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15. 7. 10. 만능신문

아~ 네모네! 2015. 11. 20. 15:58

만능 신문

아 네모네 이현숙

 

  신문 안 본지가 5년은 되나보다. 신문을 보다가 끊으려니 보통 일이 아니다. 신문 사절이라고 문에 써 붙여소용없고 직접 배달원을 만나서 얘기해도 소용없고, 배급소에 전화를 해도 불가항력이다. 나중에는 신경질이 치솟아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다. 다시는 신문 안 본다고 결심을 했다. 보급소장에게 성질을 부리며 몇 번의 전화 끝에 결국 끊기는 끊었다.

  남편은 퇴직 전이라 학교에서 몇 가지 신문을 본다고 하고 나는 거의 읽지 않는다. 신문이 문 앞에 쌓이면 며칠씩 집을 비울 때 외부에 노출되고, 앞집 아줌마에게 치워달라고 하기도 미안하다. 현관 앞에 내던지고 간 신문은 흙이 묻어서 집에 들이기가 싫다. 치우는 것도 일이다.

  남편이 퇴직하더니 집에서 신문이 보고 싶단다. 나는 결사반대하며 신문 보려면 재활용 분리수거를 맡으라고 했다. 뉴스는 TV나 인터넷으로 보면 되는데 뭐 하러 신문을 보느냐고 완강히 버텼더니 슬그머니 꼬리를 내린다. 분리수거를 맡으라고 했더니 귀찮았나보다.

  남편의 기를 꺾은 것 같아 은근히 맘이 쓰였다. 다음에 한 번만 더 얘기하면 못 이기는 척하며 보라고 해야겠다고 맘을 고쳐먹었다. 그런데 5년이 지나도록 다시는 말을 꺼내지 않는다. 마누라의 공갈 협박에 백기를 든 것인지 아니면 이제 눈이 어두워져 신문 보기도 힘들어졌는지 모르겠다.

  사실 신문은 기사를 보는 것 외에도 용도가 다양하다. 이불 사이에 끼어 놓으면 좀이나 곰팡이가 생기지 않는다고 하여 나도 이불 갈피에 넣어둔다. 나물을 다듬을 때 깔아도 좋고, 화분 분갈이 할 때도 흙을 쏟아놓아도 좋다. 등산하다가 등산화 속에 물이 들어갔을 때 신문지를 넣어두면 물기를 빨아들여서 좋고, 얼음물을 신문지에 싸서 배낭 옆에 꽂으면 보냉이 잘 되고 김이 서리지 않아 좋다. 배낭에 넣고 다니다가 깔판 대용으로 써도 그만이고 전을 부치거나 튀김을 할 때 근처에 신문을 깔아두면 바닥을 더럽히지 않아서 좋다. 생각할수록 그 용도가 무궁무진하다.

  면목중학교 근무할 때 과학실에서 같이 근무하던 생물 선생님이 퇴촌에 있는 갈멜 수녀원으로 들어갔다. 과학부 선생님들끼리 방문을 했는데 수녀원 안이 어찌나 조용한지 파리 나는 소리가 사이렌 소리처럼 엄청 크게 들렸다. 그 큰 수녀원 전체에서 달가닥 소리하나 나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리니 쇠창살 안쪽에 그 선생님이 나타났다. 무언가 근접할 수 없는 경건함이 느껴졌다. 자기가 수녀원에 들어오는 날 엄마가 엄청 울었다고 했다. 우리도 한 방에서 같이 근무하다가 갑자기 창살 너머로 들어가 버린 그녀를 보려니 너무도 마음이 아렸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신문지 얘기가 나왔다. 그녀는 신문지가 이렇게 귀한지 몰랐다고 하며 여기서는 신문지 한 장을 수십 번씩 쓴단다. 채소 다듬을 때 주로 쓰는데 다 닳아서 나달나달 떨어질 때까지 쓰고 도저히 쓸 수 없을 때 버린단다.

  신문은 누가 만들었는지 정신적 물질적으로 이렇게 만능인 물건은 없을 것이다. 온 세계의 구석구석에서 일어난 일을 안방까지 전달해주고 온 인류의 마음을 움직인다. 별 볼일 없는 종이 한 장이지만 그 위력은 돈보다 강하고 칼보다 날카롭다. 실로 신문은 새로운 소문을 전달할 뿐 아니라 잘 모아두면 오랜 옛날에 있던 사실도 알 수 있는 귀한 존재다. 이 귀한 물건이 요즘은 헌 짚신짝처럼 길거리에 마구 버려진다. 어느 누구도 가져가려하지 않는다.

  지하철에서도 신문 보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 신문 주우려고 다니는 사람들이 자취를 감췄다. 다들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으니 복잡한 지하철에서 커다란 책을 꺼내들고 읽기도 미안하다.

모든 생물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듯 물건도 세상에 나타났다가 생명을 다하면 우리 시야에서 사라진다. 신문도 곧 생명을 다하고 박물관으로 들어가지는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