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14. 4. 6. 온 집안이 부엌? (낭독자료)

아~ 네모네! 2014. 4. 19. 17:33

온 집안이 부엌?

아 네모네 이현숙

 

  엄마의 부엌은 부엌에 한정되지 않았다. 술을 담글 때는 안방이 부엌이 되어 술독이 아랫목을 차지한다. 아버지 생신날이 돌아오면 마장동 도축장에서 온갖 고기를 사다가 마당에 앉아 큰 다라이에 허파, , 갈비, 천엽 등을 담아 손질한다. 전을 부치거나 만두, 송편을 빚을 때는 마루에 식구들이 둘러앉아 함께 만든다.

  부엌에는 수도가 없어 음식이나 설거지를 하려면 마당에서 물을 받아 물독에 부어놓고 써야하니 불편하다. 그러니까 설거지 양이 많거나 씻어야할 재료가 많을 때는 마당에 깔판을 깔고 앉아 하게 마련이다.

  부엌에는 솥이 세 개 걸려있는데 가운데는 연탄아궁이고 양쪽은 불을 때는 아궁이다. 연탄에는 양은솥이 걸려있어 항상 뜨거운 물을 쓸 수 있게 했다. 오른쪽에는 커다란 무쇠 솥이 있는데 시루떡을 찐다거나 술 만들 고두밥을 찔 때 사용한다.

  한 번은 엄마가 이 아궁이에 불을 지폈는데 고양이가 튀어 나왔다. 여기가 따뜻하니 고양이가 이 속에 들어가 새끼를 낳은 것이다. 어미는 튀어나와 살았지만 어린 새끼는 미처 꺼낼 틈도 없이 불길에 휩싸여 버렸다. 엄마는 이걸 두고두고 마음 아파했다.

  부엌과 안방 사이 벽에는 손바닥보다 더 작은 유리창이 있다. 부엌에서 여자들이 혼자 맛난 것 먹을까봐 감시하려고 한 건지 뭔지 도대체 용도를 모르겠다.

  엄마가 막내 동생을 낳는다고 방에서 산고를 치를 때다. 언니가 이 유리창으로 안방을 훔쳐보았다. 아버지는 엄마 손을 꼭 잡고 엄마는 안간 힘을 썼다. 언니는 아기가 엄마 몸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부엌에서 나무를 때니 아궁이 위쪽 벽은 연기에 그을려 새카맸다. 언니는 최무룡과 김지미를 어찌나 좋아하는지 부지깽이로 이 벽 가득히 최무룡 김지미 이름을 써 놓았다. 부엌 바닥에 앉아 나를 앞에 두고 영화 얘기를 할 때는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온갖 모션을 써가며 영화 상영 시간 보다 더 길게 얘기를 했던 것 같다.

  이제 이렇게 나의 어린 시절이 묻어있고, 엄마의 젊음이 서려있는 부엌은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근처의 허름한 집들이 모두 헐리고 지금은 벽산 아파트가 들어섰다.

  요즘은 부엌이 모두 거실로 들어와 어디까지가 부엌이고 어디까지가 거실인지 경계가 모호해졌다. 모든 것이 퓨전으로 바뀐 세상이다. 집도 퓨전, 음식도 퓨전이다. 원룸에는 부엌도 침실도 거실도 모두 한 공간에 들어있다. 이러다 사람도 퓨전인간이 되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