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2018. 2. 23. 안나푸르나 기행문 3

아~ 네모네! 2018. 4. 11. 16:11

엄홍길 대장이냐고? ( 314)

- 란드룩에서 오스트레일리안 캠프까지 -

   아침에 일어나니 화창하게 개였다. 베란다에서 보이는 설산이 멋지다.

 

 

   란드룩을 떠나 포타나에서 점심 먹고 오스트레일리안 캠프까지 12.2km. 5시간 30분 걸렸다. 포터들도 어제 빨래를 해서 널더니 쏘머라이가 에드빌을 넣고 빨래를 하는 바람에 약을 다 없앴다. 부띠가 설명을 하는데 약을 옷에 묻혔다고 해서 뭔 소린가 했더니 빨아버려서 약이 없다는 뜻이다. 다시 남은 약을 주고 계속 먹으라고 했다.

   다랭이밭과 설산을 바라보며 평탄한 길을 걷자니 힘도 안 들고 그야말로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우리네 시골길을 걷는 기분이다. 짚으로 지붕을 엮은 것도 우리와 비슷하고 문빗장 대신 긴 막대로 막아놓은 것도 제주도 풍습과 비슷하다. 여기도 멀리 갈 때는 막대를 여러 개 걸쳐 놓는다고 한다.

 

 

   포타나로 가는 길에 학교 가는 아이들을 만났다. 다들 책을 들고 토론도 하고 뭔가 열심히 외우면서 가고 있다. 부띠 말로는 요즘 시험기간이라서 그렇단다. 시험 때 되면 초치기, 분치기, 벼락치기하는 것은 어느 나라 아이들이나 다 같은가보다.

   학교를 지나니 기부금 받는 할아버지가 나타난다. 장부에 제부 이름을 쓰고 500루피 기부했다. 학교 발전 기금으로 쓴다는데 좀 더 기부할 껄 그랬나보다.

   부띠 아들은 사립학교에 다녀서 시험 기간이 다르단다. 기숙사에 있어서 주말이나 방학 때만 집에 온다고 한다. 부인은 이태리에 있어서 2년에 한 번 정도 집에 온다고 한다. 우리가 애인 하나 있어야겠다고 하니 피식 웃는다. 5번 동생은 부띠에게 이미 애인 많은 것 같다고 농담을 한다. 부띠는 7년간 유엔군부대에서 운전병으로 근무했는데 남아공에 가서 2년 근무했다고 한다.

   란드룩에서 포타나로 올 때 계단 길이 싫다고 차도로 오니 뙤약볕에 돌짝밭이 이어져 뜨겁고 지루하다. 나중에 후회 한들 무슨 소용?

   포타나에 도착해 헤븐즈 게이트 게스트 하우스에서 점심을 먹었다. 문으로 들어서는데 마당에 네 잎 크로버가 보인다. 부띠에게 주고 아들 갖다 주라고 했다.

 

 

   나중에 보니 많이 있어서 써머라이, 빼마, 아시스도 하나씩 주고 제부도 조카들 주라고 두 개 주었다 오늘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오스트레일리안 캠프에 일찍 도착했다. 포타나에서 오캠은 2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다. 옛날 이곳에 집들이 없었을 때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이 여기에 캠프를 쳐서 이런 이름이 붙었단다.

 

 

   이 날도 도착 즉시 빨랫줄에 빨래를 널고 등산화도 햇볕에 내 놓았다. 피난민 수용소를 방불케 할 정도다.

 

 

   마당에는 그네가 있는데 대나무로 얼기설기 엮어서 만들었다. 네팔 사람들도 그네를 타나보다. 나와 5번 동생은 무릎이 아파 절절 매는데 4번 동생은 물 찬 제비같이 잘도 탄다.

 

 

   일찍 도착했으니 동네 한 바퀴 구경 가기로 했다. 동네가 작아서 돌아볼 만한 곳도 없었지만 제부가 인터넷에서 찾아본 바로는 제일 높은 곳에 우리나라 스님이 한 분 사신다고 하여 위로 올라가 봤다. 과연 작은 집 한 채가 있고 그 앞에는 명상을 위한 사적인 지역이니 들어오지 말라고 팻말을 세워 놨다. 그 집 앞에서 내려다보니 건너편에 넓은 공터가 보인다. 그리로 내려가니 몇 개의 텐트가 쳐있고 식당도 있다. 식당 앞에는 태극기가 걸려있기에 부띠에게 뭔가 하고 물으니 한국에 다녀온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이란다. 메뉴를 보니 닭백숙에 김치전, 김치찌개, 계란말이, 비빔밥 등 한국음식이 즐비하다. 텐트 앞에는 캠프화이어를 할 수 있는 장작까지 준비해 놓았다.

 

 

   제부는 나중에 혼자서 다시 스님 집에 갔단다. 스님 집에 들어가 차도 마시며 대화를 나눴는데 스님 법명은 정보스님이고 몇 년 전부터 이곳에 들어와 집을 짓고 명상을 한다고 한다. 그 스님이 제부를 보고 허영호 대장 같다고 했단다. 어떤 사람은 엄홍길 대장 아니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연일 산 속에서 헤매다 보니 얼굴이 새카맣게 타고 피부는 벗어지고 입술은 부르터서 우리가 보기에도 엄홍길 같다.

   저녁에는 포터들과 쫑파티를 했다. 내일 포카라에 도착하면 쏘머라이와 아시스는 집이 포카라에 있고, 빼마는 버스 타고 카트만두로 간다니 오늘이 마지막 밤이다. 20일 가까이 같이 지내다 보니 그새 정이 들었나 아쉬운 마음이 든다. 다들 총각이라 그런가 수줍음도 많고 웃음도 많다. 이번 여행에서는 가이드도 잘 만났지만 포터도 잘 만났다. 포터나 가이드 때문에 속 썩는 경우도 많다던데 우린 행운아다.

 

 

 

내세를 찾는 이유는? ( 315)

- 오스트레일리안 캠프에서 포카라까지 -

   새벽 5시쯤 4번 동생이 우리 방문을 두드려서 제부가 더 아픈가하고 깜짝 놀라 문을 여니 3번 동생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카톡방에 올라왔단다. 3번 동생 시어머니는 올해 102세인데 얼마 전까지도 멀쩡 하셨다. 1주일 전에 입원하셨는데 한 3일 고생하시고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3번 동생이 몇 년 째 하루 세끼 죽 끓여드리느라고 고생 많이 했는데 좋은 계절에 편안히 가셨다. 나도 이렇게 요양병원 안 가고 집에 있다가 편안히 갔으면 좋겠다.

   더 누워 있다가 밖으로 나가니 안개가 자욱하다. 여기서 보는 전망이 일품이라는데 전망을 못 보니 조금 아쉽다. 하지만 안개에 싸인 몽롱한 풍경도 새로운 맛이다.

 

  태극기 걸린 집으로 가서 김치전, 비빔밥, 된장찌개, 호박찌게를 주문한 후 스님 집을 다시 방문했다. 쌀국수와 김, 남아있는 루피를 약간 드리고 다시 식당으로 왔다.

   내려오는 길에 보니 웬 사람들이 죽은 짐승을 불에 그슬리고 있다. 이 동네에 결혼 잔치가 있어 염소를 잡는 중이란다. 네팔 사람들은 결혼하면 빚을 내서라도 보통 5일 씩 성대하게 잔치를 한단다.

 

 

   식당에서 스님 집 쪽을 보니 스님은 산 중턱에 앉아 명상 중이다. 하루에 오전 두 시간, 오후 두 시간 이렇게 네 시간씩 명상한단다. 노란 옷을 입고 앉아 명상에 잠긴 모습은 꼭 조각품 같기도 하고 자연의 일부 같기도 하다도대체 무슨 명상을 할까? 우리는 눈 감고 있으면 오만가지 잡생각만 떠오르는데 어떤 경지에 이르면 무념무상, 그야말로 자아를 떠난 상태에 이르는 것일까? 인간만이 유독 내세를 찾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동물들도 내세를 추구하지만 우리와 말이 통하지 않아서 우리가 모르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모든 종교는 내세를 추구하는데 현 세계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욕심 때문이 아닐까?

 

 

  스님이 식사 후 다시 오라고 하여 또 그 집으로 갔다. 스님 방에 들어가니 커다란 창문으로 오스트레일리안 캠프가 한 눈에 들어온다. 문 위에는 스님이 명상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걸려있다. 어떤 화가가 그려준 것이란다.

 

 

   스님이 주신 차를 마시고 한참 동안 대화하다가 오늘 포카라에 가신다고 하여 우리 짚차로 같이 가자고 하고 밖으로 나왔다. 짐을 챙겨 우리 롯지를 나와 스님이 나오실 때까지 앞에 있는 엔젤스 롯지로 갔다. 엔젤스 롯지는 부띠의 이종사촌 누나가 하는 집이다. 부띠는 이 집으로 예약하려했지만

인도로 가는 길 팀이 선약하여 우리는 구란스롯지으로 갔다.

   스님과 함께 오캠에서 칸데까지 3km를 걸어내려왔다. 하산길이라 편안하고 여유로웠다. 내려오는 길에 한 아주머니가 나무를 하고 있다. 땔감을 준비하나 했더니 그게 아니고 염소 먹이를 주고 있다. 열심히 사는 모습은 언제 봐도 아름답다. 이게 인간 본연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칸데에 내려와 짚차를 타고 포카라로 향했다. 그래도 이 길은 명색이 고속도로라서 달릴 만 했다. 스님은 평소에 대화가 그리운지 계속 말을 한다. 옆에 앉은 제부가 졸고 있으니 뒤에 앉은 우리에게 말을 계속한다. 며칠 전 카트만두 공항에서 비행기가 활주로를 이탈해서 오십 여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은근히 겁이 난다.

   한 시간 정도 달리니 포카라에 도착한다. 스님을 적당한 곳에 내려드리고 낮술이란 한식당으로 갔다. 2층으로 올라가니 베란다에 꽃도 심고, 야채도 심어 아담하게 꾸며 놓았다. 음식도 정갈하니 한국인 입맛에 딱 맞는다.

 

 

   식사 후 포터들과 헤어진 후 피쉬 테일 롯지로 갔다. 이 롯지는 페와 호수 건너편에 있어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호수 양쪽에 줄을 매놓고 손으로 잡아당기면서 이동하는 배다. 포카라는 네팔말로 호수라는 뜻이라고 한다.

 

 

   정원에서 페와 호수를 바라보며 앉아 있으면 저절로 힐링이 되는 듯하다.

 

 

   시간이 일러서 시내구경을 가기로 했다. 시내로 나오려면 꼭 배를 타야하니 그게 문제다. 그런데 탈 사람이 우리 네 명밖에 없으니까 보트가 다가온다.

 

 

   호수를 건너오니 아이들이 막대기를 들고 낚시를 하고 있다. 미끼도 제대로 없는 듯한데 고기가 걸리기나 하나 모르겠다. 시내에 가서 이 골목 저 골목 쑤시고 다니는데 오토바이 떼가 몰려오며 빵빵댄다. 웬일인가 하고 쳐다보니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깃발을 들고 퍼레이드를 벌인다. 대통령 선거가 두 달 남았다더니 선거 운동을 하나보다.

 

 

   아이스크림도 사먹고 동네 구경하다가 맥주 캔과 과자를 사가지고 돌아오느데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소나기가 퍼붓는다. 호숫가로 달려와 다시 배를 타고 들어왔다.

   방으로 돌아와 또 젖은 옷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았는데 직원이 와서 문을 두드린다. 웬일인가 했더니 룸서비스 받겠느냐고 한다. 집안 꼴이 이 모양인데 웬 룸서비스? 서비스 해줄 까봐 겁난다. 저녁 식사 전에 이런 것도 확인하고 다니나보다.

   저녁 식사 후 호숫가에서 맥주를 마시는데 천둥 번개가 치고 폭우가 쏟아진다. 급하게 방으로 피신하여 느긋한 저녁을 즐겼다. 5번은 연일 저녁마다 돋보기 끼고 그동안 사용한 돈과 남은 돈을 맞추느라 몇 시간씩 낑낑댄다. 안 맞으면 기타라고 해서 대충 맞추라고 해도 하도 깔끔한 성격이라 용납이 안 되나 보다.

 

패러글라이딩인지 패러골라이딩인지? ( 316)

- 포카라에서 두 밤을 -

   밤에는 그리도 퍼붓더니 아침에 일어나자 씻은 듯이 개였다. 페와 호수 너머 안나푸르나 연봉에 비치는 해를 찍느라 많은 사람이 호숫가로 나왔다. 우리도 의자 위에까지 기어 올라가 호수에 잠긴 설산을 찍어댔다.

 

 

   호수와 어우러진 안나푸르나는 과연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롭기 그지없다.

 

 

   어제 날씨 같아서는 패러글라이딩이고 뭐고 다 틀렸다 생각했는데 날이 반짝 들자 마음이 변했다. 부띠가 패러글라이딩하는 회사에 전화를 하니 우리 호텔 앞으로 차가 오겠다고 한다. 차가 올 때까지 페와 호수를 만끽하며 기다렸다.

 

 

   차를 타고 패러글라이딩하는 회사에 오니 계약서를 쓰란다. 이름과 국적, 나이까지 쓰란다. 69세라고 쓰려니 갑자기 이거 나이 많다고 못 타게 하는 거 아닌가 겁이 난다. 몇 분을 탈거냐고 하여 1시간짜리는 너무 비싸서 30분짜리에 체크했다. 우리 자매 3명 만 타고 제부는 안타겠다고 하여 셋이서 차를 타고 가다가 중국 여자 한 명을 또 태웠다. 차가 비탈길을 꼬불꼬불 마구 달린다. 5번 동생이 비스터리 비스터리 정~”하니까 금방 속도를 늦춘다. 하여튼 5번은 꼭 짚어서 말도 잘한다. 올라가는 길에 보이는 마차부차레는 눈부시게 빛난다. 이젠 눈을 감아도 마차부차레가 떠오를 듯하다. 사랑곶 꼭대기에서 차를 내려 언덕을 올라갔다.

   간단히 주의 사항을 듣고 안전모와 벨트를 매고 시키는 대로 앞으로 걸어가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공중에 떠오른다. 그런데 떠오르자마자 머리가 깨질 듯 아프다. 이거 패러글라이딩인지 패러골라이딩인지 정말 골 때린다. 30분 탄다고 하길 천만다행이다. 한 시간은커녕 빨리 내리고 싶은 마음뿐이다. 

  나를 태운 조교는 내가 긴장해서 그런지 이런 저런 설명도 하고 한국 노래를 부르란다. 내가 아리랑을 부르고 네팔 노래도 해보라고 하니 자기도 부른다. 레쌈삘리리도 불러보라고 하니 또 부른다. 레쌈삘리리는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갔을 때 포터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다.

   조금 안정이 되자 발아래 페와 호수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조교는 재미있게 해주려고 업 다운을 계속하는데 나는 그저 빨리 끝나기만 기다린다. 난생 처음 해보는 거라 다신 안 하겠지만 나중에 또 하게 된다면 미리 두통약을 먹고 타야겠다.

 

   언제 땅에 내리는 줄도 모르는 사이 발이 땅에 닿는다. 조교가 먼저 땅에 발을 댄 후 내가 닿으니 아무 충격 없이 부드럽게 내려왔다. 내려오니 속이 메슥메슥한 게 꼭 토할 것 같다. 잠시 후 4번 동생도 내리더니 자기도 토할 것 같다고 한다. 우리 둘은 이렇게 빌빌 대는데 마지막에 내리는 5번 동생은 공중에서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신나게 타고 내린다. 나보다 10년이나 젊어서 그런지 원래 패러 체질인지 모르겠다.

   다시 차를 타고 회사로 돌아오니 웬 청년이 우릴 보고 패러글라이딩 했느냐고 묻는다. 자기도 하려고 하는데 괜찮으냐고 하기에 재미있다고 하고 머리 아프다고 일러줬다. 이 사람은 젊으니까 괜찮을 것 같다. 친구와 둘이 왔는데 친구는 집에서 쉬겠다고 하여 혼자 왔다는 것이다. 잠시 기다려 동영상 CD를 받은 후 다시 거리로 나섰다.

   속이 가라앉을 때까지 거리 구경을 하다가 4천 원짜리 바지도 사고 민속촌에서 비빔밥을 먹었다. 식사 후 페와 호수를 건너 평화기원탑에 가보기로 했다.

 

 

   호수를 건너자 거기도 레스토랑이 있고 계단 길을 오르자 또 레스토랑이 나온다. 그 앞에서 바라보는 포카라 시내가 아련하다.

 

 

   스투파라는 이 사원은 일본사람들이 세운 것이라 한다.

 

 

   평화기원탑에서 내려와 산길을 걸어 호수 제일 아래쪽 마을을 지나 시내로 들어왔다. 여기서 버스를 타고 우리 롯지 앞에서 내려 이 날도 맥주와 안주를 사가지고 돌아왔다. 버스는 작은데 사람들이 많아 바글바글하다.

 

 

   오늘도 11.4km나 걸었다. 20일 동안 매일 걸었더니 발이 말씀이 아니다. 그저 지금까지 잘 견뎌준 내 발이 고맙다

 

국물 나온다고? ( 317)

- 포카라에서 카트만두까지 -

   일찌감치 아침 식사를 하고 포카라 공항으로 갔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2층으로 올라가니 안나푸르나가 다시 한 번 멋진 모습을 보여준다. 잘 가라고 환송하는 듯하다. 예정 시간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 마냥 기다렸다. 왜 늦는지 안내 방송도 없다. 부띠의 표정이 태연한 걸 보면 항상 이런가보다. 안나푸르나를 보며 마지막으로 복습을 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경비행기 좌석의 왼쪽만 일렬로 잡아줘 히말라야를 다시 한 번 만끽하며 카트만두로 향했다. 귀마개 솜과 사탕 한 개씩 주는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 같다.

 

   설산은 언제 봐도 나를 설레게 한다. 산을 보면 그 정상에 서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건 도대체 무슨 병 일까? 이 열병에 걸려 무수한 사람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정상에 오르는 지도 모른다.

 

   카트만두에 오니 만두를 카트해 놓은 듯 사람과 차와 오토바이가 범벅이 되어 정신이 하나 없다. 타멜시장에서 립밤과 수분크림을 샀다. 동생들은 야크 치즈가 좋다고 치즈와 히말라야 커피도 샀다.

원숭이 사원에 들어오니 웬 개가 그리도 많은지 완전 개판이다. 사람도 어찌나 많은지 사람과 원숭이, 개가 뒤엉켜 비빔밥 같다. 많은 인파 속에서도 탑에다 머리를 대고 간절히 기도하는 여인들이 있다. 무슨 소원을 비는 것일까?

 

   다른 쪽으로 오니 원숭이가 많다. 여기 원숭이들은 사람들이 주는 먹이로 살아가는 듯하다. 부띠가 수박을 사주자 냉큼 다가와 낚아채듯 가져가서 먹는데 안의 빨간 부분만 먹고 버린다. 사람이나 원숭이나 단 것 좋아하는 것은 똑같다.

 

   부띠는 트레킹 가이드라서 여기서 설명하다가 경찰에게 걸리면 잡혀간다고 우리끼리 구경하라고 한다. 나중에 부띠와 만나서 사원 밖으로 나오는데 구걸하는 여인이 따라온다. 애기가 울어대자 5번이 시끄러! 하고 소리 지르니 뚝 그친다.

   잠시 쉬려고 커피숍으로 차를 타고 올 때 제부가 졸다가 콧물이 나왔나보다. 내릴 때 부띠가 사장님 국물 나와요.” 해서 배꼽 빠지게 웃었다. 아직 한국말이 서툴러서 왼쪽을 와인쪽이라고 하고 아무튼 통역이 필요할 지경이다.

   내가 어렸을 때 자꾸 울어서 엄마가 뚝 그치라고 야단을 치면

안 울려고 해도 눈에서 자꾸 국물이 나와요.”해서 엄마가 폭소를 터트렸다고 한다. 부띠도 아직 어린아이 수준이다.

   히말라얀 자바에서 커피 마시며 좀 쉬었다. 인테리어가 멋진 카페다.

 

   카페에서 나와 타멜시장을 둘러보고 엄홍길이 자주 가는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오늘 낮에도 엄홍길이 왔었다고 한다. 저녁 식사 후 공항으로 가니 부띠가 환송의 스카프를 걸어준다. 그동안 동고동락했던 시간이 떠올라 가슴이 찡하다. 앞으로 돈 많이 벌어 부인도 불러들이고 아들도 잘 키웠으면 좋겠다.

 

   게이트까지 가는데 비행기 티켓에 무슨 도장을 연방 찍는다.

뭘 이렇게 연방 찍냐?” 하니 여직원도 연방 찍냐?”하며 흉내를 낸다.

5번 게이트 앞에서 또 체크를 한다. 다른 비행기 탈까봐 그러나 알 수가 없다. 안내 방송은 연방 나오는데 땡큐와 닷네밧 밖에 못 알아듣겠다. 닷네밧은 네팔 말로 땡큐다. 이번에 네팔 말 몇 개 배웠다. 샤우니는 아줌마, 차이나는 없다는 말이다.

   제부는 부띠에게 전화를 걸어 뭐하냐고 물으니 집에 아들과 함께 있단다. 오늘이 토요일이라 아들이 왔나보다. 우린 아들이 왔으면 진작 말을 하지 그러면 일찍 보내줬을 텐데 하며 미안해했다.

   마지막으로 비행기 티켓을 보여주며 비행기를 타려는데 직원이 갑자기 혼자 왔느냐고 묻는다. 얼떨결에 그렇다고 하니 비행기가 만석이라 비즈니스석으로 서비스해주겠단다. 내 비행기 표를 가져가고 다른 것을 주는데 9열이다. 내 생전에 비즈니스석은 타 본적이 없어서 자리에 앉아서도 이게 뭔 일인지 실감이 안 난다. 네 잎 크로바를 많이 선물했더니 내게도 행운이 찾아온 것인지 아니면 탑승객 중 내가 나이가 제일 많아서 내게 준 것인지 모르지만 동생들과 떨어져 공연히 걱정이 된다.

   이코노미석 동생들에게 가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돌아와 자리에 앉았는데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 아프다. 직원에게 물 좀 달라고 하여 얼른 두통약을 먹었다. 잠시 누워있으니 정신이 몽롱해진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한다는데 무수리가 왕비 좌석에 앉으니 적응이 안 되나보다.

   속이 안 좋아서 기내식도 겨우 파인애플 한 조각 먹고 그냥 내보냈다. 그래도 의자가 완전히 젖혀지니 잠자기는 좋다. 여섯 시간 동안 잘 자고 나니 벌써 여명이 밝아오고 있다.

 

우리나라 좋은 나라 ( 318)

- 카트만두에서 집으로 -

   인천 제2터미널에 내리니 비행기가 한참을 걸려 겨우 청사 앞에 닿는다. 입국 수속 밟는 곳까지도 어찌나 먼지 마냥 걸으며 이거 잘못 나오는 거 아닌가 걱정을 한다. 2터미널이 멋지긴 한데 버스로도 제1터미널에서 15분은 더 가야하니 불편함이 많다.

   그래도 해외에 나갔다 올 때마다 우리나라 좋은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물고기도 놀던 물이 좋다고 하더니 역시 내 나라가 좋다.

 

   이번 여행은 개고생은 했지만 그만큼 환상적이고 꿈같은 여행이었다. 네팔이란 이름은 산스크리트어로 신의 보호를 받는 땅이라더니 정말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환경은 열악하지만 열악한 만큼 개발을 못하니 자연이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아름다운 모습을 영원히 유지할 것 같다. 아마도 히말라야가 있는 한 네팔은 영원히 보호를 받는 땅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