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20. 7. 24. 닫혀진 꽃잎

아~ 네모네! 2020. 7. 27. 16:59

닫혀진 꽃잎

이현숙

 

  방안에서는 파티가 열리고 있다. 두 아이가 창밖에서 몰래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한 바탕 발레 춤이 끝나고 한 여인이 피아노 앞에 앉는다. 피아노가 부서져라 영혼이 떠나갈 듯 건반을 두드려댄다. 그 여인의 숨이 멎고 그녀를 보는 나도 숨이 멎는다. 두 아이는 넋을 잃고 바라본다.

  갑자기 큰 개가 맹렬히 짖으며 그 아이들에게 달려든다. 두 아이는 겁에 질려 다시 담을 넘어 달아난다. 남자 아이는 담을 넘었는데 여자아이는 담에 매달린 순간 그 개가 치마를 물어 끌어당기는 바람에 다시 떨어지고 만다.

  집 안에서 놀란 사람들이 몰려나와 여자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남자 아이는 담 밖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힘없이 집으로 돌아간다.

  영화 폭풍의 언덕에 나오는 이 장면은 내 뇌리에 새겨져 평생을 따라 다닌다. 그 때 들었던 피아노곡이 무엇인지 그 때는 몰랐다. 그 곡조가 계속 입에서 맴돌았다.

따라라란~ 따라라란~ 따라라라라란.”

그 후에 알고 보니 모차르트의 터키 행진곡이다. 지금도 그 곡이 흘러나오면 그 장면이 떠오른다.

  영국 요크셔 지방, 황량한 들판의 언덕 위에 외딴 저택 워더링 하이츠가 있다. 그곳의 주인 언쇼는 거센 폭풍이 몰아치는 날 밤 고아 소년 히스클립을 데리고 온다. 언쇼의 아들 힌들리는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는 히스클립을 미워하지만, 딸 캐시는 운명처럼 히스클립과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언쇼가 죽은 후 힌들리의 학대가 시작되고 캐시는 어렸을 때 개에게 물렸던 대저택의 아들인 에드가와 결혼한다. 히스클립은 말없이 워더링 하이츠를 떠난다. 몇 년 후 부자가 되어 돌아온 히스클립은 자신을 괴롭힌 이들에게 복수를 결심한다.

  캐시도 에드가와 결혼은 했지만 평생 히스클립을 잊지 못한다. 캐시는 마음의 병을 얻어 죽어 가는데 죽는 순간 히스클립을 찾는다. 결국 히스클립의 품에 안겨 그들이 어려서 놀던 큰 바위를 바라보며 숨을 거둔다. 창가에서 캐시의 축 늘어진 몸을 안고 있는 히스클립 앞에 남편 에드가가 나타난다. 그가 부인을 내려놓으라고 하자 히스클립은 소리치며 울부짖는다.

“She is mine!”

살아서는 에드가의 부인이지만 죽은 캐시는 자기의 것이라고 부르짖는 그 대사가 나의 마음을 찢어놓았다.

  결국 눈보라 치는 겨울밤 히스클립은 캐시의 소리를 듣고 밖으로 뛰쳐나가 캐시의 환영과 함께 폭풍의 언덕으로 걸어가 죽음을 맞이한다. 다음 날 사람들이 히스클립의 발자국을 따라가 보니 그 발자국이 멈춘 곳에 혼자 쓰러져 있었다.

  비극적 사랑 이야기인 <폭풍의 언덕>은 서른 살에 요절한 에밀리 브론테가 남긴 유일한 소설이다. 고등학교 때 이 영화를 보았는데 그 때 들은 터키행진곡과 그들의 강렬한 인상이 평생 지워지지 않는다. 모차르트의 터키행진곡은 지금도 나를 설레게 한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 음악을 들어도, 어떤 영화를 보아도 이런 감동이 일어나지 않는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흡수가 되지 않는다. 나의 꽃잎이 닫혀진 것일까? 청소년기에는 마음의 꽃잎이 열려 어떤 음악을 듣건 어떤 스토리를 접하던 그대로 흡수된 것 같다.

  도대체 나의 꽃잎은 언제 닫힌 것일까? 아마도 결혼을 하면서 닫힌 것 같다. 더 이상 이성에 대한 관심도 없어지고 세상사에 대한 모든 것이 시들해졌다.

  제주도에서 키위농장을 하는 지인이 있다. 키위는 인공수정을 시키는데 수정을 하기 전에는 꽃잎을 벌리고 하염없이 기다린다고 한다. 그러다가 수정을 끝내면 급격하게 시들면서 꽃잎을 닫아버리는데 자기가 봐도 참 신기하다고 말한다.

  사람도 수정을 하기 전에는 꽃잎을 활짝 열고 기다리다가 수정이 되는 순간 꽃잎의 역할이 끝나고 마음의 꽃잎을 닫게 되나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기 전에는 이상형이 어쩌구, 결혼 조건이 어쩌구 하다가도 전혀 반대의 배우자를 받아들이는 사람을 보면 참 희한하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다.

  사람은 결혼할 시기가 되었을 때 즉 마음의 꽃잎이 열렸을 때 곁에 있는 사람과 결혼하게 되는 것 같다. 평소에 생각했던 이상형이란 기준은 다 사라지고 눈에 콩깍지가 씌워져 엉뚱한 사람이 가장 멋지게 보인다. 그 때 꽃잎이 열려있기 때문에 조건이고 나발이고 다 소용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양이다.

  지금의 나는 수정도 끝나고 열매도 다 떨어져 나가고 그 열매가 다시 열매를 맺었으니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이미 꽃잎은 사라진지 오래다. 한 마디로 무늬만 여자다. 싱그러운 바람과 강렬한 향기가 스쳐지나가도 닫혀진 꽃잎은 아무 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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