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14. 6. 13. 보이지 않는 거벽

아~ 네모네! 2014. 11. 14. 15:52

보이지 않는 거벽

아 네모네 이현숙

  알라스카에 북미 최고봉 매킨리산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고상돈이 사망한 곳이다. 몇 년 전 기회가 있어 여기 가는 원정대 팀에 합류했다.

  맥킨리는 북위 63도에 있으며 북극점에서 322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여름에도 영하 20이하로 떨어지고 바람이 강하며 무 포터, 무 셀파의 조건하에 모든 대원이 각자 짐을 지고 가야하는 곳이다. 앵커리지 공항에 내려 1인당 46kg의 무지막지한 짐을 끌고 공항을 빠져 나왔다.

  탈키트나 공항에서 사전교육을 받은 후 경비행기를 타고 빙하 위에 내린다. 2200미터 고지에 있는 랜딩 포인트에는 항공사 직원들이 텐트를 치고 상주한다. 거기서 연료와 썰매를 지급 받고 곧바로 산행이 시작된다. 삼중화에 설피까지 신으니 로보트 걸음이다. 남자들이 짐을 더 많이 져 준 덕에 여자들은 약 40킬로의 짐을 지고 끌고 하며 빙하 위를 올라가는데 그야말로 개고생이다.

  썰매가 미끄러워 잠시라도 쉬려면 뒤로 끌려 내려가니 고개를 숙이고 온몸으로 당기고 있어야한다. 편편한 빙하 위에 텐트를 치고 눈을 녹여 밥을 해먹는다. 한 컵의 물로 이를 닦고 물티슈로 고양이 세수를 한다.

  우리 텐트 속에는 남자 두 명에 여자 두 명이 같이 잔다. 침낭 속에 뜨거운 물병을 끼고 서로가 바짝 붙어 새우잠을 잔다. 아침에 일어나면 텐트 천장에 온통 서리가 생겨 버석버석 얼음 꽃이 떨어진다.

  당연히 화장실이 없으니 플라스틱 통에 비닐을 씌우고 거기 앉아 용변을 본다. 플라스틱 통에 앉아 있으려면 엉덩이가 아파서 뚫어질 지경이다. 똥통을 썰매에 싣고 가다가 비닐봉투를 꺼내 깊은 크레바스에 버리고 다음 날은 새 봉투를 쓴다. 한 텐트에 하루 한 개 정도의 비닐 봉투를 주니까 네 명이 다 용변을 본 후 싸서 가져가야한다. 소변은 곳곳에 분홍 리본을 꽂아 놓은 곳에서 본다.

  아침에 눈을 뜨면 부지런히 식사하고 텐트를 걷어 산행을 시작한다. 아침에 왼쪽에 있던 그림자가 점점 짧아졌다가 오른쪽으로 이동하고 밤 열두시가 넘어도 훤하다. 나는 원체 고소에 약하고 걸음도 느려 맨 뒤에서 혼자 걷는다. 네다섯 시간씩 앞에도 뒤에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흰 눈과 푸른 하늘뿐이다. 이러다 크레바스에 빠지면 아무도 모르겠구나 싶다.

  이렇게 5일 동안 사투를 벌인 끝에 4328미터 고지에 있는 매킨리시티에 입성했다. 말이 시티지 십여 개의 텐트가 들어선 베이스캠프다. 하루에 열다섯 시간이 넘게 무거운 짐을 지고 걸었더니 죽음 직전이다. 텐트에 도착하니 한 걸음도 옮길 수가 없다. 간에 있는 혹이 커졌는지 숨 쉴 때마다 오른쪽 옆구리가 아파 숨 쉬기도 힘들다. 아이젠 풀 힘도 신을 벗을 힘도 없어 텐트 안에 엉덩이만 들이밀고 침낭을 뒤집어쓰고 앉아있다. 남자 대원이 아이젠과 신을 풀어주고 텐트 안으로 끌어들여 두꺼운 바지를 입혀 침낭 속으로 밀어 넣어준다.

  하루 쉬고 아침에 보니 눈앞에 거대한 설벽 윈드월이 보인다. 텐트 앞 쪽에는 헌터봉과 포레이커봉이 환상 속의 풍경처럼 눈부시다. 일부 짐을 설벽 위에 가져다 눈 속에 묻어 두기로 했다. 썰매는 끌 수가 없으니 배낭만 지고 설벽에 설치된 고정 로프를 잡고 피켈을 찍으며 올라간다. 안전벨트를 매고 비너와 하강기, 주마 등을 줄줄이 달고 데포 시킬 물건을 지고 윈드월로 향한다. 마치 전투에 나가는 병사들 같다.

  맨몸으로 올라가기도 힘든데 무거운 배낭까지 지고 오르려니 죽을 맛이다. 설벽과 빙벽이 뒤섞여 아이젠을 신어도 자꾸 미끄러진다. 오르는 줄이 한 줄이고 안자일렌으로 줄줄이 사탕 같이 몸을 엮었으니 내가 못 오르면 다음 사람도 갈 수가 없다.

  몇 십 미터 되는 로프를 십여 개 오르며 사투를 벌이니 드디어 윈드월 정상이다. 여기에 가져간 물건들을 눈 속에 파묻고 내려오려는데 구조대원들이 와서 부상자가 있으니 나중에 내려가라고 한다. 한 여자가 탈진하여 들것에 실려 온 몸을 싸맨 채 밧줄로 달아 내려진다. 추운 언덕 위에서 한 시간 가량 기다리려니 온 몸이 얼어붙는다.

  부상자를 내린 후 우리 팀이 내려오려니 벌써 날이 저문다. 날은 춥고 온몸은 탈진되어 한 걸음 떼기도 힘들다. 코에서는 나도 모르게 콧물이 뚝뚝 떨어진다. 고정로프에 매달려 내려오는데 수시로 눈이 흘러내려 허리까지 파묻힌다. 이러다 아주 눈에 묻혀버리는 게 아닌가 겁이 더럭 난다.

  결국 새벽 한 시가 넘어서야 겨우 우리 텐트에 도착했다. 다 식어버린 밥에 국을 말아 한 술 뜨고는 쓰러지듯 침낭 속으로 들어간다.

  이틀 동안 일기가 안 좋아 텐트에서 시간을 죽이다가 다시 윈드월을 올라가 하이캠프로 간다고 한다. 나는 나 때문에 다른 사람도 못 가니 텐트에 남겠다고 하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또 줄줄이 사탕으로 묶은 후 윈드월로 올라간다. 사람들이 구름 속으로 사라지자 텐트 정리를 한 후 자리에 누웠다. 텅 빈 텐트에 혼자 누워 있으려니 더 춥다. 하이캠프로 올라간 사람들은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눈이 쏟아져 정상공격도 하지 못하고 다시 내려왔다. 23일 동안 빈 텐트에서 윈드월만 바라보려니 점 점 더 큰 거벽으로 다가온다. 거대한 설산은 내가 오르지 못할 벽이다. 그 위는 인간세상이 아닌 신의 세계다. 5천 미터 높이에서는 공기가 50% 밖에 안 되니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턱에 찬다. 내 가슴을 누르는, 저항할 수 없는 막강한 힘을 느낀다. 고산은 평생 내가 넘지 못할 벽이자 나를 가장 매혹시키는 대상이다. 희박한 공기는 나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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