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20. 2. 16. 무재주가 풍성하다

아~ 네모네! 2020. 3. 3. 17:34

무재주가 풍성하다

이현숙

 

   설날이 돌아오면 아무 준비도 안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마우스만 눌러댄다. 여기 저기 대충 송금하고 카톡으로 명절 잘 지내라고 메시지만 전달한다.

   명절날이 돌아오면 하루 종일 빈둥대다가 저녁이면 잠실 사는 딸네 집으로 간다. 딸은 오전에는 시집에 갔다가 저녁은 우리 부부와 먹는다. 시집에서 가져온 전과 나물 등을 놓고 불고기를 구워 저녁상을 그럴 듯하게 차려낸다.

   딸이 어렸을 때 추석이 돌아오면 송편을 만들어보자고 했다. 그러면 나는 너 커서 시집가면 시어머니하고 해 먹으라고 한다. 송편, 만두, 식혜, 약식 기타 등등 평생 해본 일이 없다. 아예 할 엄두도 못 낸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똥배짱 엄마다. 가족들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남편도 아이들도 나는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으로 알고 기대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딸은 김장때가 되면 시집에 가서 시어머니와 김장을 담가서 가져온다. 며느리는 친정 엄마하고 김장을 담근다. 나는 순전히 날로 먹는다.

   우리나라 속담에 다섯 가지 재주를 가진 다람쥐가 궁하다.’는 말이 있다.

이걸 바꿔보면 한 가지 재주만 가진 다람쥐가 더 풍성하게 잘 산다는 말일 듯하다. 사람도 너무 여러 가지 재주를 가진 사람이 한 가지 뚜렷한 재주를 가진 사람보다 더 못 사는 경우가 많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많은 재주가 필요한 것 같지 않다. 특별히 잘 하는 것 하나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

나는 어디에 속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한 가지 재주도 없는 것 같다. 그런데 무재주가 상팔자라는 속담도 있다. 이게 맞는 듯하다. 나는 아무 재주도 없는데 지금까지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오늘 우리 아들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했던 학부모 모임이 있었다. 점심을 다 먹고 났는데 한 엄마가 김치를 준다. 내가 김장 안 했다는 소리를 듣고 한 봉지 가져왔다는 것이다.

   겨울이 되면 김장했느냐는 것이 인사다. 거짓말을 할 수는 없어서 김장 안 한다고 하면 이 사람 저 사람 잘도 준다. 지난달에는 이 모임의 다른 엄마가 배추김치와 총각김치를 줘서 잘 먹었다. 같이 요가 하는 친구도 주고, 친정의 동생들도 준다. 며느리의 친정 엄마도 김장을 하면 해마다 한 통씩 보낸다. 김장을 안 해도 김치 냉장고에는 김치가 가득하다. 지금도 세 집 김치가 진을 치고 있다. 이렇게 수 십 년 동안 나발을 불고 다녔더니 김치 걱정 없이 잘 지낸다. 우리 아들이 어렸을 때 맛이 좀 새로운 김치를 주면, 이건 어디서 가져온 것이냐고 묻곤 했다.

   김치뿐이 아니다. 명절이 돌아오면 친정 동생이 전도 주고, 대보름이 되었다고 나물도 준다. 거기다 옆 아파트에 사는 요가 친구까지 오곡밥과 나물을 주어 지금까지 잘 먹고 있다.

   나는 다섯 째 며느리라 명절 때면 돈으로 대충 때우고 시집에 가지도 않는다. 시부모도 안 계시고 남편이 힘들어서 못 간다고 하니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다른 동서들은 다 대전 사는데 나만 서울 사니 아예 바라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평생을 살다보니 좀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한다. 이렇게 무위도식하며 사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싶다. 열심히 알뜰살뜰 가족들 챙기며 사는 즐거움도 작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나는 인생의 한 가지 재미를 모르고 사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