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16. 2. 18. 용의 씨

아~ 네모네! 2016. 7. 9. 14:55

용의 씨

아 네모네 이현숙

   오래 전 TV에서 드래곤 씨드(Dragon Seed)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용에 무슨 씨가 있나 하는 생각에 끝까지 보았다. 배경은 중국에 혁명이 한창이던 시절이다. 용씨 집안의 젊은 부부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조부모에게 맡기고 혁명 전선으로 뛰어든다. 젊은 부부는 전쟁터로 가고, 늙은 조부모는 어린 손자를 품에 안고 피난길에 오르는 마지막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이 손자는 용씨 집안의 대를 이을 하나 밖에 없는 소중한 씨다. 마치 여린 불씨를 감싸듯 손자를 감싸고 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친정아버지 첫 번째 제삿날 큰집의 사촌 동생이 왔다. 함께 제사를 지낸 후 전철역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하여 그 차를 탔다. 사촌 동생의 어깨가 쳐지고 힘이 없어 보인다. 다음 주에 이사를 가야한단다.

   친정의 큰 아버지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군대에서 잃었다. 시골에서 서울까지 유학시켜 대학까지 졸업시켰는데 군대에서 이동 중 트럭이 구르는 바람에 어이없게 죽고 말았다. 군에서는 국립묘지에 묻어준다고 했지만 더 마음이 아플 것 같다고 화장하고 말았다.

   종가집의 장손이 죽었으니 친척들은 둘 째 큰집에서 양자를 들이라고 했다. 둘 째 큰 집은 아들이 다섯 명이니까 그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큰 아버지는 자기의 씨를 남기고 싶은 마음에 재혼을 하였다. 두 번째 부인도 아이를 낳지 않고 나가 버리고 세 번째 부인에게서 아들을 하나 얻었다.

   귀하게 얻은 아들이라 애지중지 키우다 세 번째 부인도 아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암으로 세상을 떴다. 네 번째 부인이 들어와 이 아들을 키우고 장가도 보냈다. 그 후 네 번째 부인마저 먼저 세상을 뜨고 아들 며느리와 함께 살며 모든 재산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첫 번째 부인이 낳은 딸인 사촌언니는 서운한 마음이 있었겠지만 별 말 없이 다 받아들였다. 사촌 언니는 큰아버지 보다 먼저 세상을 떴다. 사촌 형부는 부인을 잊지 못하고 연연하며 지금껏 혼자 살고 있다. 큰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하관 할 때도 부인의 사진으로 만든 목걸이를 꺼내 아버지 가시는 걸 보라고 하였다.

   사촌 언니가 간지 팔 년이 넘었다. 그런데 그 자식들이 소송을 걸었다. 자기들의 엄마가 유산을 받지 못해서 억울하다고 이복 외삼촌을 상대로 소송을 건 것이다. 일정한 소득도 없이 힘들게 사는 아버지가 안쓰러웠는지도 모른다.

   큰 집의 장손인 나의 사촌 동생은 소송에 져서 5억 원을 물어내게 생겼다며 한 숨을 몰아쉰다. 물론 더 많이 받았지만 몇 차례에 걸쳐 사업에 실패하는 바람에 남은 것이 없고 결국은 사는 집을 팔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큰아버지가 하늘나라에서 이 꼴을 보면 얼마나 비참할까? 이런 일이 없게 하려고 살아생전에 모든 재산을 아들에게 물려주었건만 외손자들이 이렇게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하셨을 거다. 자신의 씨를 지키려고 그렇게 무진 노력을 했건만 사후에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못 하셨을 거다.

   그토록 끔찍이 사랑하던 아들과 친손자 두 명이 살던 집에서 쫓겨나 작고 허름한 집으로 가는 꼴을 보면 눈에서 피눈물이 쏟아질 꺼다. 지금도 땅속에서 첫째 부인과 셋째 부인 사이에 누워 고민하고 계실지 모른다. 아마 애간장이 다 녹다 못해 애가 타서 내장이 다 없어졌을 것이다.

   요즘은 딸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짙어졌다. 하지만 큰아버지 세대만 해도 자신의 대를 잇는 것은 아들뿐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딸은 키워서 남을 준다고 생각했다.

   내 남편도 이런 생각인 듯하다. 아들이 결혼한 후 십 년이 되도록 아이가 없자 은근히 걱정하는 눈치다. 내가 외손자도 우리의 DNA를 가졌으니 우리의 유전자는 외손자를 통해서 이어질 것이다. 그까짓 호적에 손자 없는 게 무슨 대수냐? 한낱 종이쪽지일 뿐이다.’ 라고 주장해도 별로 수긍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러다 친손자가 태어나니 뛸 듯이 기뻐했다.

   참 그놈의 씨가 무엇인지 이 세상의 모든 동식물은 그 씨를 남기려고 혼신의 힘을 다한다. 목숨 걸고 사투를 벌인다. 하지만 그 씨가 얼마나 이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아니 인류 자체가 멸망할 지도 모른다.

   연어가 알을 낳은 과정을 보면 눈물겹다. 수 천 킬로미터를 달려와 무수한 난관을 뚫고 자기가 태어난 골짜기 위로 거슬러 올라간다. 폭포수 위로 뛰어 오르려고 몇 번 씩 죽을힘을 다하는 걸 보면 눈물겹다.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알을 낳은 후 탈진하여 죽는다. 죽어서 너덜너덜 걸레짝처럼 헤진 채 물에 떠내려가는 모습은 경건하기까지 하다.

   미국에서는 임신을 하지 못하는 딸을 위해 대리모 역할을 해준 어머니도 있었다. 딸과 사위의 인공 수정란을 자신의 몸에 착상시켜 훌륭히 키워 낳아준 어머니가 위대해 보인다. 할머니가 직접 외손자를 낳았으니 이게 참 무슨 요지경 속인지 모르겠다. 인간의 하는 짓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여 어디까지 갈지 알 수 없다. 이건 한 개체의 의지가 아니라 거대한 슈퍼 생명체의 의지라는 생각도 든다. 그것이 신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세상에 인력으로 되는 일이 몇 가지나 있을까? 아마 우리 인류도 한 낱 화석으로 밖에 남지 못할 날이 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 우주 만물과 지구를 돌리는데 인간의 하찮은 힘으로 이걸 어찌 되돌릴 수 있단 말인가? 오늘도 쉴 새 없이 돌고 있는 태양과 달과 별을 보며 한 없이 작아지는 내 모습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