 복 받은 할머니다.
부모 밑에서 25년, 남편과 50년을 살았다. 이제 독거노인으로 얼마나 더 살지 모르겠다. 이 기간이 가장 짧았으면 좋겠다. 이러다가 증손자까지 태어나 제4의 인생을 살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럴까 봐 은근히 겁이 난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3. 1. 13. 나만의 하늘 (0) | 2023.01.16 |
---|---|
2023. 1. 4. 전과 후 (0) | 2023.01.07 |
2022. 12. 30. 다이소에 다있소 (0) | 2022.12.31 |
2022. 12. 11. 마르지 않는 샘 (0) | 2022.12.17 |
2022. 11. 26. 천태만상 (0) | 2022.1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