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21. 12. 29. 눈 도화지

아~ 네모네! 2021. 12. 29. 16:36

눈 도화지

이현숙

 

  밤사이 눈이 살짝 뿌렸다. 별일이 없는 날은 남편과 용마산 자락길을 걷는다. 데크길에서 요란한 소리가 난다. 눈을 불어버리는 사람들의 기계 소리다. 요새는 낙엽도 쓸지 않고 이 기계로 날려버린다.

조금 올라가다 보니 난간에 글씨가 보인다.

  ‘사랑이라고 쓰여있다. 과연 사랑은 만국 공통, 만인의 관심사다. 사랑받고 싶고 사랑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능인가 보다.

  ‘행복하자도 보인다. 행복도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단어다. 그런데 행복이란 맘대로 되는 게 아니다. 같은 조건에서 살아도 누구는 행복하고 누구는 불행하다. 행복하고 싶어도 안 되는 걸 어쩌겠는가? 나는 남들이 보면 복 많다고 하는데 죽고 싶은 순간이 참 많았다. 왜 그런지 나도 모르겠다. 4번 동생은 나와 별반 다른 삶을 산 것도 아닌데 죽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단다. 참 신기하다.

  ‘눈이 걸으니 너무 좋다.’는 뭔 소린지 모르겠다. 눈 위를 걸으니 좋다는 것 같은데 맞춤법이 엉망이다. 그래도 좋다니 다행이다.

  ‘구인회 사랑합니다.’는 구인회라는 모임을 하는 사람인가보다. 아홉 명이 모이는 모임인가 본데 이러다가 하나 죽으면 팔인회로 고치려나? 그래도 사랑한다니 좋은 모임인가보다.

  ‘친구들 항상 건강하고 즐겁게하고 하트까지 그려놨다. 누군지 모르지만, 그 소원 이루어지길 바란다. 하지만 언제까지 건강하고 즐겁게 만날 수 있을까? 영원토록 건강하다면 언제 죽음의 문턱을 넘을 수 있을까?

  ‘家和萬事成이라고 한문으로 쓴 사람도 있다. 가정이 화목하고 만 가지 일이 다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예전에는 이런 말을 많이 썼는데 오랜만에 보니 생뚱맞다. 이렇게 한자로 쓴 걸 보면 나이 든 사람이 썼을 것 같다.

  난간 위에 아주 작은 눈사람도 보인다. 눈도 없고 코도 없다. 그냥 눈 뭉치 두 개를 포개 놓았을 뿐이다. 그래도 보는 이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오른다. 그걸 만든 사람의 행복감이 전해진다.

  내려오면서 보니 눈이 녹아 글씨가 없어지고, 어떤 것은 공원관리인이 다 불어버려 흔적도 없다. 이렇게 잠시 잠깐이면 사라지는 것이 우리의 존재가 아닐까? 어쩌면 그래서 우리 인생은 더 사랑스럽고 아름다운지도 모른다.

  사람은 하얀 도화지를 보면 뭔가 그리고 싶고, 하얀 종이를 보면 뭔가 쓰고 싶어 한다.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는 본능 때문인가? 다른 동물들은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고 똥이나 오줌을 근처에 뿌리고 바르곤 한다.

  사람처럼 자신의 형상을 만들거나 글이나 그림으로 표시하는 동물은 없는 것 같다. 선사시대의 암각화를 보면 인간은 뭔가 창조하려는 본능이 있는 듯하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들었다는 성경 구절이 정말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하나님과 인간만이 창조의 욕구를 가진 듯하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도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려는 욕구 때문에 되지도 않는 말을 지껄이고 있다. 하얀 눈 도화지에 쓸 용기는 없고, 그냥 집에 와서 컴퓨터 앞에 앉아 횡설수설 떠들고 있다. 올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려 더 많은 사람들이 눈 도화지에 따뜻한 말을 쏟아내며 행복감에 젖었으면 좋겠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2. 1. 7. 가족이 30명?  (0) 2022.01.08
2022. 1. 1. 내게 기억된 장소 (독후감)  (0) 2022.01.03
2021. 12. 13. 바람칼  (0) 2021.12.13
2021. 12. 11. 내게 묻는 안부  (0) 2021.12.11
2021. 12. 10. 세상이 왜 이래  (0) 2021.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