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20. 8. 7. 흰머리 경로증

아~ 네모네! 2020. 8. 8. 16:33

흰머리 경로증

이현숙

 

  친정엄마는 유난히 언니의 머리에 신경을 많이 썼다. 언니는 맏딸인데다 얼굴도 예뻐서 보는 사람마다 예쁘다고 칭찬을 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엄마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런 딸을 낳은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허구헌 날 머리를 길러 정성스럽게 땋아주었다. 정성을 들인 만큼 효과가 나타나니 일할 마음도 생겼을 것이다. 둘째 딸인 나는 누가 보아도 아니었다. 광대뼈는 튀어나오고 아래턱은 발달하여 그야말로 네모였다. 이런 얼굴에 아무리 공을 들인 들 효과가 없을 것을 안 엄마에게 나는 아예 포기대상이었다. 어려서부터 계속 단발머리였다. 70이 넘도록 한 번도 머리를 기르거나 땋아본 적이 없다. 엄마도 포기하고 나도 일찌감치 포기했다.

  이렇게 자랐으면 내 딸이라도 정성스럽게 키웠으면 좋을 텐데 나는 딸도 포기했다. 한 번도 머리를 기르거나 땋아주지 못했다. 선머슴처럼 항상 커트를 해버렸다. 아들 하나 밖에 없는 언니는 우리 딸을 볼 때마다 왜 하나 밖에 없는 딸을 이 지경으로 놔두느냐고 안타까워했다. 항상 반바지에 티셔츠만 입혔더니 언니가 예쁜 원피스를 사다주었다. 자기 같으면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고 이런 옷도 입히고 저런 옷도 입히겠다고 엄청 아쉬워했다. 딸은 이런 내게 서운했는지 모르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길게 기르고 다녔다. 외손녀 송희도 길게 기르고 있다.

  사실 나는 머리도 그렇고 얼굴도 그렇고 예쁘게 하는 재주가 메주다. 화장도 할 줄 모르고 머리도 만질 줄 모른다. 섣부르게 드라이를 하려고 하면 더 엉망이 되어 안 하느니만 못하게 된다. 내가 다니던 미용실 원장님도 나처럼 머리 못 만지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자기가 예쁘게 만들어서 보내면 엉망진창을 만들어가지고 온다고 한다. 결국 원장님도 포기했다.

에디오피아 여행 갔을 때 이고라는 청년 가이드가 있었다. 머리를 가닥가닥 땋아서 멋진 모습이었다. 땋기도 힘들었겠지만 머리를 감을 때는 어떻게 하나 궁금해서 물어보니 땋은 채로 그냥 감는다고 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머리에 신경 쓰는 것은 마찬가지다. 머리숱이 적으면 10년은 늙어 보인다. 그래서 탈모 방지 약도 많고 샴푸도 많다. 젊어서는 숱이 너무 많아 귀찮던 사람도 나이가 들면 머리카락이 엉성하여 머릿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머리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그냥 사라지는 모양이다.

  30대부터 머리가 희기 시작한 나는 40대부터 할머니 소리를 들었다. 허연 머리를 하고 학생들 앞에 서면 아이들이 실망할 것 같아 염색을 시작했다. 20년 이상 염색을 하다 보니 두피도 약해지고 염색한 후에는 머리가 가려웠다. 미리 약을 먹고 염색을 하면 괜찮다고 하는데 그렇게 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퇴직을 하고 나니 굳이 염색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아 환갑이 지난 후 서서히 염색을 멈췄다. 염색을 안 하니 다른 사람들이 왜 염색을 안 하느냐고 성화다. 남편이 하라고 하지 않냐? 아픈 사람 같아 보인다. 치매노인 같다. 별별 소리를 다 한다. 그래도 꿋꿋이 버티고 있다.

  65세가 되면 나라에서 인정하는 경로가 되어 지하철도 공짜, 웬만한 고궁이나 공원도 공짜다. 머리가 새카맣고 젊어 보이는 친구들은 가끔 주민등록증을 보여 달라고 하는데 나는 무사통과다. 누가 봐도 할머니니 굳이 경로증이 필요 없다. 내가 70대 초반이라고 하면 거짓말 하는 줄 안다. 80은 넘어 보인다는 것이다. 70이면 어떻고 80이면 어떠랴? 염색 안 하고 파마도 안 하니 너무 편해서 좋다. 굳이 경로증 안 가지고 다녀도 되니 얼마나 간편한지 모른다. 무슨 증, 무슨 증, 해도 흰머리 경로증이 최고다.

언니가 사준 원피스를 입은 딸과 언니 아들이 입던 옷을 입은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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