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18. 1. 26. 자네도 한 잔, 나도 한 잔

아~ 네모네! 2018. 1. 29. 13:47

자네도 한 잔, 나도 한 잔

아 네모네 이현숙


   결혼식을 마치고 시댁이 있는 대전으로 내려갔다. 유성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시댁에 가서 동네잔치를 하였다. 서울에서 결혼식을 하여 참석하지 못한 동네 어른들을 위한 시어머니의 배려다.

   안방에 앉아 있으려니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들여다보는 아주머니들의 시선이 따갑다. 밖에 나가 한 마디씩 품평회 하는 소리가 내 귀에 까지 들린다.

   춘향이 칼 차듯 꼼짝 않고 앉았다가 동네 어른들이 돌아가시자 속리산으로 갔다. 말이 신혼여행이지 하룻밤 자고 나니 별로 갈 데도 없어 문장대에 올랐다. 투피스 정장 차림에 뾰족구두까지 신고 문장대 꼭대기까지 올라갔으니 지금 생각해도 가관이다.

   더 이상 갈 곳도 없고 돈도 없어 다음 날 바로 올라왔다. 친정집에 들러 엄마와 함께 단칸 방 우리 집으로 왔다. 엄마와 근처 재래시장에 들러 허름한 찬장 하나와 그릇 몇 개를 샀다. 술을 좋아하는 엄마는 소주잔과 소주, 간단한 안주도 샀다.

   집에 와 대충 찬장 정리를 하고나서 엄마와 남편이 같이 앉아 소주를 마신다. 자네도 한 잔, 나도 한 잔 하며 한 병을 다 마신 것 같다. 엄마가 친정집으로 가자마자 남편은 부엌에 들어가 한바탕 토했다. 토하는 꼴을 보니 결혼에 대한 환상이 확 깨면서 내가 이거 큰 실수한 거 아닌가 싶다.

   엄마가 올 때마다 술타령은 이어졌고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외할머니가 올 때마다 이 모습을 본 딸과 아들이 소꿉장난 할 때마다 작은 잔을 가지고 자네도 한 잔, 나도 한 잔.”하며 노는 게 아닌가? 맹모 삼천지교라고 하더니 정말 아이들은 보는 대로 한다.

   형부는 술을 못한다. 언니네가 이사할 때 갔다 온 엄마는

원 세상에~ 이삿집에 갔으면 술 한 잔 내놔야지. 사이더가 뭐냐 사이더가.” 하며 불평을 토했다. 엄청 서운했나보다.

   내 남편은 친정엄마만 오면 술대접을 잘하니 둘째 사위가 최고라고, 이런 사위는 도시락 싸가지고 다녀도 못 얻는다고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처음 봤을 때는 비지죽도 못 얻어먹은 깜생이 같다고 못 마땅해 하더니 그 말도 쏙 들어갔다. 엄마는 몸도 퉁퉁하고 얼굴도 허여멀건 남자를 좋아한다. 아마 아버지가 얼굴도 작고 몸도 말라서 그랬나보다.

   내 남편은 집이 가난해 하숙도 제대로 못하고 교수실에서 라면으로 연명하며 지냈으니 비지죽도 못 얻어먹은 게 맞기는 맞다. 키는 173cm에 몸무게는 56kg 밖에 안 나갔으니 볼품도 없고 얼굴도 까맸다. 결혼 후 하루 세끼 밥을 제대로 먹으니 매달 1kg씩 늘어 1년이 지나자 10kg이 늘었다. 얼굴도 허옇게 변하고 몸도 보기 좋게 변했다.

   그 때 엄마가 샀던 초록색 소주잔이 아직도 집에 있다. 이제는 아이들도 다 결혼해서 나갔으니 남편과 둘이 앉아 가끔 이 잔으로 술을 먹는다. 딸이 올 해 마흔 다섯 살이 되었으니 45년이 넘은 잔이다. 경질 유리로 된 것도 아니고 값싼 껄렁한 유리로 된 이 잔이 여태 깨지지 않고 견디는 걸보면 나와 끈질긴 인연이 있나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몇 십 년을 서로 입술을 맞대며 살았으니 이 술잔과 나의 인연은 말로 표현 못할 기막힌 인연인가 싶다. 아마도 전생에 연인 사이였을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