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19. 12. 8. 주인공이 두려운 아이

아~ 네모네! 2019. 12. 8. 14:11

주인공이 두려운 아이

이현숙

 

   언니는 항상 주인공이었어요. 얼굴도 예쁘고 말도 잘 했어요. 영화를 보고 오면 나를 앞에 두고 영화보다 더 재미있게 얘기를 해줬어요. 나는 멍하니 정신 줄을 놓고 쳐다보았죠. 영화보다 언니의 얘기 시간이 더 길었어요. 온갖 모션을 흉내 내며 신이 나서 떠들었죠. 그 후 몇 년이 지나도록 이모들이 이 얘기를 했어요. 언니는 앞에 서서 신나게 얘기하고 나는 가만히 앉아서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고요.

   언니는 부엌 벽 한쪽 면에 가득히 글씨를 써 놓았어요. 최무룡, 김지미, 최무룡, 김지미……. 이 두 사람 이름을 잔뜩 써 놓았죠. 이 두 배우를 어지간히 좋아했나봐요.

   언니는 맏딸인데다가 얼굴도 예쁘니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 했어요. 나는 언니 그늘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소리 없이 지냈어요. 주로 언니를 따라다녔는데 동생이 따라오는 게 싫었는지 몰래 도망가곤 했죠. 어쩌다 나를 데리고 갈 때는 엄마가 동생을 업혀주었을 때예요. 동생을 업고 나를 데리고 가서는 나에게 동생을 업혀주고 언니는 신나게 뛰어놀았어요. 집에 올 때는 다시 언니가 업고 얌전히 돌아왔죠. 나는 동생을 업고 언니가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어요. 그래도 그렇게라도 따라가는 게 좋았어요. 항상 언니는 주인공이고 나는 엑스트라였죠.

   하지만 제가 더 눈에 띨 때도 있었어요. 1년에 두 번 방학하는 날이죠. 예전에는 방학식을 마치고 통지표를 주었어요. 통지표를 들고 집에 오면 제 통지표는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우수수했는데 언니 통지표는 미미미미 미미미미하는 거예요. 초등학교 성적표에는 수 우 미 양 가로 표시되어 있었어요. 엄마는 언니의 종아리를 때리며 맨날 미미미미가 뭐냐고 야단쳤어요. 나는 언니가 매 맞는 걸 보면 공연히 미안하기도 하고 눈물이 날 것 같았어요. 사실 둘째는 공부에 있어서는 엄청나게 이로운 점이 많죠. 첫째가 하는 걸 보면서 자라니까 반은 배우고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니 유리할 수밖에요.

1년에 이틀만 빼면 항상 언니가 주인공이었죠. 나는 언니만 따라다니면 되니까 주인공이 될 필요도 없고, 될 용기도 없었어요. 이런 상황이 계속되다보니 어디가나 앞에 나서질 못하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는 버릇이 생겼어요.

   결혼 후 시집에 가서도 다섯 째 며느리인 나는 그저 윗동서가 시키는 거나하고 설거지만 하면 되었어요. 그렇게 살다보니 70살이 넘도록 주인공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죽을 때까지 이 버릇을 버리지 못할 것 같아요. 주인공은 뭇 사람의 시선을 받으니 얼마나 피곤하겠어요. 저는 그저 주인공 뒤에 숨어서 자유를 누리는 이런 상태가 참 좋아요.


                                                       - 언니 사진 -

 


                                                          - 내 사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