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15. 6. 19. 등대 만들기

아~ 네모네! 2015. 7. 6. 16:47

등대 만들기

아 네모네 이현숙

 

  삼십대 때 우연히 왼쪽 가슴을 만지니 멍울이 잡힌다. 순간 유방암이 아닌가 덜컥 겁이 난다. 병원에 가서 검사하니 떼어내 조직검사를 하자고 한다. 수술 후 조직검사를 했는데 1주일 후 결과가 나온다고 한다.

  집에 와 1주일을 기다리는데 그 시간이 왜 그리도 긴지 몇 년은 걸리는 것 같다.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내가 여기서 유방암으로 생을 마치면 초등학교 저학년인 아들이 어떻게 상주 노릇을 하나, 당장 밥은 누가 해먹이나, 결혼 안 한 여동생이라도 우리 집에 와 달라고 해야 하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제발 우리 아이들 결혼할 때까지만 살게 해달라는 기도가 절로 나온다. 피를 말리는 1주일을 보내고 병원에 가니 양성 종양이라 괜찮다고 한다. 십 년 감수한 기분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들이 결혼할 즈음 오른쪽 옆구리가 아파 병원에 갔다. 복부초음파를 찍다가 인턴인지 레지던트인지 여러 명의 의사를 불러들여 보여주며 뭐라고들 떠든다. 이거 아무래도 죽을 병이 걸렸나보다 하는 생각에 바짝 얼어붙었다. 다 찍고 나더니 간에 지름 8센티미터의 커다란 혹이 있다고 했다. 간에 혹이 생기는 경우는 종종 있는데 이렇게 큰 혹은 처음 본다고 한다. 이렇게 자라려면 오랜 세월이 걸렸을 텐데 여태 복부 초음파를 한 번도 안 찍었냐고 한다. 평생 한 번도 안 찍었다고 하니 기가 차다는 표정이다.

  이때는 자리에서 돌아누우려 해도 옆구리가 아파 쩔쩔 매고 버스를 타고 가다 커브만 틀어도 아구구 소리가 절로 났다. 죽어도 아들 결혼은 시켜야겠기에 결혼식을 마치고 다른 병원에 가니 또 초음파를 찍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판단이 힘드니 CT 촬영을 해보자고 한다. CT 촬영한 사진을 보여주며 양성종양은 표면이 매끄러운데 내 혹은 표면이 거칠다고 하며 2주 후에 다시 찍어보자고 한다. 내가 보아도 둥근 혹 가장자리에 비쭉비쭉 나온 모양이 보인다.

  그 후 다시 찍어보니 별 변화가 없다고 한 달 후에 오라고 하고, 그 다음은 두 달 후에 오라고 한다. 역시 큰 변화가 없자 6개월 후에 오라고 하고 그 후에는 2년에 한 번씩 오라고 한다. 암은 아닌 것 같아 그 후로는 가지 않았다. 그 이후로 가끔씩 오른쪽 옆구리가 결리고 아플 때마다 겁이 더럭 난다. 혹시 암으로 변했나하고 공포가 엄습한다.

  알라스카에 있는 메킨리산에 갔을 때는 무거운 짐을 지고 하루 종일 걸었더니 혹이 커졌는지 숨을 쉴 때마다 옆구리가 결려서 숨 쉬기가 힘들었다. 순간 여기서 죽는 게 아닌가 또 불안에 사로잡혔다.

순간 아버지 얼굴이 떠오른다. 아버지보다 먼저 죽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언니는 미국 이민 가서 53세에 암으로 죽었다. 아버지도 나도 언니가 죽은 후 장례식에도 가지 못했다. 엄마는 그 전에 돌아가셔서 이런 꼴을 안 보았으니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언니도 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는데 나까지 또 먼저 죽어서 아버지 가슴에 못을 박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텐트 속에서 하루 이틀 자고 나니 차차 가라앉았다.

 

  올 봄에 아버지마저 94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이제 죽어도 괜찮을 줄 알았더니 역시 아니다. 집안일을 할 줄 몰라 어리버리하는 남편을 보니 아무래도 남편 죽을 때 까지는 살아야할 것 같다.

  도대체 내 마음의 등대는 어디까지 일까? 아이들이라는 등대를 바라보며 열심히 걸어왔고, 아버지라는 등불을 바라보며 여기까지 달려왔다. 지금은 남편이라는 등대 불을 밝히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남편마저 세상을 떠나면 또 어떤 등대를 만들어 불을 밝히며 살아갈까?

  손자가 결혼할 때까지? 아니 손자가 아이 낳는 것을 보고? 하면서 끝없이 등대를 만들어갈지 모른다. 이 끝없는 생에 대한 애착과 욕심은 도대체 어디서 끝나는 것일까? 인간의 육체는 유한하지만 우리의 영혼과 욕망은 무한하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의 속성을 닮았다고 하는 건가? 죽어보지 않았으니 그건 모르겠고 아무튼 내가 만든 등대는 지금도 환히 불을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