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21. 9. 11. 그래 이맛이야

아~ 네모네! 2021. 9. 20. 14:13

그래, 이 맛이야.

이현숙

 

  몇 달 만에 아들, 며느리, 손자까지 세 명이 우리 집으로 들어선다. 그동안 낮에는 4, 6시 이후에는 2명까지만 사적 모임이 허락되어 며느리는 몇 달 동안 오지 못했다. 아들과 손자만 낮에 왔다가 저녁도 못 먹고 6시 전에 부지런히 갔다. 생각할수록 이게 무슨 짓인가 싶다.

  96일부터 사적 모임이 6명까지 허용되었다. 그것도 조건이 까다롭다.

6시까지는 백신접종 완료자 2+ 미완료자 4명이고,

6시 이후에는 백신접종 완료자 4+ 미완료자 2명이다.

작년부터 웬만한 모임은 모두 스톱 됐다. 인원 제한에 걸려서 만날 수가 없다.

  아들은 대전에 근무하기 때문에 주말에만 올라온다. 토요일마다 세 식구가 우리 집에 와 함께 저녁을 먹고 갔다. 손자는 우리 집에 오는 걸 좋아한다. 만화영화 실컷 보고, 먹고 싶은 것 맘대로 시켜 먹고, 갈 때는 수퍼에 들러 좋아하는 간식을 잔뜩 사 들고 간다.

  그런데 그놈의 인원 제한에 걸려 아빠와 둘이서만 잠시 왔다 가니 내가 보기에도 안쓰러웠다. 오늘은 모처럼 세 식구가 함께 오니 신이 났다. 접종 완료자가 2명밖에 안 되니 6시 이후에는 모일 수가 없다. 5시쯤 이른 저녁을 먹고 6시에 가기로 했다.

  손자는 오자마자 TV를 켜고 만화영화를 본다. 한참을 보더니 탐정 놀이를 하자고 한다. 다들 눈을 감으면 사회자가 각 사람의 손을 눌러 암호를 준다. 세 번 누르면 그 사람은 범인, 두 번 누르면 탐정, 한 번 누르면 시민이란다. 손자가 사회자, 나는 탐정이 되었다. 사회자가 범행 장면을 말한 후 각자의 증언을 듣고 탐정이 범인을 알아내는 것이다. 각 사람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해도 영 모르겠다. 대충 남편을 찍었더니 맞는단다. 탐정 놀이를 몇 번 하고 술래잡기도 하고 단어 맞추기도 했다.

  한참 재미있게 놀다가 주문한 초밥이 와서 맛나게 먹었다. 며느리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이것저것 들려준다.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백화점 놀이를 했는데 손자가 선생님에게 칭찬을 엄청나게 들었단다. 아주 창의적이라고. 그러면서 손자가 그린 그림과 글을 카톡으로 보내준다.

거북이 백화점은 거북이 등껍질 모양이다.

거기 안에 들어가면놀라지 마세요.

시간이 느리게 갑니다!!

직원들이 느리게 움직이고 말도 느리게 합니다.

그래서 쇼핑하는 동안 시간을 느낄 수 없다!!!

스트레스를 모든 생물이 안 받고 평화롭다.

10분 있었는데 100년 지났다.

그러니까우주의 시간과 같다.

그 옆에 치타 백화점이 있는데 거기는 10분 쇼핑을 하면 1초가 지나간다.

아주 빠른 백화점입니다.

당신은 어디로 가고 싶나요?’

라고 한 후 밑에 거북이 백화점과 치타 백화점 그림을 그렸다.

 

  그다음은 나는 기쁨이에요.’와 김이안의 인성 국어사전이다.

  얼굴 그림도 예쁘고 밑에 중곡초등 출판사라고 쓴 것도 재미있다. 손자는 중곡초등학교 3학년이다. 아들과 며느리도 중곡초등학교를 나왔다. 우리 딸이 백일도 되기 전에 면목동에 이사 와서 48년째 살고 있으니 딸, 아들, 며느리, 손자까지 모조리 면돌이와 면순이가 되었다. 손자의 글과 사진을 보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지난주에는 오지 못했다. 우리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카톡방에 올렸더니 아들이 자기는 무릎이 아파서 13층까지 올라오지 못하겠다는 거다. 며느리도 무릎에 알러지가 심해 걷지 못해서 결국 오지 못했다. 손자는 모처럼 기대에 부풀었다가 못 간다고 하니 울었다고 한다.

  비록 우리 집에 와서 우리 그릇도 안 쓰고 수건도 안 쓰고 일회용품만 쓰려고 할 때는 서운한 마음도 들었지만, 우리 집에 오기를 이토록 원하는 손자를 생각하니 그래, 이 맛이야.” 하는 말이 절로 나온다. 손자는 미국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살다가 작년에 한국으로 왔다. 요새 손자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지낸다.

  수많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이 맛에 산다. 세상에 어느 누가 이런 늙은이와 같이 놀려고 하고 늙은이 냄새가 나는 이런 집에 오려고 할까? 모든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손자 콩깍지가 씐 듯하다. 그래서 무슨 짓을 해도 예쁘다. 무엇을 하던 잘하는 것 같고, 마냥 귀엽다. 그저 내 손자가 최고로 보인다. 남들이 볼 때는 지극히 평범한 일인데도 할아버지 할머니 눈에는 엄청 특별하게 보인다. 딸 바보, 아들 바보만 있는 게 아니고 손자 바보도 있다. 하지만 이런 시기도 잠시 잠깐이면 지나갈 텐데 이 행복을 맘껏 누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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