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19. 11. 7. 색으로 말하다

아~ 네모네! 2019. 11. 24. 15:57

색으로 말하다

이현숙

 

   수필수업을 들으러 가는 날이다. 옷장을 열고 어떤 옷을 입을까 생각한다. 하늘색 패딩은 너무 튀는 것 같고, 짙은 갈색 옷은 너무 어두워 보인다. 이것저것 뒤적이다가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색의 옷을 입고 나선다.

   사실 장소에 따라 어느 정도 정해진 색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장례식장에 갈 때는 너도나도 검은 색 옷을 입는다. 검은 색 옷만 입어도 애도의 뜻을 전하는 셈이다. 아마 빨간 옷을 입고 장례식장에 나타나면 주위의 시선을 총 집중시킬 것이다.

   결혼식장에 갈 때는 빨간 버버리 코트를 입는다. 보는 사람도 입는 사람도 기분이 상쾌하다. 기분이 업 된다. 교회 갈 때는 붉은 색 옷을 잘 안 입는다. 주위 시선을 고려하여 점잖은 색으로 고른다. 체육관에 갈 때는 아무거나 막 입고 산에 갈 때는 최대한 유치찬란한 색으로 고른다.

   옷의 색이 가지는 힘은 대단하다. 어떤 색은 거저 줘도 못 입겠다. 솔직히 말해서 입을 용기가 나지 않는다. 우리 등산반에는 무채색 옷만 입는 사람이 있다. 10여년을 보아도 거의 검은 색이다. 배낭도 검은색 신발도 검은 색이다. 사진을 찍어보면 별로 예쁘지 않다. 본인은 검은 색이 제일 좋다고 하는데 어쩐지 저승사자가 연상되어 기분이 별로다. 내가 저승 갈 날이 가까워져서 그런가?

   처음 보는 사람의 옷을 보면 그 사람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옷의 모양도 그렇지만 특히 색깔이 그 사람을 잘 대변한다. 심리상태에 따라 좋아하는 색깔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색을 좋아하는가를 보고 그 사람의 성격을 알아내기도 하고 심리치료에 쓰이기도 한다.

   결혼식장에는 흰 꽃이 많이 쓰인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신부를 보면 천상에서 방금 내려온 천사처럼 아름답다. 흰색은 깨끗함의 상징이기도 하다. 장례식장에서는 노란 색과 흰색의 국화꽃을 많이 쓴다. 빨간색은 거의 쓰지 않는다. 빨간색은 붉은 피를 연상시켜 산 사람의 상징인 듯하다.

   학위 수여식에 가보면 전공별로 색깔이 다른 천을 두르는데 신학박사는 붉은색 천을 두른다. 붉은 색은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는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을 당하면 하얀 소복을 입었는데 요즘은 서양 풍속을 따라 검은 상복을 입는다. 같은 행사에 왜 이렇게 반대의 색을 사용하는지 모르겠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늘나라를 밝은 세상으로 생각한 것일까?

   같은 색인데도 동서양의 의미가 다른 경우도 있다. 서양에서는 푸른색이 우울하거나 슬픔의 의미를 갖는데 동양에서는 희망과 열정의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청운의 꿈이란 말도 있다. 사랑을 고백할 때는 붉은 장미를 준다. 불타는 자신의 마음을 받아달라는 뜻인가?

   색은 일종의 마술사 같다. 모든 색의 빛을 합하면 무색투명한 빛이 되는데 모든 색의 물감을 합치면 검은 색이 된다. 같은 존재인데 어디에 들어있는냐에 따라 무가 되기도 하고 유가 되기도 한다.

   어떤 동물들은 발정기가 되면 오색찬란한 색채로 상대를 유혹한다. 자신이 이렇게 멋진 수컷임을 목청껏 외치는 것 같다. 식물들도 요염한 색깔의 꽃을 피우고 온갖 교태를 부리며 자신이 잉태할 준비가 되었음을 알린다. 추운 겨울이 다가오면 나뭇잎들은 엽록소 아래 숨겨져 있던 본래의 색을 드러낸다. 기온이 낮아지면 엽록소가 파괴되면서 엽록체 속에 들어있던 붉은 색이나 노란색 색소가 나타난다. 잎으로서의 생명이 다 되었다고 휘황찬란하게 꽃단장 아니 잎 단장을 하면서 생을 마감한다.

   사람은 자신의 색을 바꿀 수 없으니 강렬한 색의 옷으로 상대방의 눈길을 끌려한다. 하긴 검은 머리가 흰 머리로 바뀌면서 죽을 날이 가까워 졌다고 알리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만 65세가 되면 경로 우대를 받을 수 있다. 웬만한 사찰의 입장료도 없고 고궁도 공짜다. 그 외에도 지하철 공짜, 영화비도 반으로 팍 깎아준다. 나는 만 65세에 맞추어 염색을 멈추고 흰 머리로 바꾸었다. 그래서 어디가나 주민등록증 보자고 하는 데가 없다. 흰 머리만 들이밀면 무사통과다. 흰 머리는 참으로 유용할 때가 많다. 오늘도 우주만물은 무한한 색으로 무수한 언어를 교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