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2022. 3. 13. 통영 여행

아~ 네모네! 2022. 3. 21. 13:46

살랑살랑 봄바람 여행

 

이현숙

 

기간 : 2022313~ 315

장소 : 거제도, 연화도, 욕지도, 함양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어오니 우리 마음도 살랑거린다. 앵두나무 우물가도 아니고 동네 처녀도 아닌 동네 할머니들이 봄바람 났다. 물동이, 호미자루 대신 밥솥과 청소기를 다 던져놓고 바람 나서 나갔다.

살살 바람이나 쐬려고 했더니 대장님이 무박으로 가면 어떠냐고 카톡방에 올린다. 70이 넘은 노인네가 밤새 운전하고 다음 날 바로 여행하겠다고 하니 기가 막힌다. 나는 그날 산행 약속이 있으니 13일 아침에 가자고 올렸다.

  조금 있으니 대봉산 케이블카를 타려면 새벽 5시에 가야 한다고 5시 출발은 어떠냐고 한다. 나는 또 엄살을 부린다. 그냥 계획대로 7시에 출발하자고 하니 다른 회원들도 좋단다. 이제 너무 무리하기가 겁난다. ‘좀 덜 보면 되지하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나도 늙기는 늙었나 보다.

  봄바람이나 슬슬 쐬며 놀러 가려고 했는데 대장님은 무슨 전쟁터에 나가듯 죽기 살기로 여행을 하려고 한다. 대장님의 이런 열정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소년같은 감성과 샘물처럼 솟아나는 호기심이 부럽다. 아직도 마음이 청춘인가 보다. 온갖 운동을 해서 그런지 체력도 젊은이 못지않다. 사람은 몸이 죽기 전에 마음이 죽는다. 호기심이 없어진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호기심이 점점 줄어드는 나는 서서히 죽어가는 중이다.

  영희 씨는 달리는 차 앞 유리의 빗방울이 올챙이 같다고 한다. 내 눈에는 긴꼬리를 달고 위로 올라가는 모양이 난자를 찾아가는 정자같이 보인다. 내가 아무래도 남자 밝힘증이 있나 보다.

대장님은 가끔씩 와이퍼를 정지시킨다. 우리가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빗방울 모양과 소리가 좋아서라고 한다. 아직도 감성이 살아있다.

  가다보니 노인 보호구역 30’이란 안내판이 보인다. 어린이 보호구역도 제한속도가 30이다. 하지만 노인 보호구역은 벌금이 없단다. 이거 노인은 죽어도 된다는 소린가 생각하니 웃음이 픽 나온다.

  아침 7시에 잠실에서 출발하여 죽전에서 양숙 씨와 영희 씨를 태운 차는 통영을 향해 달리고 달린다. 12시 배를 타려고 중간에 화장실 가느라고 딱 한 번 섰다. 아침 식사는 금옥 씨가 낸 후원금으로 양숙 씨가 떡을 사 와서 그걸로 해결했다. 대장님 여행의 특징은 식음을 전폐하고 미친 듯이 돌아다니다가 깜깜해져 눈에 뵈는 게 없어야 끝난다.

  아침과 점심을 간식으로 해결했더니 대장님이 식사비 2만 원씩 나눠준다. 가만히 앉아서 2만원 벌었다. 돈 벌기 참 쉽다.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달리다 보니 어느새 통영으로 들어선다.

 

313일 장사도, 거제도, 칠천량

장사도 (까멜리아섬)

  장사도의 자세한 유래는 알 수 없지만, 예전에는 장사도를 진뱀이섬이라고 불렀다. 장사도(, 긴 뱀 , )란 명칭도 섬의 형상이 기다란 뱀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아슬아슬하게 통영 가베 항에 도착하여 장사도 가는 배를 탔다.

  연옥 씨는 빗물이 등산화에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고 비닐로 감쌌는데 비닐봉지가 하나밖에 없었는지 짝 발이 됐다.

  코로나에 비바람까지 몰아치니 배 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다. 온 배를 독채 전세 냈다.

  연옥 씨와 대장님은 갑판으로 나가 갈매기에게 새우깡을 던져준다. 가만히 보니 갈매기가 먹는 것보다 연옥 씨 입으로 들어가는 게 더 많다.

  장사도에 도착하니 부두 옆에 날개 달린 인어아가씨가 우릴 맞이한다.

  땅에 떨어진 동백꽃으로 예쁘게 장식한 것도 보이고 비를 맞고 앉아 있는 소녀상 앞에도 누군가 동백꽃을 놓아주었다.

  조금 더 올라가니 나무 위로 소풍 가는 개미 상도 보이고 동백꽃을 하트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것도 보인다. 장사도를 까멜리아(동백)섬이라고 하더니 동백이 정말 많다. 예나 지금이나, 늙은이나 젊은이나 사랑만한 관심사는 없나 보다.

  바닷가의 전망대를 지나 조금 내려가니 아이들이 엎드려 무동 타는 조각상이 있다. 우리 어려서는 이런 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더 재미있는 게임이 많으니 이런 모습을 볼 수 없다.

  인공폭포를 만든 정원에는 소년이 오줌 누는 상도 있다. 오줌발이 하늘을 찌르듯 힘찬 것을 보면 나중에 밤일도 잘하겠다.

  나전으로 만든 작품을 전시하는 곳에 들어가니 온갖 바다 풍경을 나전으로 꾸며 놓았다. 예부터 통영의 나전칠기는 명품으로 유명하다. 물고기 앞에서 온갖 폼으로 사진을 찍는다.

  ‘별에서 온 그대의 촬영 장소인 동백 숲길에서 또 사진을 찍는다.

  야외공연장에는 12개의 두상이 있고 원형의 관람석도 있다. 비는 계속 오락가락하고 바람이 몰아쳐 우산 쓰기도 힘들다. 살랑살랑 봄바람이나 쐬려고 했는데 우산이 뒤집히게 비바람이 몰아친다. 그래도 볼 건 다 보고 선착장으로 돌아와 가베 항으로 가는 배를 타고 거제도로 돌아왔다.

 

포로수용소

  모노레일을 타고 계룡산에 오르려 했지만, 모노레일이 움직이지 않아 포로수용소를 보기로 했다. 인천상륙 작전 이후 생포된 많은 포로가 수용되었던 곳이다. 수용소 앞에는 6.25 참전 국가들의 국기가 게양되어있다.

  휴전선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모형도 볼만하다.

  끊어진 대동강 철교의 모습도 리얼하게 만들어 놓았다. 철교에 매달린 사람들과 강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이 처절하다.

  수용소에서 지내던 포로들의 생활상도 잘 만들어 놓았는데 대변을 보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드럼통 위에 발판을 놓고 그 위에 앉아 볼일을 보는데 똥자루가 똥꼬에 그대로 매달려있다. 포로들은 갇혀 있는 것도 힘들었겠지만 비인간적인 대우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 최소한의 존엄성은 지켜줘야 할 것 같다. 천막으로 가리개라도 해주면 마음 놓고 볼일을 볼 텐데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다 보는 가운데 일을 보려면 나오던 똥이 도로 들어갈 것 같다. 매킨리산에 갔을 때 4,000m가 넘는 빙하 위에도 임시 화장실이 있고 허리 정도까지는 가려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사용하던 짚차도 전시되어 있는데 양숙 씨가 냉큼 올라탄다.

  POW 갤러리에는 노르웨이 의료진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전시되어 있는데 당시 상황과 그들의 헌신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때의 참상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원에는 흰 매화와 홍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인생무상을 느끼게 한다.

 

칠천량

  포로수용소에서 나와 칠천량으로 향했다. 칠천이라고 해서 7000을 생각했더니 그게 아니다. 은 옻칠이고, 은 내 천이니, 옻칠처럼 검은색 개울이 있었는지, 개울가에 옻나무가 많았는지 그건 모르겠다. 전시실  입구에는 통곡이 터져 나옴을 이길 수 없었다.’라는 글귀가 눈을 끈다. 패전으로 통곡할 수밖에 없었던 심정을 표현한 말이다.

  칠천도와 거제도 사이의 칠천량(漆川梁) 해협에는 200011일에 칠천교가 설치되었다. 이 해협은 임진왜란 때 우리 수군의 유일한 패전으로 기록된 칠천량 해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삼도 수군통제사 원균은 이 전투에서 대패하였고 도주 중 전사하였다.

  통영으로 돌아와 회를 말 그대로 배 터지게 먹고 숙소에 들었다. 회를 못 먹는 대장님에겐 그림의 떡, 아니 그림의 회다.

 

314일 연화도, 욕지도,

연화도 (연꽃 섬)

  새벽에 일어나 첫 배를 타고 연화도로 향했다. 아침 식사도 못 하고 충무김밥을 사서 차에 싣고 배를 탔다. 연화도는 400여 년 전 이순신 장군과 연화도사, 사명대사, 자운선사에 얽힌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로 밝혀져 불교계의 순례지로도 각광받고 있는 섬이다.

  조선 중기 사명대사는 조정의 억불정책으로 남해도로 피하여 보리암에서 기도하던 중이었다. 그때 사명당을 찾아 전국을 헤매던 세 여승과 상봉하게 되었다. 이들은 이것을 불교의 인연이라 생각하여 연화도로 다시 옮기게 되고 깃대봉(연화봉) 토굴에서 수도 정진하여 득도하였다. 세 비구니를 자운선사라 한다.

  세월이 흘러 연화도인은 이곳에서 기도하다 속세를 떠날 때 앞바다에 수장해달라고 유언했다. 수장한 그 자리에서 한 송이 연꽃이 피어올랐다 하여 연화도라 이름 짓게 되었다.

  연화도에 내리니 부두 언덕에 환상의 섬 연화도라고 쓴 비석과 연꽃 그림이 눈을 끈다.

  부둣가 정자에서 추위에 떨며 충무김밥을 먹는다. 정자 옆에는 고양이가 많았는데 우리도 8, 고양이도 8마리다. 그래도 정자 옆에는 흰 동백과 붉은 동백이 피어 우리를 맞아준다. 전망 좋은 식당이다.

  식사를 마치고 보덕암으로 갔다. 해수관음상과 용머리를 볼 수 있다. 용머리는 용이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모양이다.

  보덕암에는 동백이 한창이다. 그런데 무슨 종의 동백인지 시든 꽃도 그대로 달려있어 지저분하게 보인다. 보통 동백은 싱싱한 상태에서 깔끔하게 똑 떨어지는데 이건 개량종인가 보다. 이걸 보니 개량이 아니라 개악(改惡)이란 생각이 든다. 그저 꽃이나 사람이나 갈 때가 되면 빨리 가야지 이렇게 미련이 남아있으면 보기 흉하다. 나도 건강하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한 방에 훅하고 갔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렇게 입방정을 떨다가 죽을병 걸리면 똥오줌 싸대면서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할지도 모른다.

용머리를 향해 가다가 출렁다리를 건넌다.

  출렁다리 옆에는 망부석이 보인다.

  곳곳의 바위 절벽에서 바라보는 용머리가 일품이다.

  용머리에서 돌아 나와 바닷가로 내려갔다. 영희 씨와 미숙 씨는 파도를 향해 가다가 물이 몰려오면 도망치듯 돌아온다. 까마귀도 바닷가에 앉아 몰려오는 파도를 바라본다.

  대장님은 바닷가에 몰려온 쓰레기를 줍느라 바쁘다. 대장님과 산행한 것이 벌써 19년째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산에서 보이는 족족 쓰레기를 줍는다. 우린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즐기는데 혼자 줍는 모습이 안쓰럽다. 자기는 산으로 벌어 먹고사니 산을 아름답고 깨끗하게 가꿔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저 예쁜 것만 보고 즐기라고 한다. 그런 모습을 볼 때 가장 존경스럽다. 환경보호단체에서는 캠페인만 벌이지 말고 우리 대장님에게 표창장을 주어야 할 것 같다.

  곳곳에 염소똥이 보인다. 양숙 씨는 이게 정로환이라고 농담을 한다. 정로환치고는 크기가 좀 크기는 하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어서 그런지 수시로 물이 나온다. 기회만 있으면 전후좌우 눈치를 살피다가 노상 방뇨를 일삼는다. 연화도에 거름을 엄청나게 주고 왔다.

  대장님은 우리 사진을 찍어주느라고 수시로 높은 바위로 올라간다. 거기서 내려올 때는 보는 우리가 더 오금이 저린다. 회원들은 대장님께 조심하라고 당부한다. 사실 말이야 바른말이지 대장님이 삐끗하면 우리 인생도 쫑난다. 젊은 사람들이야 다른 산악회를 따라다니면 되지만 환갑 진갑 다 지나고 70을 훌쩍 넘긴 우리를 어디서 받아주겠느냐 말이다. 대장님이 몸져누우면 우린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이렇게 사는 건 죽음보다 더 괴로운 일이다.

  연화도 끝자락에 있는 출렁다리를 건너니 우도다. 우도로 들어가니 우도 선착장으로 가는 길이 있다. 우리는 차를 연화도에 두었으니 다시 돌아와야 한다. 출렁다리 근처에 웬 갓이 잔뜩 있다. 자연 갓이다. 갓을 뜯느라고 갈 생각을 안 한다.

  12시 배를 타려고 부지런히 연화도 선착장으로 돌아왔다. 선착장에 도착하니 시간이 조금 남았다. 그 틈을 이용해서 연옥 씨는 바닷가로 내려가 파래를 뜯는다. 살림 다 팽개치고 봄바람 쏘이러 온 줄 알았더니 살림 잘하는 사람들은 뭐가 달라고 다르다.

  선착장 배를 대는 곳이 파랗다. 갈매기가 이걸 쪼아먹고 있다. 자세히 보니 여기도 파래가 있다. 갈매기도 파래를 좋아하나 보다.

 

욕지도

  연화도 선착장을 떠난 배가 우도 선착장에 들렀다가 욕지도로 향한다. 욕지도라고 하면 어디서 욕지거리가 들릴 듯한데 사방이 조용하다. 예전에는 녹도라고도 불렸으며 욕지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조선 시대다. 욕지도의 지명은 '辱知蓮華藏頭尾問於世尊욕지연화장두미문어세존'이라는 불교 경전에서 유래한 것이다. '연화장 극락세계를 알고자 하거든, 그 처음과 끝을 부처님께 물어보라'라는 뜻이다.

  욕지도 선착장에 내리려고 하니 바람이 차다. 연옥 씨는 화물칸 안으로 들어간다. 연옥 씨는 졸지에 화물이 됐다.

  욕지도 선착장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한 식당 앞에 게새키 짬뽕이란 글이 보인다. 웬 개새끼인가 하고 자세히 보니 게, 새우, 키조개를 넣고 만든 짬뽕이란다. 궁금해서 이 식당으로 들어가 짬뽕을 시켰다. 해물은 푸짐하게 들었는데 급하게 끓였는지 뭔가 2% 부족한 느낌이다.

  식사 후 새 에덴동산으로 갔다. 어떤 모녀가 여기에 들어와 에덴동산처럼 꾸며 놓은 곳이다. 성부, 성자, 성령이란 이름의 집도 있고, 야곱의 우물도 만들어 놓았다.

  새 에덴동산을 지나 바닷가로 나가니 환상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여기가 에덴동산 같다.

  새 에덴동산에서 나와 삼여전망대로 갔다. 세 개의 섬이 보이기에 삼여 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다. 나무가 자라는 곳은 섬, 나무가 없는 섬은 라고 한다.

  삼여전망대에서 삼례도와 상여도, 삼여와 광주여를 바라보고 나니 대장님이 네팔 풍경을 보러 가자고 한다. 웬 네팔인가 하고 따라가니 정말 네팔처럼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나타난다. 돌을 쌓아 다랭이 밭을 만들고 허름한 집도 있다.

  젯고닥에서 아래로 내려가니 삼거리가 나타난다. 왼쪽으로 가니 출렁다리가 나타나고 이걸 건너니 펠리컨 바위가 나타난다. 여기서는 펠리컨 모양을 볼 수 없다.

  펠리컨 바위에서 다시 나와 삼거리에서 고래 강정 쪽으로 걸었다. 아무리 가도 고래 강정이란 안내판이 없다. 큰길로 나오기 조금 전에 웬 절벽이 보인다. 이게 고래 강정인가 하면서 끝까지 오니 대장님이 차를 대고 기다린다.

  대장님이 인터넷을 찾아 사진을 보니 그게 맞다. 큰길에 이정표만 만들어 놓지 말고 현장에도 안내판이 있었으면 좋겠다. 고래 강정에 가면 강정을 주나 했더니 그게 아니다. 이번에 연옥 씨가 땅콩과 깨 강정을 만들어 왔는데 맛이 기막히다. 다음에는 고래 강정 좀 만들어 오라고 해야겠다.

  강정은 바위 벼랑 끝이라는 뜻인데 바위 벼랑에 파도가 치면서 만들어지는 거품이 마치 고래가 숨을 쉴 때 흰 물줄기를 뿜어내는 모습과 흡사해서 고래 강정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여기서 차를 타고 새천년 기념공원으로 갔다. 2000년에 해맞이 행사를 위해 만든 것 같다. 공원에는 돛단배 모양의 돌조각도 있고, 물고기 모양의 의자도 보인다. 내장을 파먹은 듯 도려내어 의자를 만들었다.

  욕지항으로 내려와 근대어촌발상지 좌부랑개 거리로 갔다. ‘좌부랑개는 부가 넘쳐나는 마을이라는 속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어부와 상인, 그리고 그들의 가족까지 이곳에 거주한 일본인은 2,000명을 넘나들었다. 말이 좋아 근대어촌 발상지다. 수산물 수탈을 위해 일제는 자국민을 위한 명분으로 각종 시설을 재빠르게 끌어들였다. 상수도는 경상권에서 경주 다음으로 설치됐다고 한다. 마을 뒤편에는 욕지 우체국도 있었는데 지금은 문의 두 기둥만 남아있다.

  모밀잣밤나무숲 언덕에는 욕지도 풍경을 그린 이중섭이 앉아 있다. 붓과 팔레트를 든 채 욕지 바다를 응시한다. 이중섭은 1952년부터 약 2년 동안 통영에 머물렀다. 그는 1953년 욕지도에서 23일 머물면서 욕지도 풍경을 그렸는데 황소를 스케치한 곳도 이곳 욕지도라고 하나 확인되지 않았다.

  사방이 캄캄해지도록 돌아치다가 숙소로 정한 동촌마을 회관으로 돌아왔다. 바다에는 배가 떠 있는데 벌써 등을 켜고 출항 준비를 하는 듯하다.

 

315일 천왕봉, 함양,

천왕봉 (392m)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 새천년 기념공원으로 갔다. 여기서 바라보는 펠리컨 바위는 주둥이를 바다에 처박고 물고기를 잡으러 가는 듯하다.

  이틀 동안 비가 내려서 그런지 오늘의 일출은 더 깨끗하고 장엄하다.

  일출을 본 후 천왕봉을 향해 올라갔다. 산에서 바라보는 다도해는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천왕봉에 오르며 양숙 씨가 언제 또 올지 모르겠다고 하며 5년 후가 될지 10년 후가 될지 모른다고 한다. 내가 10년 후면 땅 위에 있을지 땅속에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니 배꼽 잡고 웃는다. 10년이면 내 나이 84세이니 그때까지 살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저 기회는 언제 있을지 모르고 또 언제 인생이 끝날지 모르니 기회가 왔을 때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무조건 따라붙어야 한다.

  대기봉에 가면 누가 대기하고 있나 했더니 초승달 모양의 조형물이 대기하고 있다. 거기 앉아서 포즈를 잡는다.

  조금 더 올라가니 가파른 계단이 나타난다. 그 위에는 군기지가 보인다.

  정상 옆 바위에 암각문이 있다. 숙종 때 통제사 이세선이 욕지도에 진영을 설치하기 위해 사전 답사한 것을 기념하여 새긴 암각문이다. 암각문 앞에 천왕봉 정상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여기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정상에서 내려오다가 태고암 쪽으로 갔다. 편백나무 숲이 우거져 산림욕 하기 딱 좋다.

  대장님과 미숙 씨는 법당에 들어가 지극정성으로 3배를 올린다. 정성을 다하는 모습은 언제 봐도 아름답다.

  태고암에서 다시 능선으로 올라와 대기봉을 지나 새천년 기념공원으로 내려왔다. 숙소로 돌아와 도다리쑥국으로 아침 식사를 했다. 몇 년 전 연옥 씨가 끓여준 도다리쑥국만큼은 안 되지만 그래도 깔끔하고 개운한 맛이 일품이다.

 

욕지도

  배를 타기 전에 모밀잣밤나무 숲을 보러 갔다. 무슨 나무 이름에 모밀도 들어가고 잣도 들어가고 밤도 들어가는지 궁금하다. 모밀잣밤나무 숲으로 가는 길에 겹 동백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한 송이가 어른 주먹만 하다. 영희 씨와 미숙 씨는 머리에 동백꽃을 올려놓고 꽃순이가 되었다.

  숲길을 나와 길가로 오니 밀양박씨 효열비가 보인다. 강성환의 처 박씨 부인이 나물을 팔아 시어머니를 봉양하고 다리 살을 잘라 병든 남편을 낫게 하였다는 비문이 있다. 지금은 시대가 변해 이런 일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다.

 

함양

  11시에 미륵도 중화항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배 안에서 차를 탄 채로 가니 차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는 것 같다. 차 안에서 욕지 고구마 빵을 먹었는데 그 맛이 환상이다. 멀어져가는 욕지도가 아스라이 바다 위에 놓여있다.

  내리면서 보니 화물차들을 배에 있는 고리에 단단히 묶어놓았다. 세월호 생각이 난다. 세월호는 화물차들을 묶지 않아서 배가 기울었을 때 차들이 한쪽으로 모두 쏠리는 바람에 전복되고 말았다. 그런 불상사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통영시장 건어물집에 들러 멸치와 새우 등을 샀다. 연옥 씨는 건어물집을 지나 슬그머니 안으로 들어간다. 나중에 보니 멍게를 샀다. 대장님은 충무김밥과 꿀빵을 사서 차에 싣는다.

  산청으로 이동하여 구형왕릉을 보러 갔다. 돌무더기를 쌓아 올려 만든 무덤이다. 가운데 구멍이 있어 대장님께 물으니 혼백이 드나드는 구멍이란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 정감이 가는 구조다.

구형왕릉은 금관가야의 10대 왕이자 마지막 왕이었던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다. 구형왕은 신라의 명장 김유신의 증조부이기도 한데 신라 법흥왕에게 왕위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재위했다. 전해지는 무덤이므로 전() 자를 앞에 붙여 전 구형왕릉이라고도 한다. 구형왕은 전쟁의 피해에서 백성을 구하기 위해 법흥왕에게 나라를 선양하고 태왕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나라를 내어준 까닭에 돌무덤으로 장례를 치르라고 유언하고 영면하였다.

  일반무덤과는 달리 경사진 언덕의 중간에 총 높이 7.15m의 기단식 석단을 쌓았다. 앞에서 보면 7단이고 뒷면은 비탈진 경사를 그대로 이용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평지의 피라미드식 층 단을 만든 것과는 차이가 있다. 무덤의 정상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함양으로 가다가 길가 바위에서 점심을 먹었다. 대장님이 사 온 충무김밥과 딸기, 연옥 씨가 사 온 멍게로 포식했다. 멍게를 좋아하는 연희 씨는 하도 좋아 입이 귀에 걸렸다. 연옥 씨는 나이도 어린데 어떻게 이토록 기특한 생각을 했는지 생각할수록 신통방통하다. 평소에도 항상 베푸는 성격이 있어서 그런가 보다.

  식사 후 계속 달려 지안재에 이르렀다. 지안재는 말발굽도 쉬어간다는 제한치(발굽 제 , 막을 한 , 우뚝 솟을 치 )에서 유래된 말이다.

  길가 시멘트 축대에는 온갖 낙서가 가득하다. 연옥 씨 이름도 보인다. 석훈이란 아이와 연옥이가 사랑에 빠졌나 보다.

  고갯마루에는 푸드 트럭이 하나 있고 커피와 기념품을 팔고 있다. 차 안의 TV에서는 지안재의 모습을 방영하고 있다. 자세히 보니 장애가 있는 사람이다. 별로 살 것이 없어 그냥 우리 차로 오려니 괜히 미안하여 뒤통수가 따갑다. 온종일 추운 고갯마루에서 손님을 기다렸을 텐데 우르르 내렸다가 그냥 가면 엄청 서운할 것이다. 대장님도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우리 차에서 베지밀을 하나 갖다준다. 복 받을 껴. 오토바이들이 질주하며 지안재를 내려간다. 지안재에는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길이란 표지석도 있다.

 

  지안재를 지나면 오도재다. 이 길은 내륙지방 사람들이 남쪽 해안 사람들과 물물교환을 하려고 장터목으로 가기 위해 넘던 고개다. 오도재(깨달을 오 , )이니 도를 깨닫는 고개라는 뜻이다. 마천면 삼정리 영원사 도솔암에서 수도하던 청매 인오조사가 이 고개를 넘다가 득도하여 오도재라고 하였다.

  다음은 함양의 남계서원을 보러 갔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 유산이다. 이 서원은 영주의 소수서원 다음으로 두 번째 지어진 서원이며, 일두 정 여창 선생을 주향으로 모시고, 동계 정온 선생과 개암 강익 선생을 배향하였다. 1566(명종 21)에 남계(퍼질 남 , 시내 계 )라는 이름으로 사액 되었다. 그 덕을 널리 퍼지게 하려는 뜻인가보다.

  홍살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풍영루(바람 풍 , 읊을 영 ,다락 루 )가 나타난다. 논어에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노래하며 돌아오겠다.’라는 글이 있어서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기수와 무우는 춘추시대의 전설에 나오는 곳이다. 풍영루에는 춘향대제 전통제례 봉행이란 현수막이 걸려있다. 날짜를 보니 바로 오늘이다. 오늘 춘향이에게 제사를 지냈나 보다. 일찍 왔으면 제사 지내는 모습을 볼 수 있었겠다.

  남계서원 옆에는 청계서원이 있다. 조선 성종 때 사림파를 대표하던 탁영 김일손 선생이 공부하던 청계정사 터에 유림들이 세운 것이다. 서원 앞에는 오래된 소나무가 자태를 뽐내고 있다.

  서원 뒤 동산에도 소나무 숲길이 있는데 곳곳에 좋은 글귀를 적은 입간판이 서 있다. 숲길을 걸으며 공부하라는 뜻인가 보다. 오래된 소나무길이 일품이다.

  서울로 올라오며 저녁 식사를 못 했다고 대장님은 또 회비를 되돌려준다. 이렇게 다 돌려주고 뭐가 남는지 모르겠다. 대장님 말대로 돈 버는 거 빼고 다 잘하시는 것 같다.

 

  이번 여행은 빡센 산행도 없고 살랑살랑 봄바람을 쐬며, 룰루랄라 놀다 온 봄맞이 여행이었다. 이 회원들끼리 앞으로도 매년 이런 봄맞이 여행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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