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19. 11. 15. 무언으로 말하다

아~ 네모네! 2019. 11. 24. 16:00

무언으로 말하다

이현숙

 

   태어나서 지금까지 70년이 넘도록 얼마나 많은 무를 먹었을까? 하지만 무에게 고마움을 표한 적이 없다. 특별히 맛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무에 관한 글쓰기 숙제를 하려니 아무 것도 생각나는 게 없다. 요즘은 김장철이라 무가 지천으로 널려있다. 야채 가게에 쌓여 있는 무를 봐도, 앞집 문 앞에 배달되어 있는 무를 봐도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김장한 것이 몇 십 년 전인지 까마득하다. 아침에 횟집 앞을 지나오는데 큰 화분에 심겨진 무가 싱싱하게 잘 자라고 있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무는 아무 말이 없다. 평소에는 거기 무가 있는 줄도 몰랐는데 무에 대해 뭔가 써보려고 하니 무가 여기 저기 많이 보인다. 하지만 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너무 관심이 없었다고 항의하는 듯도 하고, 샐쭉하니 눈을 흘기는 듯도 하다.

   무 요리도 잘 하는 게 전혀 없다. 그나마 가끔 하는 건 무국과 무나물이다. 무국은 소고기를 기름에 볶다가 물을 조금 넣고 무 썬 것을 넣은 후 푹 끓인다. 간장 좀 넣고 소고기 다시다를 넣어 엉성하게 맛을 낸다. 별 맛이 없지만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먹는다.

   무나물은 채칼로 무를 썰어 물을 약간 붓고 끓이다가 파와 마늘을 넣고 푹 끓인 후 소금, 깨소금, 후추가루를 넣고 대강 섞어서 먹는다. 주로 무나물 할 때 무국도 끓인다. 무가 커서 한 가지만 하면 남기 때문이다. 채칼로 끝까지 썰 수도 없으니 반쯤 채를 썬 후 나머지를 칼로 썰어 무국을 끓인다. 요리에는 관심이 없어 정성을 들이지 않으니 내가 먹어봐도 별 맛이 없다. 무의 진가를 몰라주니 무가 화 낼만도 하다. 무는 자신의 생명을 바쳐 나를 살렸지만 전혀 은혜를 모르니 말이다.

   무뿐이 아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얼마나 많은 생물의 생명을 빼앗았을까? 생명체의 생명을 빼앗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으니 어찌할 방법이 없다. 인간도 엽록체를 갖고 있다면 햇빛과 물과 이산화탄소만으로 영양분을 만들어 살 수가 있을 텐데.

   TV에서 동물들의 언어를 연구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동물의 소리를 녹음하여 그 진폭과 진동수를 체크한 후 그 동물이 어떤 행동을 하는가 연구했다. 그는 제법 많은 언어를 알아냈다. 개는 견언犬言으로 말하고 원숭이는 원언猿言으로 말한다. 용마산 자락길을 걷다보면 까치들의 수다가 요란하다. 서로 주고받는 걸 보면 무슨 대화를 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무슨 뜻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다. 하지만 개는 사람의 말을 많이 알아듣는 것 같다.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선다. 가자고 하면 가고 먹으라고 하면 먹는다. 그런데 사람은 왜 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까? 어찌 보면 개만도 못한 것 같다.

   예전에 우리 집에서 일하던 할머니 말로는 무의 꼬리가 길면 그 해 겨울은 춥다고 한다. 옛날 사람들의 지혜는 지금의 젊은 사람들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사실 무는 미리 추위를 감지하고 뿌리를 깊이 내리는지도 모른다. 자연은 우리에게 무수한 말을 하지만 무심한 우리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무는 무언으로 말하지만 우리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기상대의 발표만 들으려한다.

   꽃을 찍으면 즉시 무슨 꽃인지 알려주는 앱이 있다. 이처럼 앞으로는 동물의 소리를 들려주면 즉시 번역하여 알려주는 앱이 개발될 지도 모른다.

   수많은 재앙 앞에 많은 동물들은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오직 인간은 그 전조 증상을 모르고 그대로 앉아서 당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관측기구를 동원해서 관측을 하지만 속수무책인 때가 많다. 옛 사람들에 비해서 이렇게 촉이 떨어진 것은 너무 기계에만 의지해서 살기 때문일까? 아니면 너무 많은 지식이 우리를 마비시켜 모든 촉을 망가뜨렸을 수도 있다.

   요즘은 많은 기기들이 온갖 언어로 우리에게 무수한 정보를 제공한다. 해외여행 가서 국경을 넘으면 몇 미터 못 가서 대사관에서 메시지를 보낸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몇 번으로 전화하라고 친절히 알려준다. 안심이 되면서도 약간 기분이 상하기도 한다. 하늘에서 내 일거수일투족을 다 내려다보고 있으니 어쩐지 감시당하는 기분이다. 운전할 때도 마찬가지다. 네비년은 몇 미터 앞에 과속방지턱이 있다느니 과속단속카메라가 있다느니 하며 쉴 새 없이 떠들어댄다. 이렇게 내 동작이 낱낱이 드러나니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는 것처럼 꼼짝달싹을 할 수가 없다.

   이제 이런 인위적인 소리에 현혹되지 말고 자연이 들려주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