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21. 11. 18. 잃을수록 감사

아~ 네모네! 2021. 11. 24. 13:54

잃을수록 감사

이현숙

 

  “너희는 좋겠다. 집에 가면 얘기할 사람이 있어서. 나는 적막강산이야.”

대학교 때 같은 과 친구 네 명이 만나 점심도 먹고 차도 마셨다. 집에 갈 시간이 되자 한 친구가 한 말이다. 이 친구는 몇 년 전 남편이 죽어서 혼자 산다. 순간 미안한 감정이 생긴다.

  이 친구 남편은 서울대 교수였는데 정년도 못 채우고 어느 날 갑자기 소파에서 일어나려다 넘어져 돌아가셨다. 그야말로 날벼락을 맞은 것 같다고 하였다. 그 후 매년 기일이 돌아오면 제자들과 함께 성묘하러 간다고 했다. 제자들도 무척 마음이 아팠나 보다. 성묘 갈 때는 남편이 좋아하던 커피를 타가지고 간다고 했다.

  가끔 남편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남편이 없으면 내 맘대로 돌아다닐 수 있어 좋을 것 같다. 결혼 전에는 부모님 눈치 보고 살다가 결혼 후에는 남편 눈치를 보며 산다. 평생 내 맘대로 살아보지 못한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남편이 있음에 감사한다. 함께 밥 먹을 수 있는 남편이 있어 감사하고, 함께 커피 마실 상대가 있어 감사한다. 아마도 남편과 함께 할 날이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요새는 거의 매일 용마산자락길을 걷는다. 파란 하늘을 볼 수 있음에 감사한다. 두 발로 걸을 수 있어서 감사한다. 아름다운 단풍을 볼 수 있어서 감사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어 감사한다.

  온몸이 갈수록 낡아가니 잃어가는 것이 많다. 몇 년 전 왼쪽 눈에 백내장이 와서 안개 낀 것처럼 뿌옇게 보였다. 수술을 하니 잘 보이기는 하는데 눈이 부시다. 요새는 오른쪽 눈에 백내장이 오고 있어 하루에 세 번씩 백내장 약을 넣는다. 왼쪽 눈은 안구건조증이 심해 눈물약을 넣는다. 안약을 넣었는지 안 넣었는지 기억이 안 나서 아침에 약을 넣은 후 안약을 상자에서 꺼내어 화장실 들어가는 곳에 놓는다. 점심때 약을 넣은 후 다시 상자에 넣어 화장대 스킨 앞에 놓는다. 저녁에 세수한 후 스킨을 바를 때 생각나게 하기 위함이다. 눈이 좋을 때는 보이는 것에 감사할 줄 몰랐다. 시력을 점점 잃어가니 보이는 게 감사하다.

  두 다리가 성성할 때는 걸어 다니는 것도 뛰어다니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골다공증도 심해지고 퇴행성 관절염도 생기니 걸어 다니는 것도 점점 힘들어진다. 그래도 아직 걸어 다닐 수 있음에 감사한다.

  위장이 튼튼할 때는 먹을 수 있는 것은 당연지사로 생각했다. 요새는 만성 위축성 위염이 생겨 매운 것도 못 먹고, 밀가루도 소화가 잘 안 되니 떡이나 빵을 먹기도 조심스럽다. 고등어구이는 내가 좋아하는 메뉴인데 이걸 먹고 한 번 두드러기가 나서 고생하고 나니 먹을 자신이 없다. 그래도 아직 내 입으로 씹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어서 감사하다.

  우리는 왜 모든 것을 잃어봐야 그 존재 가치를 아는 것일까? 있을 때 잘하란 말도 그래서 생겼나 보다. 내가 건강을 잃어봐야 건강의 중요성을 알게 되고 젊음을 잃어봐야 젊음의 귀중함을 깨닫는다. 그래서 아직 남아있는 건강에 감사하게 된다.

  잃어버리는 것이 많아질수록 감사가 늘어난다. 잃어버리는 것과 감사는 정비례 관계인가 보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 전에 남아있는 것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 같다. 남편도 언젠가는 아주 잃어버릴 텐데 비록 다 늙어서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는 것 같지만 함께 있음을 감사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