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2022. 4. 25. 추모의 제주여행

아~ 네모네! 2022. 5. 2. 23:12

추모의 제주 여행

 

이현숙

 

기간 : 2022425~ 429

장소 : 제주도

 

  티엔티 여성팀에서 제주도 여행을 떠났다. 3년째 제주살이를 하는 순환 씨가 주선하여 모든 것을 추진했다. 순환 씨는 어찌나 야물딱진지 비행기 티켓도 수시로 가격을 알아보고 가장 저렴한 표가 나왔을 때 구매한다.

  두 달 전 원장님을 잃은 후 상심한 정연씨가 같이 간다고 하니 모두들 너무 좋아했다. 하루라도 빨리 모든 슬픔을 훌훌 털고 일어나길 바라는 우리의 마음을 받아들여 함께 동행하니 다들 기뻐한다.

 

425일 출발

김포공항에서

  오후 35분 비행기라서 집에서 점심까지 먹고 130분에 김포공항에서 만나기로 했다. 제주에 가 있는 양숙씨는 제주공항에서 만나기로 하여 6명이 출발했다.

  엑스레이 투시기를 통과하는데 직원이 내 가방을 열며 칼이 있다고 한다. 아차! 울릉도 갈 때 넣어둔 칼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울릉도는 배를 타고 가니 그 때 과일이라도 까 먹으려고 가져갔었다. 그냥 버릴까 했더니 미숙씨가 아직 시간이 많으니 내려가서 부치라고 한다. 밑으로 내려가서 짐으로 부쳐야 한다며 목에 나갈 수 있는 종이 목걸이를 걸어준다. 이걸 걸고 다시 나가 체크인 하는 곳으로 가서 칼을 부쳤다. 칼을 종이봉지에 넣고 이름과 내용물을 쓰고 봉한다. 목에 건 종이 덕에 직원 출입구로 빠르게 들어올 수 있었다.

  일행은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미안하다. 늙으면 죽어야 한다더니 갈수록 태산이다. 게이트로 가니 늦게 출발하고 게이트도 바뀌었다. 양숙씨가 너무 일찍 나올까봐 25분 연발한다고 카톡방에 올렸다.

 

제주공항에서 순환씨 집까지

  제주공항에 내려 짐이 나오는 곳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내 칼이 든 봉투가 나오지 않는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1번 출구 쪽에서 다른 직원이 가지고 있으니 그리로 가라고 한다. 거기로 가니 웬 남자 직원이 봉투를 들고 있다. 내 이름과 항공권을 비교하더니 내어준다.

 

  양숙씨를 만나 엔젤 렌트카 사무실로 가는 셔틀버스를 탔다. 우리가 7명이라 9인승 차를 빌렸다. 짐을 싣고 합덕 회어랑 횟집으로 갔다. 정연씨가 원장님 장례 때 고마웠다고 저녁을 사겠다고 한다. 정연씨를 위로하려면 우리가 사야 하는데 뭔가 잘못된 것 같다.

  회정식으로 배불리 먹고 순환씨 집으로 갔다. 비바람이 몰아친다. 쫓기듯 집으로 들어가는데 앞마당에서 은은한 향기가 난다. 텃밭에 샐러리를 심어 그 향기가 진동한다.

  순환씨와 주희씨가 한 방을 쓰고, 정연씨와 명수씨가 같은 방을 쓰기로 했다. 양숙, 미숙, 현숙의 숙 트리오는 윗층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보니 천장에 유리창이 있다. 창문 밖에는 나무도 보이도 빗물 떨어지는 모양이 환상이다.

  천장이 유리로 된 집에 사는 게 내 꿈이었는데 여기서 꿈을 이루게 되었다. 비가 와서 별은 못 보았지만 별빛을 보며 잠드는 기분은 어떨까 상상해본다.

  천장의 나무 대들보가 마치 햇살처럼 퍼져있다.

  이날은 빗소리와 바람 소리를 들으며 아련히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426일 삼다수 숲길

비에 젖은 삼다수 숲

  부지런한 주희씨와 순환씨는 거실 앞 텃밭에서 상추와 샐러리를 뜯고 있다. 둘은 같은 학교를 다닌 친구라는데 그야말로 찰떡 궁합이다. 손발이 척척 맞는다. 기분 좋을 땐 언니라고 부르고 수 틀리면 지지배라고 부르는 모양이 정겹다.

  아침에 일어나니 비가 그쳤다. 오후까지 비가 온다는 예보였는데 일찍 개였나보다 생각하며 기분 좋게 출발했다. 순두부집에 가서 든든히 배를 채우고 삼다수 숲길로 갔다. 여기는 2년 전에도 왔던 곳이라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안개에 싸인 숲은 몽롱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번에는 지난번과 반대 방향으로 돌기로 했다. 여기저기 야생화에 눈을 뺏기다보니 3코스로 가는 길을 놓치고 2코스 쪽으로 갔다. 다시 되돌아와 3코스로 접어들었다. 어젯밤에 비가 많이 내려 폭포에도 물이 많다. 천미천은 폭우시에만 물이 흐르는 건천이라는데 오늘은 물이 콸콸 흐른다.

 

  노릿 물(노루 물)에도 물이 많은데 노루들이 와서 물을 먹던 곳이라 한다. 비가 오락가락하더니 반환점에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쏟아진다. 하필이면 이런 날 우산이 망가져 펴지지를 않는다. 대충 펴서 우산살을 머리통에 대고 썼더니 팬티까지 다 젖었다. 경찰숲터라는 공터에 도착해 순환씨와 주희씨를 기다리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무슨 일이 났나 은근히 걱정을 하고 있는데 둘이 나타난다. 주희씨가 미끌어지며 공중 부양을 했단다. 모자도 흙투성이, 팔꿈치도 흙 범벅이 되었다. 그래도 다친 곳은 없어서 천만다행이다. 다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차로 돌아왔다.

  온몸이 폭삭 젖었으니 더 이상 다른 곳에 갈 수도 없어서 뜨끈한 보말칼국수로 몸을 녹인 후 집으로 돌아왔다. 비 오는 날은 부침개가 최고라고 순환씨와 주희씨가 쑥과 미나리를 넣고 환상의 부침개를 만들었다. 무장아찌와 곰취장아찌까지 곁들이니 세상에 부러운 놈 하나 없다.

  맥주 한 잔씩 하며 즐기는데 미숙씨가 자기 남편이 확진되었다는 메시지가 왔다고 한다. 남편 격리기간 끝날 때까지 제주에 더 머물다 가야겠다고 한다. 미숙씨는 남편이 잠꼬대가 심해서 각방을 쓴다고 하니 정연씨가 남편에게 잘해라, 자기는 뽀뽀도 한 번 못 해주고 보낸 게 한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집에 가면 모두들 남편에게 뽀뽀 해주라고 하니 공장문 닫은 게 언젠데 무슨 뽀뽀냐고들 난리다. 아마 이걸 실천하면 남편이 기절할 거라고 웃어댄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남편과 뽀뽀한 게 언젠지 기억도 안 난다. 이렇게 수다를 떨다가 빗소리를 들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427일 선흘 곶자왈, 북오름, 돌문화공원

선흘 곶자왈 동백동산

  선흘 곶자왈로 가다가 예쁜 골목이 보이자 차를 세우고 골목길을 걸었다. 돌담 옆에 겹동백이 가득 떨어졌다.

  정연씨는 동백꽃 두 개를 젖꼭지 모양으로 가슴에 대고 웃어댄다. 다들 거봉이 너무 밑으로 갔다느니 건포도보다 크다느니 하며 농담을 한다.

  이렇게 농담을 하다보니 오래전에 들었던 우스갯소리가 생각난다.

한 아가씨가 가슴이 작아서 평소에는 브래지어 안에 뽕을 잔뜩 넣고 다녔다. 결혼 후 첫날밤이 되니 가슴이 작은 게 마음에 걸려 신랑에게 실토를 했다. 자기 가슴이 좀 작다고 하니 신랑이 배만 하냐고 물었다. 그것보다 조금 작다고 하니 사과만 하냐고 묻는다. 그것보다 더 작다고 하니 귤만하냐고 한다. 그렇다고 했다. 옷을 벗겨본 신랑이 하는 말 야 이년아 낑깡도 귤이냐?” 했단다.

  다른 사람들은 하트를 만든다고 예쁜 것만 주워다 만드는데 그게 잘 안 된다. 남들이 만든 것은 예쁜 하트모양인데 우리가 만든 것은 찌글찌글하니 영 아니올시다다. 보다 못한 주희 씨가 가까이 오더니, 손으로 확 쓸어버려 한바탕 웃었다. 하트도 아무나 만드는 게 아닌 것 같다. 심장도 늙으면 쭈그러드나보다.

  더 가다가 함덕 해변에 있는 델문도 카페에 들렀다. 바닷가에 있는 멋진 카페다. 여기서 집사부일체촬영을 했는지 촬영 장면을 찍은 사진이 바닷가에 전시되어있다.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다리 쪽으로 갔다. 갯무꽃이 핀 곳에 앉아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었다.

  함덕을 떠나 오늘의 목적지 선흘 곶자왈 동백동산으로 갔다.

  곶자왈의 곶은 숲, 자왈은 나무와 덩굴이 뒤엉킨 곳을 말한다고 한다. 동백동산 앞에 안내소가 있다. 여기 들어가보니 여러 가지 기념품도 판다. 정연씨는 촉감 좋고 예쁘다고 똑같은 무늬의 손수건을 사서 하나씩 나눠준다. 다들 목에도 두르고 모자 안에 넣어 쓰기도 한다. 모자 안에 넣다가 생각하니 원장님 생각이 난다. 원장님은 항상 모자 밑에 손수건을 덮고 모자를 쓴다. 그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 모습을 다시 못 본다고 생각하니 또 가슴이 저려온다.

  미숙씨는 동백꽃 모양으로 만든 핀과 브로치를 7개 사서 나눠준다. 이것도 모자에 꽂고 머리에 꽂고 다들 신이 났다. 안내소 직원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여 잔디밭에 앉아 단체 사진을 찍었다.

  입구로 들어가 오른쪽으로 조금 가니 도틀굴이다. 동굴 안에는 용암선반, 용암주석, 동굴산호 등이 있다고 하는데 동굴 보존을 위해 입구를 막아놓은 것이 못내 아쉽다. 이 동굴은 4.3 사건 당시 피신했던 사람들의 흔적과 유품이 남아있다고 한다.

  도틀굴을 지나 숯가마터를 지나면 먼물깍 습지가 나타난다. 먼물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물이란 뜻이고 깍은 끄트머리란 뜻이다. 연못에 비친 숲의 모습이 아름답다. 먼물깍은 람사르 습지로 지정된 곳이다.

  새로판물과 혹통연못을 지나니 동백산장이 나타난다. 아무도 없는지 문이 굳게 닫혀있다. 선흘리 마을을 지나 입구로 되돌아 나왔다.

 

북오름

  차를 타고 돌문화공원으로 가다가 북오름이란 안내판이 보여 차를 세우고 올라갔다. 북오름은 모양이 북을 닮아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계단길을 올라가니 평평한 능선길이 이어진다. 야트막한 정상에 올라 주변을 바라보고 하산길로 접어 들었는데 순환씨가 도라지를 발견하고 캐기 시작한다. 마침 내가 스틱을 가져가서 이걸로 흙을 후벼파내니 제법 굵은 뿌리가 나타난다. 대충 어림잡아도 6년근은 될 듯하다.

  저녁 때 집에 와서 7등분하여 한 조각씩 맛보았다.

 

돌문화공원

  북오름에서 내려와 돌문화공원으로 갔다. 오늘이 마침 넷째 주 수요일 문화의 날이라 공짜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먹는다더니 기분이 짱이다. 입구에 아이스크림 파는 가게가 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안으로 들어가 너도 나도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입구로 들어가니 전설의 통로가 나타나고 지하로 내려가니 돌문화전시관이 있다. 기기묘묘한 돌들이 전시되어있고, 동영상도 상영한다. 푹신한 방석에 앉아 동영상을 관람했다.

  전시관을 나와 숲길로 들어서니 갖가지 돌로 된 조각상이 즐비하다.

  정연씨는 어디서 고사리를 꺾었는지 돌담 밑에 고사리를 심고 있다. 이게 잘 살려나 의심스럽다. 꺾을 때 마음과 심을 때 마음은 다른가 보다.

  돌문화공원에서 나와 맛난 한식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사방은 캄캄한데 순환씨가 윗층으로 올라와 소쩍새 소리가 난다고 들어보란다. 조용히 귀를 기울이니 과연 소쩍 소쩍 하는 소리가 들린다. 올해도 풍년이 들려나보다. 소쩍새가 솥 적다, 솥 적다 하고 울면 솥이 작도록 수확이 많다는 뜻이라 한다.

 

428

한라산: 어리목에서 영실까지

  오늘은 한라산 등반을 하는 날이다. 어리목에서 올라가 영실로 내려가기로 했다. 어리목 주차장에 차를 대고 본격적으로 등산을 시작했다. 갖가지 야생화가 우릴 반긴다. 고목에 자리잡은 이끼와 족두리풀, 큰괭이밥이 마치 잘 만들어진 분재를 보는 듯하다.

  숲길을 지나니 사제비동산이다. 사제비가 무슨 뜻인지 궁금하여 인터넷을 뒤져보았다. 사제비의 뜻은 확실하게 알려진 바가 없으며 인근 묘비에 새겨진 조접(鳥接)이라는 표기에서 사재비의 유래를 찾기도 한다. 조접은 새접 또는 새접이의 표기로 볼 수 있다. 사제비의 유래를 새잽이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것은 새매를 이르는 제주도 방언이라 한다. 따라서 새매를 닮은 형상이거나 아니면 이 숲에 새매가 서식한데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부터는 나무가 없어 땡볕이 내리쬔다. 데크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니 사제비물이란 약수터가 나온다. 요새 비가 많이 와서 물이 콸콸 쏟아진다. 물병에 물을 가득 채우고 다시 올라간다.

  만세동산 전망대 가까이 가니 커다란 비닐 물통이 보인다. 물이 가득하다. 아마 산불 진화용으로 쓰기 위해 저장해 놓은 듯하다.

  만세동산 전망대에서 한라산 정상 화구벽을 바라보며 간식을 먹는다. 망원경도 있어 더 가까이 볼 수도 있다. 7명이 데크 바닥에 일렬로 앉아 간식을 먹는데 웬 청년이 올라온다. 모처럼 단체 사진을 찍어보자고

학생~ 우리 사진 한 장만 찍어줄래요?” 하니까 그 청년이

학생이요? 저는 48살인데요.” 한다.

우리가 말도 안 돼 28살이겠지 했더니 주민증을 보여준다. 정말 75년생이다. 우리 딸이 74년생인데 49살이니 정말 맞다. 미숙씨가

결혼은 안 했죠? 결혼 안 하면 애야.” 하니까

갔다 왔어요.” 하며 과거사까지 고백한다. 어떻게 그렇게 젊어보이냐고 물었더니 20kg을 뺐단다. 110kg이 넘는 아들 생각이 나서 어떻게 뺐느냐고 물으니 적게 먹고 운동을 많이 했단다.

  전망대를 출발하려는데 순환씨가 핸드폰이 없어졌단다. 주희씨가 전화를 걸어보니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데 도무지 보이지를 않는다. 계속 걸으며 추적을 해보니 데크 밑에서 소리가 난다. 데크의 나무 틈 사이로 빠진 것이다. 난간을 나가 데크 밑으로 기어들어가서 간신히 꺼내왔다. 멀리 가기 전에 알아서 천만다행이다.

  간식도 먹고 휴식도 취했으니 한 달음에 윗세오름 대피소까지 올라갔다. 대피소 데크에 앉아 또 간식을 먹는다. 예전에는 여기 까마귀가 엄청 많았는데 웬일로 까마귀가 보이지 않는다. 주변을 둘러보니 까마귀에게 음식을 주지 말라는 안내문이 있다. 먹을 것을 주지 않으니 먹이를 찾아 멀리 떠났나보다. 야생동물에게 인간 음식을 주는 것은 독약을 먹이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 이건 천 번 만 번 잘한 것 같다.

  여기서 그냥 영실쪽으로 하산하려 했더니 양숙씨가 시간이 이르니 돈내코 코스의 화구 남벽 쪽으로 조금 더 갔다오자고 한다. 남벽 쪽으로 가니 앞이 탁 트이고 화구 모양이 제대로 보인다. 여기서 이 폼 저 폼 잡으며 사진을 찍고 윗세오름 대피소 쪽으로 돌아왔다.

  대피소에 오니 국립공원 직원이 있다. 직원에게 부탁하여 또 단체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어주자마자 입산 금지 줄을 친다. 130분 이후에는 돈내코 코스로 내려가지 못하게 여기서 막는 것이다. 우리는 아슬아슬하게 남벽까지 잘 보고 왔다. 양숙씨가 윗세오름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위에 있는 세 개의 오름이라고 가르쳐준다.

  안내도를 보니 윗세 붉은 오름, 윗세 누운 오름, 윗세 족은 오름이 있다. 영실 쪽으로 조금 내려가니 노루샘이 보인다. 여기도 수질검사표가 있고 물이 콸콸 쏟아진다.

  물병에 물을 가득 채우고 또 내려가니 윗세 족은 오름 가는 길이 있다. 계단길을 올라가니 시야가 탁 트이는 게 속이 확 뚫리는 기분이다. 여기서 보는 백록담 화구벽은 그야말로 천하일경이다.

  하산길에는 진달래가 만발이다. 한라산 진달래는 유난히도 색이 붉다. 식물들은 검은 흙에서 무슨 물질을 빨아올려 저리도 아름다운 색을 연출하는 것일까? 말 그대로 보석보다 아름답다.

  발 아래로 아련한 오름들의 모습이 보이고 슬슬 영실 기암이 모습을 드러낸다. 영실 기암에는 가슴 아픈 전설이 서려있다. 설문대할망에게 500명의 아들이 있었다. 할망이 아들들에게 줄 죽을 끓이다가 그만 죽에 빠져 죽었다. 외출에서 돌아온 499명의 아들들은 평소보다 유난히 맛 있는 죽을 마구 퍼먹었다. 마지막에 돌아온 막내아들이 죽을 푸다가 어머니의 뼈를 발견하였다. 막내 아들은 어머니를 먹은 형들과 함께 살 수 없다고 차귀도로 들어가 바위가 되었고 499명의 아들은 한라산으로 올라가 돌이 되었다. 그래서 영실 기암을 오백나한이라고도 부른다.

  기기묘묘한 모양의 기암을 바라보며 영실 주차장에 이르니 마침 택시 한 대가 있다. 순환씨와 주희씨가 택시를 타고 어리목에 가서 우리 차를 가져오는 동안 우리는 매점에서 맥주를 사서 갈증을 달래며 기다렸다. 40분 정도 지나자 우리 차가 도착한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마지막 밤을 즐겼다.

 

429

제주공항

  아침 940분 비행기를 타려고 일찍 일어나 짐 정리를 하고 대충 청소를 하였다. 텃밭에 있는 샐러리와 상추가 필요한 사람은 따가라고 한다. 도대체 순환씨 인심은 어디까지 인지 모르겠다.

  렌트카를 반납하고 공항으로 와서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였다. 양숙씨는 제주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여기서 작별하기로 하였다. 작별하기 전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정연씨가 또 우리에게 숙제를 낸다. 집에 가면 남편들에게 꼭 뽀뽀를 하라는 것이다.

  원장님과 정연씨가 병원에 입원하여 각자 음압 병실로 들어갈 때 원장님이 이게 마지막이 될지 모르겠다고 했단다. 무언가 느낌이 있었나보다.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한다. 그 때 뽀뽀라도 하고 헤어지지 못한게 가슴에 한이 맺혔다고 한다. 그러면서 제주에 처음 온 날 밤 꿈에 원장님이 나타났는데 와서 뽀뽀를 해주고 갔다는 것이다. 정연씨가 가슴 아파하는 것을 아셨나보다. 이 소리를 듣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구친다. 모두 눈물을 찍어내며 눈물 바람을 하였다.

  정연씨가 뽀뽀를 하라고 이렇게 누누이 강조를 해도 누구하나 선뜻 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명수씨는 아마 그렇게 하면 남편이 기절할 거라고 하고 나도 이런 짓을 하면 남편이 이 여자가 완전히 맛이 갔구나 생각하며 정신 병원으로 보낼 것이다.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면 갈 때가 된거라니 섣불리 할 수도 없다. 우리가 가만히 있자 순환씨가 자기가 대표로 하겠단다. 자기 남편은 아직도 외출하려면 오리 주둥이 같이 입술을 쭉 내밀고 뽀뽀를 해달란단다. 과연 우리 중 막내라서 그런지 아직 부부 금슬이 좋은가보다.

  살다보면 부부간의 사랑도 일정량이 있는 듯하다. 그 양을 다 채워야 이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부터 금슬 좋은 부부가 빨리 이별한다는 말이 있다. 아마도 사랑의 양을 빨리 다 채워서 천국에서 오라고 초대장을 보내나보다.

  이게 사실이라면 우리 부부는 아직도 이별할 날이 멀고 멀었다. 소 닭 보듯 살면서 정이라고는 씨알머리도 없으니 언제 이 양을 다 채우겠냐 말이다.

 

  눈 한 번 감았다 뜨니 김포공항이다. 이번 여행은 원장님을 추모하며 울고 웃는 여행이었다. 우리가 모두 천국에서 다시 만나면 또 원장님을 모시고 천국 여행을 계속할 것이다. 원장님은 거기서도 어디가 좋은지 지금 열심히 연구하고 계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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