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14. 6. 7.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 독후감

아~ 네모네! 2014. 6. 12. 20:21

바람이라도 좀 피워보지

아 네모네 이현숙

 

  이중섭은 너무도 유명한 사람이라 별 관심도 없이 단지 책이 얇다는 이유만으로 이 책을 선택했다. 그 전에 한 번 읽었던 것도 같다. 그런데 이번에 읽으니 맛이 좀 다르다.

  이중섭의 그림은 샤갈과 피카소와 고갱을 섞어 놓은 듯하다. 하늘을 나는 인간과 동물을 보면 샤갈의 환상적인 그림을 닮았고, 얼굴을 목에 거꾸로 갖다 붙인 모양은 피카소를 닮았다. 진하고 깊은 색채는 고갱을 닮은 것 같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는데 사과를 주면 먼저 그리고 나서 먹었다고 한다. 특히 소를 많이 그렸는데 남의 소를 하루 종일 관찰하다가 주인에게 소도둑으로 오인 받아 고발을 당하기도 했다. 닭도 많이 그렸는데 집에서 닭을 키우면서 하도 들여다보니 이가 옮아서 고생하기도 했다.

  어떤 대상에게 필이 꽂히면 집착하는 그의 성격은 여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후배인 일본 여인 마사코에게 마음을 빼앗긴 그는 그림으로 된 엽서를 보내며 사귀기 시작했고 7년 만에 마사코가 홀로 현해탄을 건너와 결혼하였다. 이름도 이남덕으로 고치고 원산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했으나 넉 달 만에 해방을 맞았다.

  해방은 우리 민족에게 크나큰 기쁨이지만 이들에게는 불행의 씨앗이었다. 이중섭은 친일파로 오인 받았고 부인은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때부터 이중섭의 피맺힌 편지가 시작되고 그들에게 보내는 그림과 편지가 이 책의 내용이다.

  처음에는 나의 귀여운 남덕군으로 시작됐는데 날이 갈수록 나의 상냥하고 소중한 사람, 가슴 가득한 단 하나의 사람, 나의 소중한 아내, 나의 남덕군 하면서 절규에 가까운 글이 된다.

  내 나이가 30년만 젊었어도 이런 글이 좋아 보였을지 모르겠는데 이 나이에 이런 글을 보니 가슴이 답답하다. 편지마다 뽀뽀를 연발하고 답장해 달라고 애걸복걸하니 얼마나 부담스러웠을까?

이들은 일본 서적을 한국에 보내 판매하여 그 수익금으로 생활하려했지만 후배의 횡령으로 막대한 빚을 지게 되고 이것을 갚기 위해 부인은 삯바느질과 뜨개질을 하며 고생하다가 건강을 해치게 된다.

  그림을 팔아 빚을 갚고 생활하려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고 일본과 수교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마음대로 일본에 갈 수도 없었다. 그저 피를 토하듯 글과 그림으로 절규했고 아들에게도 자전거 사주겠다고 편지마다 자신의 사랑을 표현했다.

  전시회를 열어 그 판매금으로 돈을 마련하려했지만 은종이 그림이 춘화라는 이유로 철거되고 그림 값을 떼이기도 하며 실망과 좌절에 빠진다. 술로 지새우다 빈털터리가 되어 자학과 정신분열증에 영양부족까지 겹쳐 극도로 쇠약해진다. 자신에게 철저히 실망한 그는 식사를 거부하고 부인이 보낸 편지도 뜯지 않고 돌려보낸다. 이건 단식투쟁이 아니고 단식 자살이다.

  결국 간염과 영양실조로 이산가족이 된지 4년 만에 서대문 적십자 병원에서 홀로 숨지고 만다. 아들들에게 자전거도 사주지 못한 채 말이다. 3일 뒤 이 사실을 알게 된 친구들이 장례를 치르고 화장한 뼈의 일부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일부는 일본의 부인에게 전해져 그 집 뜰에 모셔졌다.

  죽어서라도 부인 곁에 묻혔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내 마음 같아서는 바람이라도 좀 피우지 그랬나 싶다. 다른 남자들은 부인 몰래 바람도 잘 피우더구만 그는 왜 그리도 한 여자에게만 목매고 매달렸을까? 너무도 부인과 아이들을 사랑했기에 그 화염이 그를 태우고 그의 모든 에너지를 소진시켜 버린 것 같다.

  마흔 한 살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는 너무도 치열하게 살았고 너무도 처절하게 몸부림치다가 지쳐 쓰러졌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점령하지 않았다면, 아니 해방이 되지 않았다면 행복한 일생을 살 수 있었을까?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수레에 깔리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다가 결국은 바퀴에 깔려 죽은 그가 애처롭다.

  그의 둘째 아들이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난 걸보면 나의 아버지뻘이다. 93세 된 나의 아버지는 지금도 살아계셔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시는데 이중섭도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면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었을까?

  이토록 어려운 시기에 태어나서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이 시기를 잘 넘겨 준 우리 부모 세대에 감사한다. 지금 우리들이 룰루랄라 해외여행 다니며 노는 것은 다 우리 부모님들 덕분이다. 온몸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지탱하며 여기까지 굴러오게 한 우리 모두의 부모님께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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