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20. 10. 4. 착한 건망증

아~ 네모네! 2020. 10. 23. 15:07

착한 건망증

 

이현숙

 

  용마산 자락길을 걷는다. 청설모 한 마리가 나무 위에서 살금살금 내려온다. 입에 무언가를 물고 있다. 자세히 보니 밤인 듯하다. 위에서 먹지 왜 내려오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다람쥐나 청설모는 겨울에 먹을 양식을 땅에 묻어둔다는 것을 TV에서 본 기억이 떠오른다.

  하지만 약간의 건망증이 있어서 자기가 어디에 먹이를 묻어두었는지 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렇게 청설모의 착한 건망증 때문에 땅 속에 묻힌 채 겨울을 난 밤이나 도토리는 이듬해에 단단한 껍질을 뚫고 새 싹이 돋아난다는 것이다.

자연의 이치는 생각할수록 오묘하고 신비롭다. 만약 청설모의 기억력이 완벽해서 자기가 묻어둔 밤을 모조리 꺼내 먹는다면 밤은 어찌 새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단 말인가?

  청설모가 늘어나면서 다람쥐는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 청설모는 동네 야산에도 많이 돌아다니는데 다람쥐는 깊은 산에 가야볼 수 있다. 청설모보다 훨씬 귀엽고 아담하고 아름다운 다람쥐가 청설모에게 밀려 점점 줄어드는 걸 볼 때 안타깝기 그지없다.

  청설모와 다람쥐를 혼동하는 사람도 있는데 다람쥐는 갈색 털에 등에 줄무늬가 있고 나무를 잘 타지만 주로 땅에서 생활한다. 반면 청설모는 주로 나무 위에서 생활한다. 먹이의 종류도 약간 달라서 다람쥐는 도토리를, 청설모는 잣을 즐겨 먹는다. 망우산 자락 잣나무 숲에도 청설모가 잣을 다 빼먹고 앙상한 갈비만 땅에 던져놓은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차이점은 다람쥐는 겨울에 겨울잠을 자지만 청설모는 겨울이 되어 흰 눈이 쌓여도 겨울잠을 자지 않고 먹이를 찾아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이렇게 비슷하면서도 다르기 때문에 청설모와 다람쥐는 같은 숲에서 살아갈 수가 있다. 하지만 때론 청설모가 자기 영역에 들어온 다람쥐를 마구 공격하여 쫓아버릴 때도 있다. 그래서 다람쥐는 점점 깊은 산속으로 쫓겨 들어갔나 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건망증이 심해져서 아찔할 때가 있다. 무의식적으로 카드를 가방에 넣고는 어디 둔 줄 몰라서 당황할 때도 있고, 남편 생일을 깜빡 잊고 엉뚱한 약속을 잡기도 한다. 무언가를 가지러 냉장고 앞에 갔다가 왜 왔는지 멍하니 서 있기도 하고 핸드폰을 어디에 두었는지 몰라 옆 사람에게 나한테 전화를 걸어보라고 하기도 한다.

  며칠 전 모임에서 또 실수를 저질렀다. 분명히 선릉역이라고 카톡방에 올렸는데 왜 이걸 혼자 선정릉역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4번 출구로 오라고 해서 갔는데 아무도 없다. 밖에서 기다리나 하고 지상으로 올라가도 없다. 카톡방에 왜 아무도 안 보이느냐고 물어보니 전화가 온다. 혹시 선정릉역에서 내린 것 아니냐고 한다. 다시 카톡을 들여다보니 아차! 선정릉이 아니고 선릉이다. 지난 달 모임 때 분명히 선릉역이라고 말했다는데 그건 까마득히 잊고 왜 혼자서만 선정릉역이라고 생각했는지 알 수 없다. 갈수록 잊어버리는 종류도 다양하고 횟수도 많아진다. 두 눈 뜨고 뻔히 보면서도 엉뚱한 글자로 읽고 머릿속에 단단히 입력해 둔다. 이러다가 엄청난 실수를 저지를까봐 은근히 겁이 난다.

  하지만 건망증이 꼭 나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청설모를 보니 약간의 건망증은 이 자연을 위해 꼭 필요한 요소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 뇌세포가 줄어들어 저장 공간은 좁아지게 마련이다. 적당히 잊고 살아야지 다 기억하다가는 용량 초과로 뇌가 터져버릴 지도 모른다. 과부하가 걸려 전체가 엉망진창으로 뒤엉켜 버릴 수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눈이 어두워지는 것은 일일이 간섭하지 말고 꼭 필요한 것만 보란 뜻이고,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것은 멀리서도 잘 보여 위급상황에서 구출 받기 쉽게 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귀가 어두워지는 것은 너무 시시콜콜 알려하지 말고 꼭 필요한 것만 들으라는 뜻이라고 한다.

  우주의 모든 것은 서로 합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으니 건망증이 심해졌다고 우울해 하지 말고, 눈이 어두워졌다고 슬퍼하지 말고, 소리가 잘 안 들린다고 소침해 질 것이 아니다. 그저 모든 것이 자연의 순리이니 순순히 받아들이면 너 좋고 나 좋고 세상만사 편안하게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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