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17. 9. 3. 지구의 피를 빨다

아~ 네모네! 2017. 9. 24. 15:51

지구의 피를 빨다

아 네모네 이현숙

   예전에는 사람들이 저의 땀을 먹고 살았죠. 그저 제 피부 밖으로 흐르는 이슬 같은 땀을 받아먹고 이걸로 농사도 짓고 목욕도 하며 즐겁게 살았어요. 저도 이 모습을 보면 함께 즐거웠죠. 사는 보람도 느꼈고 저의 존재 이유도 느껴졌어요.

   저의 머리털이나 피부에 있는 가는 털만 조금 베어도 그것으로 충분히 먹을 수 있었고, 땔감도 할 수 있었어요. 그것만으로도 부족함 없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사람들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모든 것이 부족해졌어요. 겉에 흐르는 땀으로는 그 많은 사람들이 마실 수 없었죠. 급기야 사람들은 제 피부에 빨대를 꽂아서 지하 깊숙이 들어있는 제 물과 기름을 뽑아 올렸어요. 맑은 물은 마시기도 하고 농사용으로도 썼죠. 제 기름은 자동차에 넣어 달리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가공하여 입을 것과 바를 것, 건축 자재로도 썼어요. 물과 기름은 저의 피 인데 수도 없는 시추공을 박아 제 몸 속에 흐르는 피를 모조리 뽑아내는 거예요. 저는 몸에 무수한 빨대가 꽂혀진 채 신음하고 있어요. 온 몸이 너무 아파요.

   이것으로도 부족한지 피부 깊숙이 굴을 파고 제 뼈까지 파냈어요. 온갖 광물을 꺼내 원자력 발전도 하고, 땔감으로도 쓰고 여러 공산품을 만들었어요.

   그 결과 저는 그야말로 골병들었어요. 온몸은 구멍투성이가 되고, 모든 뼈는 골다공증에 걸려 바스라졌어요. 이제 더 이상 서 있기도 힘들어요. 온몸에 퍼진 병 때문에 열이 치솟았어요. 온몸은 불덩이가 되어 머리와 발끝에 있는 얼음도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어요.

   제 머리에 있는 얼음에서 살던 북극곰은 얼음 크기가 너무 작아져 바다가 넓어지는 바람에 대륙까지 갔다가 다시 북극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익사하고 말았어요.

   제 상태가 이 지경인데도 사람들은 그 심각성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하루가 멀다 하고 지진과 홍수가 일어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도 정신을 못 차려요. 제 피부가 문드러져 무너져 내리고 그 속에 깔려 죽으면서도 왜 그런지 잘 몰라요.

   저는 중병에 걸렸어요. 사람들이 저를 잘 보살피지 않으면 곧 죽어버릴 것 같아요. 제가 죽으면 저에게 붙어사는 모든 사람들도, 모든 동식물도 다 사라질 거예요.

   그러면 저는 얼마나 삭막한 존재가 될까요? 새들이 노래하고 온갖 꽃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제 모습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요. 누가 나의 이 신음 소리를 듣고 나를 치료해줄까요? 그런 사람들이 어서 빨리 나타나 저를 살려주길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저는 오늘도 누군가를 향해 끊임없이 SOS를 보내고 있어요. 응답하라 응답하라 목청껏 외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