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19. 11. 30. 나를 떠난 나

아~ 네모네! 2019. 12. 8. 14:09

나를 떠난 나

이현숙

 

   누군가 갑자기 망치로 내 뒤통수를 땅 때리는 것 같았어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어요. 아래층 살던 아줌마가 그 소리를 들었는지 급히 올라와 나를 부축해서 병원으로 옮겼어요. 병원에서 잠시 있으니 정신이 돌아왔어요. 내가 안정을 찾자 의사는 집으로 가라고 했어요. 아줌마와 집으로 걸어오다가 또 쓰러졌어요. 놀란 아줌마는 나를 경희의료원으로 데려갔어요.

   그 날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저녁밥을 해놓고 남편을 기다렸어요. 아이들도 집에 없고 혼자 있자니 심심해서 남편 운동화를 빨던 중이었어요.

   경희의료원 응급실에 누워있는데 딸들이 달려왔어요. 집에 온 다섯 째 딸이 시집 간 딸들에게 연락했나봐요. 딸들이 왔지만 나는 눈을 뜰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어요. 저녁시간이라 의사들이 모두 퇴근했는지 인턴 같은 애송이 의사만 가끔 와서 눈을 열어 들여다보고 망치로 무릎을 두드려보곤 했어요. 혈압이 엄청 높았지만 별 조치를 취하지 않자 둘째 딸이 의사에게 무슨 조치를 취해줘야지 눈만 들여다보고 무릎만 치고 있으면 어떻게 하냐고 하자 한방병원으로 옮겼어요. 침대에 실려 한방병원 쪽으로 가는데 남편이 왔어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코가 자꾸 한쪽으로 끌려올라갔어요. 이런 내 모양을 보고 남편은 딸들에게 말했어요.

이제 니 엄마는 잃어버리는 거다.”

   저도 코가 올라가면 죽는다는 소리를 들어서 알고 있었어요. 속수무책으로 한방병원에 실려 가니 한의사가 내 옷을 벗기기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가위를 들고 왔어요. 그러면서

가위로 옷을 자른 사람치고 살아난 사람이 없는데~” 하는 거예요.

딸들이 옷을 자르지 말라고 자기들이 벗겨보겠다고 했지만 그냥 옷을 잘라서 벗기고 환자복을 입혔어요.

   나는 중환자실로 옮겨지고 가족들은 보호자실에 가 있으라고 하더군요. 침대에 누워있으려니 검은 옷을 입은 저승사자가 내 침대머리에 서 있는 것이 보였어요. 보호자실에서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고 있던 둘째 딸도 이 모습이 보였는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더군요.

   의사는 아무래도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보호자를 불렀어요. 집으로 모시고 가서 운명하시게 하라는 거예요. 가족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구급차를 타고 인공호흡을 하며 집에 갔어요. 안방에 도착해서 방에 눕힌 후 호흡기를 떼어가자 내 호흡이 멈추고 심장도 더 이상 뛰지 않았어요. 나는 나에게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나는 나를 떠나 밖으로 나왔죠.

   다섯 째 딸은 나를 만지며 아직 따뜻하다고 울먹였어요. 한 밤중에 달려온 시숙이 나를 들어 칠성판에 누이고 흰 천으로 덮었어요. 나는 병풍 뒤로 옮겨졌죠. 가족들은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그래도 아침에 밥을 먹었어요. 엊저녁에 내가 해 놓은 밥이죠. 나는 어제 밥을 하면서 내가 이 밥을 못 먹을 줄은 상상도 못했죠. 그래도 남편과 딸들이 내가 마지막으로 해놓은 밥을 먹으니 기분이 좋았어요.

   다음 날 염을 한다고 나를 병풍 뒤에서 꺼내 칠성판 위에서 수의를 입혔어요. 시숙과 남편이 내 몸을 씻기고 둘째 사위와 함께 수의를 입혀줬어요. 둘째 사위를 처음 보았을 때 어찌나 마르고 얼굴이 까맸는지 딸에게 화를 냈죠. 어디서 비지죽도 못 먹은 깜생이를 데려왔냐고요. 그런데 결혼하여 1년 만에 10kg이 늘더니 얼굴이 허옇게 피어나며 인물이 나더라고요. 어른 공경도 잘하고 무엇보다 술 좋아하는 나를 위해 술대접을 어찌나 잘 하는지 내 맘에 쏙 들었어요. 이런 사위는 도시락 싸가지고 다녀도 못 얻는다고 동네방네 자랑을 하고 다녔죠. 이렇게 내 마지막 옷까지 입혀줄 줄은 상상도 못했네요.

   삼일 째 되는 날 성남에 있는 종중산으로 갔어요. 아들이 사우디에 가 있어서 얼굴도 못 보고 가나 했는데 하관하기 직전에 아들이 왔어요. 비행기를 몇 번씩 갈아타고 겨우 왔다고 하더군요. 아들의 얼굴까지 보니 미련 없이 땅 속에 들어갈 수가 있었어요.

   나는 내 몸을 땅 속에 두고 신위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어요. 집에는 벌써 흰 천으로 상청을 차려놓고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는 내 신위와 함께 상청 안으로 들어갔죠. 그 때부터 100일 동안 다섯째 딸이 아침저녁 상식을 올렸어요. 외출했다가도 내 식사 시간에 맞추려고 부지런히 돌아오는 내 딸이 기특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어요.

   이렇게 100일이 흐르고 내 탈상 날이 되었어요. 마지막으로 제사상을 받고 내 신위를 태우려고 불을 붙여 대문 밖으로 나갔어요. 나가는 나를 둘 째 딸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어요. 그렇게 나는 집을 나왔죠. 사실 남편이 내 제사상 앞에 쪼그리고 절하는 것도 미안하고 내가 술을 좋아한다고 열심히 술잔을 올리는 것도 보기 힘들었어요.

   다음 해에 내 생일이 돌아오자 환갑잔치를 해줘야한다고 내가 평소에 다니던 평내에 있는 수진사에 갔어요. 아침부터 비가 억수로 쏟아 부었어요. 나와 함께 이 절에 다니던 조카딸은 내 딸들에게  엄마가 환갑을 못한 게 너무 서운해서 이렇게 비가 오는 거라고 말하더군요. 하지만 나는 그토록 서운하지는 않았어요.

   몇 년 후 아들이 사우디에서 돌아와 결혼식을 올렸어요. 내가 앉아야할 자리에 둘째 딸이 앉았죠. 하지만 나도 남편 옆에 같이 앉았어요. 내 아들이 참한 아가씨 만나서 결혼하는 것이 너무 기뻤어요. 앞으로 아들, 딸 낳고 잘 살라고 축복해주었어요.

   그 후 주위에서는 내 남편에게 재혼을 하라고 이 사람 저 사람 자꾸 소개를 했어요. 선을 보기 전날 나는 남편을 찾아갔어요. 꿈에 나를 본 남편은 마음에 걸렸는지 선을 보는 자리에 가지 않았어요.

이렇게 삼 년 정도 지나자 딸들이 아버지를 만날 때마다 재혼하시라고 재촉했어요. 더 늙고 병들면 누가 오겠냐고 자꾸 권하더군요. 내가 봐도 남편이 홀로 늦은 밤까지 밥도 못 먹고 빈 집에 앉아있는 것이 불쌍해보였어요. 그래서 다음부터는 선을 본다고 해도 찾아가지 않았어요. 그래서 새 부인을 얻게 되었죠. 나는 덩치가 크고 우람했는데 새 부인은 키도 작고 여리여리하게 생겼더군요. 나는 서운하기 보다는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돌보지 못하고 온 남편을 내 대신 보살펴주는 새 부인이 좋았어요.

   새 부인과 29년을 살고 남편이 내 곁으로 올 날이 되었어요. 나는 나도 모르게 남편이 온다고 하니 밥을 해야 한다고 부엌으로 들어갔어요. 이 모습을 셋째 딸이 꿈에서 보고 다른 딸들에게 얘기하더군요. 내 남편과 40년이 넘게 살면서 다른 건 몰라도 밥 하나는 정성껏 해주었어요. 따뜻한 밥을 먹이려고 이불 속에 파묻어 두곤 했죠. 딸들이 이걸 모르고 이불을 꺼내 펴다가 밥그릇을 엎어 요에 쏟은 적도 있어요. 그 때는 보온밥솥이 없었거든요.

   이렇게 32년 만에 남편을 다시 만나 나란히 누워있으니 훨씬 따뜻한 기분이 들었어요. 우리를 함께 묻고 산을 내려가는 내 아이들도 편안해 보였어요.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의 장막 안으로 사라지면 영원히 이별하는 것처럼 슬퍼하지만 사실은 그렇지도 않아요. 이곳에도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친구도 있어 행복하게 지내고 있답니다. 큰 딸도 여기 함께 있구요. 내가 어려서 이별한 친정 엄마도 여기서 같이 지내니 참 좋아요. 앞으로 언젠가는 우리 아이들도 다 같이 여기서 행복하게 지낼 것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요.

그 때까지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려야겠어요.

 

 

                                                   - 친정 엄마 사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