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영이 엄마
이현숙
아들이 동일교회 수요예배에서 설교를 한다기에 일찌감치 컴퓨터를 켜고 기다렸다. 한참동안 준비찬송과 기도가 끝나고 아들이 단상으로 올라선다.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된다. 올해부터 동일교회 전임 전도사로 일하게 되어 잘 할 수 있을까 걱정 반, 기대 반으로 기다렸다.
아들은 조금 긴장했는지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다. 7살 때부터 이 교회에 다녔는데 처음으로 단상에 올라왔다고 말하며 설교를 시작한다. 그래도 크게 실수하지 않고 잘 마쳤다.
설교 후 담임 목사님이 옛날에 효석이와 필리핀 선교 갔을 때 일을 말씀하신다. 홍수가 나서 선교지에 가지 못하고 공항에서 밤새껏 머무르며 찬송을 불렀다는 것이다. 그 때 아들이 기타 치며 찬송 인도하느라 손가락이 다 헐었다고 했다.
영상예배를 다 보고 났는데 희영이 엄마가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내 카카오 스토리에서 사진을 보았는지 사진 얘기로 시작된다.
"어디가.이렇게.멋진데서.찍으셨어요?별일없으시지요?오늘저녁 .어제수요예배.효석이가.전도사님이되어.강단에서.설교를.하네요.인물좋고.아주멋져요.설교도.아주.알이듣기.쉽게또박또박.아주잘해요.고생하고.그어려운공부다하고.무사히잘.다녀와서.저도맘이든든하네요.어릴때내가너무.속상해서.울때.효석이.얼굴만 봐도.슬그머니.맘이가라앉곤했지요.암튼두분이.고생하며갈치신.보람이.있지요.부모님이.선생님이시라.효석이도.아주.잘하네요.선생님했어도.짱.일뻔했어요.설교는.당회장감이예요.효석이전화번호좀.찍어주세요.귀국했는데.전화라도.한통하려구요.두분.한테도.고맙지만효석이.미숙이한테.항상고마운맘.잊지않고살아요.두분감기조심하시구요."
띄어쓰기도 안 하고 맞춤법도 서툴지만 그 간절한 마음이 구구절절 마음에 와 닿는다.
희영이 엄마는 우리가 단독주택에 살 때 우리 집 근처에서 살던 분이다.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두었는데 딸 이름이 희영이다. 희영이는 우리 아들과 동갑내기다. 큰 아들이 소아당뇨 때문에 수시로 병원에 다녔는데 그 때 마다 희영이와 둘째 아들을 우리 집에 맡기고 갔다.
나야 뭐 직장생활 하느라 별로 한 일이 없고 우리 집에서 일하던 할머니가 이 아이들을 보살펴 주었다. 우리 아이 두 명에 이 집 아이들 두 명까지 네 명의 아이들을 먹이고 돌보아주었다. 어쩌다가 희영이가 밥 먹다 토하기라도 하면 싫은 내색 없이 다 치우고 지극정성으로 뒤치다꺼리를 했다.
이 할머니는 동네사람들이 우리 아이들의 친할머니로 알 정도로 우리 애들을 정성껏 돌보았다. 우리 딸이 낳기 한 달 전에 와서 4학년이 될 때까지 우리 집에 있었다.
이 할머니가 딸 만 둘을 낳자 남편이 웬 여자를 데리고 집으로 왔단다. 할머니는 안방에 이부자리까지 깔아주고 자기는 부엌에서 잤다고 했다. 이 말을 듣자 내가 더 울분을 토했다. 그런 년을 그냥 두었냐고. 머리채를 휘어잡고 땅에다 패대기를 치지 그랬냐고 흥분했다. 할머니는 강원도 장평 사람인데 천성이 착해서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집에서 나와 남의 집으로 전전했다고 한다.
희영이 엄마는 할머니에게 두 아이를 맡기고 다니는 것을 미안해하고 항상 고마워했다. 그래서 김장때면 내가 출근한 사이에 둘이서 김장을 다 해치웠다. 우리 아이들이 싫어하면 맡기지 못했을 텐데 싫은 내색 없이 잘 놀아줘서 너무 고맙다고 지금도 그 때 일을 기억한다. 40년도 넘었는데 말이다.
희영이 엄마를 보면 생기기도 순하고 착하게 생겼지만 마음씨도 푸근하고 편안하다. 우리 아들이 설교하는 것이 자기 아들이라도 된 듯 기뻐하고 축하해준다.
내가 아들 전화번호를 알려줬더니 다음 날 바로 전화가 왔단다. 어렸을 때 희영이랑 잘 놀아줘서 너무 고맙다고. 누나한테도 꼭 전해달라고 했단다.
이런 사람들을 볼 때면 아직 이 세상에는 악한 사람보다 선한 사람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삶이 비록 힘들지라도 살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요 한 번쯤은 와 볼만한 곳이라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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