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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2021. 11. 1. 나의 스승은 누구인가?

by 아~ 네모네! 2021. 11. 1.

나의 스승은 누구인가?

이현숙

 

  홍승완이 지은 스승이 필요한 시간을 읽었다. 책표지부터 별로 맘에 들지 않는다. 너무 어두운 녹색인데다 글씨가 확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표지 밑에는 삶을 바꾸는 두 가지 만남, 사사와 사숙이라고 쓰여있다. 사사라는 소리는 들어봤어도 사숙이란 말은 처음 듣는다. 사전을 찾아보니 스승과 직접 만나서 가르침을 받는 것은 사사이고 책이나 다른 작품을 통해 가르침을 받는 것은 사숙이란다. 그야말로 무식이 통통 튄다.

책표지

 

  표지를 넘겨 앞날개를 보니 홍승완의 소개가 나온다. 약력이라고 하면 사진도 있고 어디서 태어나서 어느 학교를 나와 무슨 일을 하는지 말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런 건 전혀 없고 20대에 스승을 만나 지금은 컨텐츠랩 심재를 운영한다는 소리뿐이다. 아무래도 내가 학연과 지연에 연연하는 세대라 그런지 뭔가 빠진 느낌이다. 어떻게 생긴 인간인지 궁금하여 인터넷을 찾아보니 사진이 나오긴 하는데 여기도 자세한 프로필은 나오지 않는다.

 

속표지 그림도 티미하니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속표지

 

  다음 장을 넘기니 구본형 사부에게라는 글이 나오는데 커다란 지면에 글씨를 어찌나 작게 썼는지 돋보기 없이는 읽기도 힘들다. 이거 노친네들은 보지 말라는 건가 싶다.

 

  그래도 독후감은 써야겠기에 사사와 사숙을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사사師事스승 사일 사자다. 누군가를 자신의 스승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사숙은 사사로울 사 또는 은밀할 사맑을 숙 또는 사모할 숙이다. 은밀하게 사모하여 가르침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 책에는 무수한 사람들의 사숙과 사사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저자 홍승완은 구본형을 사사했고 이 책을 스승에게 바치고 있다.

  맹자는 공자가 죽은 후 백여 년 뒤에 태어났지만, 공자를 사숙하여 유학을 완성했다. 한양대학교 정민 교수는 다산 정약용을 사숙하여 그의 책은 모조리 읽고 그의 편지나 글씨를 가진 사람을 알게 되면 불원천리 찾아가서 보고 사진을 찍었다. 정약용에 관한 책도 여러 권 썼다. 헬렌 켈러는 설리반 선생님을 사사하여 그의 인생이 달라졌다.

  홍승완이나 다른 사람들의 예를 보면 스승을 만나는 순간 첫눈에 반한다. 그냥 쏙 빠진다. 너무 순수해서 그런 것일까? 스승이 돌아가신 후에도 계속 연연해하며 그의 글에서 가르침을 받는다.

  나는 누구를 사숙하거나 사사한 적이 없는 것 같다. 내가 스승의 존재를 간절히 원하지 않아서인지 내 맘이 너무 교만해서 그런지 모르겠다. 32년간 교사를 하면서도 제자가 없다. 3 담임을 하고 졸업식을 마친 후 교실에 혼자 앉아있으면 마냥 허전하다. 나룻배가 된 기분이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이란 시가 떠오른다. 우리 반 아이들을 배에 태워 강을 건너 고등학교로 보낸 것 같다. 아이들은 배에서 내린 손님처럼 뒤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린다.

  400페이지가 넘는 책을 끝까지 읽으며 나의 스승은 누구일까 계속 생각했다. 아마도 나는 예수님을 사숙하고 권남희 선생님을 사사한 게 아닐까 싶다.

  대학교 2학년 때 우리 과 친구가 대학생 성경 읽기 모임에 가자고 했다. 첫날 들은 말씀이 요한복음 5장이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앉은 38년 된 병자에게 예수님이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는 말씀을 듣는 순간 이 사람이 일어나 걸어갔다. 이 말씀을 듣자마자 아하, 내가 20년 된 병자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12년 동안 수많은 선생님에게 무수한 수업을 들었지만 내심 왜 선생님들은 내게 수박 속은 먹여주지 않고 수박 겉만 핥게 해주는 걸까 생각했다. 나는 왜 사는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나 또한 학생들에게 지식만 판매한 상인이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 이게 수박 속이구나.’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셩경을 읽고 있는 나는 예수님을 사숙하고 있나 보다.

  권남희 선생님을 사사한 것은 지금까지 18년째다. 우연히 수필 교실을 찾게 되었지만, 수업을 듣다 보니 나도 모르던 무수한 기억이 떠오른다. 글을 쓰다 보면 내 안의 문제가 나도 모르게 치유된다. 내 안의 돌멩이 하나를 들고 오면 이리 다듬고 저리 다듬어 빛나는 보석을 만들어준다. 선생님을 볼 때마다 그야말로 돈키호테처럼 저돌적인 추진력과 어마어마한 독서량에 놀란다. 그 매력에 끌려 나도 모르게 여기까지 온 것 같다. 나는 매사에 소심하고 독서라고는 숙제 때문에 세 달에 한 권 읽는다.

  아마도 내가 사숙하는 예수님과 사사하는 권남희 선생님과의 인연은 이생이 다할 때까지 이어지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