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20. 1. 3. 그대 품에 안기고 싶어

아~ 네모네! 2020. 3. 3. 17:24

그대 품에 안기고 싶어

이현숙

 

   대학교 1학년 가을, 산악회 선배들과 설악산에 갔다. 1주일 수업을 다 빼먹고 그 주에 시험을 본다고 한 과목이 세 개나 있었는데 무슨 깡으로 따라 나섰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

   난생 처음 설악산에 간다는 기대에 부풀어 버스에 올랐다. 대관령을 넘는 길은 외길이라 군인들이 저쪽에서 무전을 치고 이쪽에서 버스가 간다고 하면 그쪽에서 버스를 보내지 않았다. 도로 상황이 이 지경이니 설악산 신흥사에 이르자 해가 저물었다.

   신흥사 절 마루 밑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은 외설악 구경을 하였다. 비룡폭포와 토왕성 폭포를 보고 다시 신흥사로 돌아오는 길에 개울을 건너다가 물에 빠져 운동화가 폭삭 젖었다. 10월이었지만 개울물이 얼음물처럼 차가웠다. 그 때는 그곳에 다리도 없었고 등산화도 신지 못한 상태였다. 남학생들은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군화를 신고 다녔다.

   하룻밤을 또 지내고 금강굴을 지나 마등령에 올랐다. 여기서 아마도 공룡능선을 탄 듯하다. 이정표도 없고 선배들은 지도를 가지고 다니며 봉우리와 능선을 보고 길을 찾아갔다. 하루 종일 걸어 봉정암에 도착했다. 거기서 밥을 해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일어나니 안개가 뒤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청봉을 향해 한참 올라가다가 산악회장이 이 상태로 올라가봤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니 그냥 백담계곡 쪽으로 내려가자고 하였다. 나야 뭐 신입생인데다 산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니 그저 선배들이 하자는 대로 따를 뿐이었다.

   지금은 백담사에 이르면 셔틀버스도 있고 길도 많이 좋아져 그리 힘들지 않은데 그 때는 하염없이 무념무상으로 걷는 수밖에 없었다. 길고 긴 백담계곡을 내려오다가 계곡의 바위에 걸터앉아 계곡물을 바라보았다. 물 색깔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옥색의 물 위로 둥둥 떠내려가는 빨간 단풍잎들을 보니 문득 내가 이 세상에 나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세상에 올 수 있게 통로가 되어준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용대리 마을까지 내려와야 시외버스가 다니니 죽자 사자 다리가 마비될 정도로 걸어 내려왔다. 그래도 마음만은 하늘을 나를 듯 기쁘고 가벼웠다.

   그 후로도 산에 올라 풀밭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면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같고 마음에 평온함이 흘러넘친다. 혼자서 세상에 부러운 놈 하나 없네~’ 하며 중얼거린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길 잘 했다고 생각한 것은 산의 품에 안겼을 때뿐이다. 결혼했을 때도, 첫 아이를 낳았을 때도 이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쩌다 혼자서 용마산 정상에 올라 벤치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면 하얀 구름이 뭉쳤다 흩어진다. 마치 우리네 인생을 보는 듯하다. 잠시 하나의 형태를 이루었다가 자연으로 흩어져 버리는 모양이 우리 모습과 너무도 흡사하다.

   산의 품에 하루 종일 안겼다가 하산할 때는 엄마 품에서 젖을 흠뻑 빤 아기처럼 배부르고 흐뭇하다. 뭔가 큰일을 한 것 같은 뿌듯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산의 품에 안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될 수만 있다면 백두산을 하고 싶다. 요즘 건배사에 백두산이 인기다.

백 살까지 두 발로 산에 가자!’인데 산에 다니는 사람들이 즐겨 쓰는 건배사다.

   하지만 이건 아무래도 욕심이 너무 지나친 것 같고 죽어서도 산의 품에 안겼으면 좋겠다.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하고 남은 뼈는 가루로 만들어 산에 뿌려달라고 하고 싶다. 바람을 타고 흩어져 산의 품에 안기면 밤에는 별을 보고 낮에는 해를 보며 영원히 산과 하나가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