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2009. 11. 10. 영남 알프스

아~ 네모네! 2012. 10. 15. 16:59

 

 

 

 

 

 

 

 

 

 

 

 

 

 

파도치는 알프스

 

영남 알프스! 이름만 들어도 가슴 설레는 이름이다.

영남 알프스가 멋있다는 얘기는 10여 년 전부터 동생에게 들었다. 천황산과 제약산은 가봤는데 여기보다는 간월산, 신불산, 영축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훨씬 더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언젠가는 꼭 가보리라 벼르고 있었는데 드디어 기회가 왔다. 일중산악회에서 화요반 수요반과 연합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주저할 것 없이 명단에 이름을 적었다.

 

대망의 날이 밝아오기도 전,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잠자는 남편을 깨워 강제로 아침밥을 먹이고 6시에 집을 나섰다. 깜깜한 새벽부터 배낭 지고 나서려면 행여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까봐 주위를 살핀다.

7시에 잠실을 출발한 버스는 분당에 들러 일부 회원을 더 태우고 언양으로 내 달린다. 언양에서 갈비탕으로 배를 불린 후 2조로 나누어 일부는 간월 폭포를 거쳐 간월재로 오르고 일부 회원은 배내고개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배내고개는 길을 넓히는지 무슨 건물을 짓는지 한창 공사 중이다. 공사판 왼편 안내도 있는 곳에서 1245분에 산행을 시작했다. 배내고개라는 이름은 어찌하여 붙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꼭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는 아기가 된 기분으로 첫걸음을 옮겼다.

처음부터 능선 길로 이어지는 산길은 갓 태어난 아기도 갈 수 있을 정도로 평탄하고 순하다. 억새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30분 정도 오르니 어느 덧 배내봉(966m) 정상이다. 배내봉은 여인의 배처럼 두리뭉실하니 순하게 생겼다.

고속도로처럼 잘 닦여진 길을 가며 전후좌우로 이어지는 끝없는 산들을 바라보노라면 발이 움직이는지 손이 움직이는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산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뒤돌아보면 우리가 온 길이 가는 뱀처럼 구불거리고 앞에는 가야할 길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앙상한 나뭇가지와 푸른 소나무 사이 길로 걸어가는 회원들의 모습이 줄지어 이사 가는 개미 같다.

이리보고 저리보고 주위 경관에 눈을 빼앗기다보니 어느 덧 간월산 정상이다. 간월산은 달을 보는 산(看月山)인 줄 알았더니 肝月山이다. 왜 간 자를 썼는지 아리송해진다. 사람의 간은 아닌 것 같아 집에 와 찾아보니 간()""등과 함께 우리민족이 써오던 신성하다는 뜻을 가진 말이고 월()은 넓은 평원을 뜻하는 말이란다. 아마도 넓은 억새밭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가보다. 그런데 간월산은 대동지지에 보면 看月山으로 표기되어 있다고 한다. 달을 보는 산이라고 했다가 그 후 다른 뜻으로 바뀐 모양이다.

간월산을 넘어오니 멀리 간월재로 올라온 우리 팀의 뒷모습이 보인다. 우리는 ~이 어~하고 소리치며 스틱을 흔들어댔다. 나무계단 길을 내려서니 커다란 돌탑이 있는 간월재에 이른다. 돌탑 앞에는 넓은 마룻바닥에 탁자와 의자들이 있어 간식 먹기 안성맞춤이다.

간단히 요기하고 계단 길을 조금 오르니 악우 김종필을 추모하는 비석 앞에 노란 국화꽃 조화가 바람을 맞고 있다. 이런 비석을 볼 때 마다 산에서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 애처롭다는 생각과 함께 이러고도 산행을 하는 게 옳은가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어찌 보면 잠시 잠간 살더라도 자기가 해보고 싶은 것 하다가 가는 삶이 아름다운 것 같기도 하다.

우리의 호프 호선생님은 대포 같은 카메라를 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게 홍길동이 따로 없다. 환갑 진갑 다 지난 나이에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오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사진 찍을 때는 조금이라도 더 멋진 배경을 잡으려고 땅에 엎어지고 자빠지고 벼랑 끝에 아슬아슬 올라서는가 하면 다리 난간에 두 다리를 감고 옆으로 기울이는데 그대로 밑으로 처박히는 것 같아 보는 사람이 심장병 생길 지경이다. 사진 찍히는 우리보다 사진 찍는 호선생님 폼이 백배 천배 멋지다.

신불산(1209m) 정상에 오르니 간월재로 오른 대장님이 기다리고 있다가 주위 산들에 대한 설명을 해준다. 신불산(神佛山) 정상은 신선이나 살 듯한 분위기가 감돈다. 끝없이 이어지는 산들의 파노라마를 바라보노라니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가슴 가득 차오른다. 팽팽한 긴장감에 가슴이 터질 듯하다. 파도치는 산들이 달려와 내게 덮치는 것 같다.

환상에서 깨어나 정상에서 조금 내려오니 200011일에 삼남면민이 세운 새천년 기념비가 우리를 반긴다. 신불산에서 영축산까지 이어지는 억새밭은 4차원의 세계로 들어가는 듯 신비감에 정신이 몽롱하다. 지상에서 영원으로 통하는 관문이 여기가 아닐까? 정신없이 걷다보면 발이 땅에 붙었는지 허공에 떠서 가는지 감각이 없다.

한참 억새밭에서 헤엄치다 보니 몸의 물이 나가겠다고 소리친다. 가느다란 오솔길로 들어가 볼일을 보려니 벌써 선구자들이 다녀간 흔적이 곳곳에 널려있다. 대 여섯 시간씩 걷다 도저히 생리현상을 참을 수 없어 으슥한 곳을 찾아 볼 일을 보려면 항상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다른 동물들은 가책 없이 큰 일 작은 일 할 것 없이 어느 누구의 눈치도 안보고 당당하게 볼일을 보는데 왜 사람만 유독 수치심을 느끼나 모르겠다.

영역 표시를 마치고 다시 큰 길로 나와 영축산 정상으로 향한다. 뒤돌아보니 이제까지 걸어온 길이 까마득히 이어진다. 영축산(1081m) 정상에 오르니 어느 덧 뉘엿뉘엿 해가 기운다.

영축산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내려서니 곧 태양이 가라앉고 사방에 어둠이 깔린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하늘에는 별들이, 땅에는 양산 시내의 불빛이 보석을 뿌린 듯하다. 랜턴을 켜고 더듬더듬 함박등을 지나 함박재에서 백운암으로 향한다. 삼십 명이 넘는 우리들의 불빛이 반딧불처럼 일렁인다.

한참을 암흑 속에서 헤매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개소리가 들린다. 산에서 듣는 개소리만큼 반가운 소리가 또 있을까? 인가가 가까웠다는 소리다. 캄캄한 산 속에서 수 십 개의 불빛이 흔들리며 내려오니 개들은 도깨비불이라도 본 듯 놀라서 짖어댄다. 소리 나는 방향으로 계속 내려오니 과연 불빛이 보이고 백운암이 나타난다.

여기서 다시 돌길을 30분 정도 내려오니 택시의 붉은 미등이 보인다. 대장님이 이재호씨에게 연락하여 올려 보낸 택시들이다. 우리는 이제 살았구나 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택시에 오른다.

영남 알프스는 유럽의 원조 알프스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다. 아니 오히려 더 가슴 저리게 다가오는 신비감이 있다. 알프스는 아무데나 붙이는 이름이 아니다. 영남 알프스는 짝퉁 알프스가 아니라 당당한 명품 알프스다. 오랜 숙원을 해결한 오늘은 내게 너무도 가슴 벅찬 하루다.

 

산은 나의 영원한 반려자요 가슴 저리도록 애틋한 애인이다. 이 애인은 내가 울면 달래주고 내가 웃으면 같이 웃어준다. 배반할 줄도 모르고 사라질 줄도 모른다. 항상 제 자리에서 나를 기다려주고 언제든 반겨준다. 죽어서도 이 애인의 품에 안겨 영원히 함께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