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20. 1. 10. 벼룻길과 자드락길

아~ 네모네! 2020. 3. 3. 17:26

벼룻길과 자드락길

이현숙

 

   몇 년 전인가 금강 변에 있는 벼룻길에 간 적이 있다. 벼루 길이라고 해서 먹을 가는 벼루를 생각하며 벼루를 만드는 돌이 많이 나나 했었다. 한데 그 후에 알고 보니 벼루는 강가나 바닷가에 높이 솟아있는 벼랑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벼랑 끝에 걸려있는 길이다.

   그 후 동생들과 친정 부모님 산소에 갔다가 청풍호 부근에 있는 자드락길을 걸었다. 자드락은 낮은 산기슭에 있는 비탈진 땅을 말한다. 그러니까 산자락인 셈이다. 호숫가의 산자락에 있는 완만한 길을 걸으니 힘도 안 들고 경치도 빼어나서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우리 아들은 학교 다닐 때는 그런대로 공부를 잘 해서 나는 내 머리를 닮았다고 은근히 만족하며 지냈다. S대 공대에 합격했을 때까지만 해도 기고만장하여 나의 교만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내 아들 앞에는 탄탄대로만 펼쳐질 줄 알았다.

   그런데 입학하고 나서 개기기 시작하는데 대책 없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학교는 아예 가지도 않고 시험도 안 보니 연달아 세 학기 동안 ALL F를 받아왔다. 하루 종일 집에서 낮잠을 자다가 저녁때쯤 부스스 일어나 예수 전도단 집회나 두란노 경배와 찬양 모임에 가곤 했다. 하도 속이 터져서 공대가 적성에 안 맞으면 지금이라고 신학대학으로 가라고 했더니 가타부타 말도 없이 내 속만 바글바글 태웠다.

   그 후 포천에 있는 무슨 아파트에서 합숙하며 훈련을 한다고 거기서 지내다가 주말이면 집에 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40일 금식을 해보겠단다. 저러다 말겠지 했는데 정말로 물만 먹고 몇 주를 다녔다. 한 달에 28kg이 줄더니 눈이 푹 들어가서 해골바가지 같이 되고 허리는 한 줌이 되었다. 죽이라도 먹고 가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그냥 가니 저러다가 길바닥에서 쓰러져 죽을 것만 같았다. 40일이 다 되갈 즈음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방에 생수가 없어서 자스민 티를 마셨는데 계속 토하고 어지러워서 일어설 수도 없다는 것이다. 엄마 아빠가 데리러 와달라고 한다.

   밤중에 남편 차를 끌고 아들이 가르쳐준 주소로 찾아갔다. 우리가 봐도 심각하게 생겼다. 집으로 데리고 와서 다음 날 동네 병원으로 갔더니 의사가 자기는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으니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한다. 위생병원 응급실로 데리고 갔다. 의사가 일단 포도당 주사를 놓고는 아들에게 왜 그렇게 금식을 했느냐고 묻는다. 아들은 아무 말도 없다. 의사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다. 이 때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아주 잃어버리는 줄 알았다.

   이렇게 생난리를 치더니 계속 등록해봐야 등록금만 날릴 것 같다고 군대나 가야겠다고 한다. 우리도 그게 낫겠다 싶어 군대라도 가라고 했다. 군대에 가더니 생각이 좀 바뀌었는지 복학하여 F학점을 모두 다시 수강하여 겨우 졸업을 했다.

   졸업하면 대기업에 취직하여 돈 벌어올 줄 알았더니 취직할 마음이 없는지 이력서 한 번 내보지 않고 하와이에 있는 열방대학인가 뭔가 하는 곳으로 가서 공부를 하겠단다. 이 학교는 주로 목회자들이 공부하는 곳이다. 무슨 학위를 주는 곳도 아닌데 여기서 3년을 보냈다. 이때는 며느리와 함께 갔다. 아들은 대학교 3학년 때 5살 연상인 며느리와 결혼했다.

   아들이 대학교 1학년 때인가 밥 먹다말고 갑자기 엄마는 며느리 나이가 몇 살 차이까지 용납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나는 마음이 넓은 척하며

±5했다. 그랬더니 하필이면 그 열 한 개의 숫자 중 +5년을 선택한 것이다. 처음에는 좀 마음에 걸리더니 아들이 사는 모양을 보니 연상이 좋은 듯하다. 아들이 좀 투정을 부려도 누나처럼 잘 받아주고 바가지도 별로 안 긁는 것 같다. 아들이 마음 편히 사니까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 든다.

   하와이에서 생활한지 3년 후 집으로 오더니 이번에는 광나루에 있는 장신대 목회자 코스에 들어가겠단다. 기가 막히지만 어쩔 수 없어 또 허락했다. 3년 동안 목회자 코스 공부를 하고 졸업한다기에 어디 부목사라도 가려나 했더니 이번에는 미국 유학 가서 신학박사 공부를 하겠다고 한다. 이번에도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철이 덜 들어서 그런가 한 가정의 가장 노릇할 생각은 안하고 또 공부하겠다니 속이 타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석사하고 박사까지 하려면 얼마나 걸리겠냐고 하니 최소 7, 8년은 걸릴 것 같다고 한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박사 논문을 쓰고 있다. 올해 45살이 되었으니 27살 때부터 18년간 AS중이다. 이게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다. 우리 두 노인네는 허리가 휘다 못해 가랑이가 찢어질 지경이다. 전생의 원수를 만난 것이 부부 사이고, 빚쟁이를 만난 것이 자식이라고 하더니 나는 아들에게 엄청 빚을 많이 졌나보다.

   설상가상으로 며느리까지 신학박사가 되겠다고 공부하고 있으니 그 생활이 어떨지 안 봐도 비디오다. 친정 동생들은 이런 내 모습이 안쓰러운지 도대체 언제까지 보태줄 거냐고 당장 딱 끊으라고 한다. 하지만 갑자기 생활비를 끊으면 세 식구가 고스란히 앉아서 굶어 죽을 것 같아 에미로서 차마 그러지도 못하겠다. 그야말로 진퇴양란이다.

   비록 남의 아들은 벼룻길을 갈망정 내 아들만은 자드락길로 가길 바랐는데 자기 스스로 벼룻길을 택해서 가고 있으니 그저 바라보는 부모 마음만 바작바작 탄다. 앞으로라고 어서 벼룻길에서 내려와 자드락길에서 자박자박 걸으며 편안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남의 아들은 다 벼룻길을 갈망정 내 아들만은 자드락길로 보내고 싶은 것이 모든 엄마들의 공통점 아닐까? 어찌 생각하면 지독한 이기주의 같기도 하고 지나친 욕심 같기도 하다. 뻔히 알면서도 이런 생각을 지울 수 없으니 그게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