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2009. 11. 27. 우즈베키스탄, 이집트

아~ 네모네! 2012. 10. 17. 20:09

 

 

 

 

 

 

 

 

 

 

 

 

 

 

 

 

 

 

 

 

아싸! 가오리

 

기간 : 20091127~ 128

장소 : 우즈베키스탄, 이집트

 

이집트 하면 피라밋, 4대 문명 발상지, 모세의 출애굽, 이 정도였다. 그저 막연히 동경해온 이곳에 드디어 내 발을 디뎌볼 기회가 왔다. 거기다 덤으로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까지 가게 됐으니 물으나 마나 아싸 ~ 가오리다.

 

우즈베키스탄

우즈베키스탄은 우즈베크의 땅이란 뜻이라고 한다. ‘이 우리말의 땅인 가보다.

 

설산이 나를 설레게 하네.

비행기 좌석에 앉으니 옆에 앉은 부반장이 영어 신문을 척~ 펴들고 있다.

오메~ 기죽어!”

했더니 그림만 보고 아침에 집에서 본 한글 신문 내용을 떠올리면 된단다. 두 자리 차지하고 누우니 의자 사이가 튀어 나와 외로 누우나 바로 누우나 가슴팍이 결린다. 어째 비행기 좌석이 이재호씨 버스만도 못하다.

비몽사몽 간에 헤매는데 호선생님이 카메라를 들고 왔다 갔다 한다. 웬일인가 하고 벌떡 일어나니 밖에 설산이 기막히단다. 얼른 카메라를 들고 창문 덮개를 여니 발밑에 하얀 설산이 깔렸다. 대장님이 돌아다니며 천산산맥을 지나고 있다고 알려준다. 이리 찍고 저리 찍고 정신없이 찍어댔다. 설산은 보면 볼수록 나를 설레게 하고 그 안에 들어가 하나의 점이 되고 싶은 충동을 누를 수 없다. 산이 파도치고 구름이 파도치고 골짜기 사이로 흘러내린 눈이 가는 선을 이루고 있다. 양숙씨는 꼭 실핏줄 같다고 한다. 간호사 출신이라 그런 생각이 떠오르나 보다.

 

설산에 정신이 뺏겨 넋을 잃고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니 김사장님이 각자 가진 돈을 알려 달란다. 우즈베키스탄은 입국할 때 가진 돈이 얼마인지 신고하고 출국할 때 남은 돈을 신고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돈이 늘어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한 푼이라도 쓰고 가야지 벌어 가면 안 된다는 소리다.

그럼 들어갈 때 많이 신고하면 되겠다고 했더니 그러다 보여 달라고 하면 어쩔꺼냐고 한다. 하긴 나 같이 잔머리 굴리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니 그럴 수도 있겠다. 돈도 별로 없는 주제에 별 걱정 다 하는 내가 우습다.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 수속을 밟는데 한 여자가 우릴 보고 어디 가냐고 묻는다. 타쉬켄트, 사마르칸트 간다고 했더니 자기는 사마르칸트에 산단다. 2년 동안 한국서 일하고 지금 집에 가는 길이라고 한다. 한국이 좋다고 또 가고 싶다고 한다.

짐이 안 나와 기다리는데 갑자기 덜커덕하고 벨트가 움직인다. 그 소리가 어찌나 요란한지 없는 애 떨어질 판이다.

이곳 사람들은 한국에서 별별 것을 다 사들여 온다. 오디오, 전기밥솥, 라면, 광천김, 하여튼 사람마다 짐이 어마어마하다. 몇 년 전 일본 가는 사람마다 코끼리 밥솥 사들고 들어오던 우리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이렇게 한국 물건 많이 사주는 이들에게 감사해야겠다.

 

밖으로 나오니 현지 가이드 이벨라씨가 인사한다. 이벨라는 고려인 3세인데 가이드 하려고 32살 때 일부러 한국말을 배웠다고 한다. 발음은 조금 엉성했지만 자기 할 말은 다한다. 비행기 안에서 안내 방송하는 남자는 우즈벡 말인지, 영어인지, 한국말인지 세 나라 말이 모두 똑같이 들려 도무지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이벨라가 훨 났다.

버스에 오르니 김사장님이 카스테라와 물을 나누어준다. 7시간이 넘게 오는데 기내식을 한 번 밖에 안 주니 배고프던 참이라 다들 허겁지겁 해치웠다. 허기를 면하고 농부시장으로 갔다. 사방은 캄캄한데 어디서 새소리가 요란하다. 안으로 들어가니 커다란 지붕 밑에 많은 노점상들이 있고 천장에서 새들이 날아다닌다. 시간이 늦어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닫았다. 고려인들이 반찬 가게를 하고 있는데 김치도 있고 온갖 나물을 쌓아 놓았다. 우리는 사진이나 찍고 그냥 지나가려고 하는데 대장님은 미안한 마음에 숙주나물을 한 보따리 산다.

배복순씨는 다른 쪽에서 쟁반만한 빵을 사들고 온다. 네 개에 1달러라고 하는데 우리 18명이 실컷 먹게 생겼다. 김사장님이 준 2만 원짜리 카스테라보다 이게 더 맛있다고 다들 잘도 먹는다.

 

농부시장에서 나와 대지진 기념비를 보러 갔다. 작은 광장에 커다란 동상과 가운데가 갈라진 큰 돌이 있다. 이 표지석에는 1966년 대지진의 진앙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진원은 땅 속의 지진이 일어난 곳이고 진앙은 진원 바로 위의 지표면이다. 지진파는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데 진원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진앙이라 피해가 가장 크다. 표지석 옆에는 누가 갖다 놓았는지 꽃다발이 한 묶음 놓여있다. 그때의 지진 피해자 가족이 다녀 갔나보다.

 

대지진 기념비까지 보고 종가집이라는 한식집으로 가서 버섯전골과 삼겹살을 먹었다. 다들 삼겹살이 맛있다고 하니 주인아줌마가 이곳은 어린 돼지를 잡기 때문에 연하고 맛있다고 한다. 호기심이 발동한 호선생님이 먹다 말고 써빙하는 아가씨에게 이게 몇 살 된 돼지냐고 하니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잡는 걸 보지도 않았는데……한다.

그런데 발음이 어찌나 또릿또릿한지 가이드해도 되겠다.

다들 포식을 하고는 4시간이 늘어난 긴 하루를 마감하고 호텔로 들어왔다.

 

노브라가 웃는다고?

우즈벡어로 굿모닝이 뭐냐고 물으니 노브레 우드라란다. 뭐라고? 노브라가 웃는다고? 하며 몇 번씩 중얼거려 본다. 여자는 왜 브래지어를 해야 하는지 생각할수록 불공평하다. 남자들은 아랫도리에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데 말이다. 하긴 나 같은 사람은 몇 십 년 째 노브라로 산다. 그저 헐렁한 옷 입고 대충 꾸부정하게 구부리고 그냥 산다. 산에 갔다가 갑자기 온천 가면 노브라에 노팬티 차림으로 집에 간다. 어차피 할머니 패션인데 하며 순 배짱으로 밀고 나간다. 이래서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할머니라고 하나보다. 이유인즉 뵈는 게 없어서 그렇단다.

 

아침 7시에 타쉬켄트에서 사마르칸트까지 논스톱으로 달리는 기차에 올랐다. 기차는 61실이었는데 우리 열차의 제일 앞 칸과 제일 뒷 칸이 비었다. 양숙씨가 승무원에게 다른 방에 가도 되냐고 물으니 괜찮단다. 잽싸게 뒷 칸으로 옮겨가 혼자서 여섯 좌석 차지하고 느긋하게 앉아서 밖을 감상했다.

밖에는 하얀 서리가 내린 벌판이 계속된다. 지평선이 붉어지는가 했더니 붉은 해가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다. 나오는가 했더니 이마빼기만 잠시 보여주고 다시 구름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겨울이라 땅도 잿빛인데 구름까지 끼어 음울한 러시아 문학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사람은 자연의 일부라 자연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 러시아 문학이 음울한 잿빛을 띠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인 것 같다.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기어이 비가 내린다. 겨울비 내리는 벌판 위로 까마귀 떼가 날아오른다. 눈이라도 펑펑 내렸으면 좋겠다. 시베리아 벌판을 며칠씩 달리며 바이칼호수를 바라보는 기분은 어떨까? 언젠가 한 번 꼭 가보고 싶다.

사람은 혼자 있으면 자연과 대화를 나누게 된다. 산행할 때도 사람들과 같이 가다보면 사람끼리 얘기하느라 자연과 얘기할 틈이 없다. 가끔 혼자서 산행을 하면 몇 시간씩 자연과 얘기하고 또 자신과 얘기하는 맛이 쏠쏠하다.

벌판에서 혼자 풀을 뜯는 망아지를 보니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한 말씀이 떠오른다. 내가 보기에도 좋으니 하나님 보기에도 좋았을 것이다. 사람을 창조한 날은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했는데 역시 사람은 하나님의 작품 중에서도 최고의 걸작품이다.

 

한참 명상에 잠겨 있는데 호선생님이 맥주를 샀으니 마시러 오라고 한다. 그 칸으로 가보니 맥주와 마른안주를 놓고 기다리고 있다.

사마르칸트를 위하여!”를 외치고 시원한 맥주로 목을 축였다.

호선생님이 배낭을 뒤지더니 무슨 종이를 꺼낸다. 뭐냐고 했더니 기차에서 부르려고 노래가사를 프린트 해왔다는 것이다. 20여곡을 해왔는데 비 내리는 영동교’ ‘개똥벌레’ ‘사랑의 미로등등 7080 노래가 줄줄이 이어진다. 이건 한마디로 호영진 리사이틀이다. 호선생님은 돈만 잘 버는 줄 알았더니 노래도 가수 뺨치게 잘한다. 지금도 미국에서 공부하는 아들에게 매달 만 불씩 보낸단다. 나는 아들에게 한 달에 천 불 밖에 못 보내는데 길거리에 나앉은 거 아닌가 모르겠다.

한참 노래자랑을 하다 보니 3시간 반이 금방 지나고 사마르칸트역에 도착한다.

사마르칸트역에 내리니 여기도 쟁반만한 빵을 파는 아줌마가 있다. 이 아줌마와 빵을 들고 사진을 찍고는 빵을 사서 버스에 올랐다.

 

울르그벡 천문대에 도착하니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여전히 찌푸린 상태다. 이 천문대는 1428년에 울르그벡에 의해 만들어졌다. 여기서 측정한 1년은 3656시간 99.6초인데 이것은 1분의 오차도 안 된다고 한다. 울르그벡은 왕이면서 천문학자, 교수였는데 학교를 세워 무료로 강의도 했다. 이 학교는 누구나 받아줬지만 공부 안 하면 버드나무 회초리로 매질했고 졸업시험을 통과 못하면 통과할 수 있을 때까지 공부시켰다. 그는 또 이 학교에 연못을 만들어 연못에 비치는 하늘을 보며 관측했다. 하지만 자식복이 없었는지 아들의 칼에 찔려 살해되었고 발굴 당시 찔린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고 한다.

박물관 안벽에는 울르그벡의 모습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모습 등이 그려져 있고 천장에는 하늘의 별자리가 그려져 있다. 사진을 찍으려면 돈을 내야하므로 대장님과 호선생님만 카메라비를 내고 우리는 몰래 살금살금 찍었다. 그 돈이 얼마나 된다고 이렇게 궁상을 떠는지 내가 생각해도 우습다.

 

천문대에서 나와 아프라시압 박물관으로 갔는데 여기도 카메라비를 내야한다. 여기서는 사진 찍다가 개망신 당할까봐 참기로 했다. 이 박물관은 구 소련의 고고학자들이 옛 사마르칸트의 중심지였던 아프라시압 언덕을 발굴하다 나온 유물을 전시한 곳이다.

박물관 안에는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 기념품인 칼 은전, 채문토기, 귀금속품 등이 전시되어 있고 조장(새들에게 시체를 먹이는 장례) 후 남은 뼈를 담아둔 토기도 보인다. 어떤 것은 해골바가지와 뼈가 그냥 전시되어 있어 보기에도 섬뜩하다.

벽화도 있었는데 이 벽화는 사마르칸트 통치자 저택에 있던 것을 벽채 뜯어와 실제 크기로 재생한 것이다. 이 그림에는 각 나라 사신들의 모습과 코끼리를 탄 당나라 신부의 모습도 있고, 낙타 타고 가는 남자들의 모습, 조우관을 쓴 고구려인도 보인다.

 

점심 식사 후 레기스탄 광장으로 갔다. 레기스탄은 모래의 광장이란 뜻이다. 이 광장에는 세 개의 메드레세(신학교)가 있는데 각 건물의 지붕 색깔이 어찌나 오묘한지 비취색 같기도 하고 옥색 같기도 하고 하여튼 인간이 만든 것인지 신이 만든 것인지 모를 정도로 신비한 색이다.

 

다음에는 비비하눔 모스크를 보러 갔다. 비비하눔은 징기스칸의 조카딸인데 사랑하는 할머니란 뜻이다. 이 모스크는 티무르의 인도 원정 후 그의 개선에 맞추어 왕비인 비비하눔이 선물로 만든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티무르의 개선 전에 모스크 완성이 어려워지자 왕비가 건축가와 부정을 저질러 완성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이 첨탑에서 왕비를 내던졌다고도 하고 왕이 건축가를 죽이려하자 왕비가 그를 첨탑 위로 피신시켰고 여기서 새가 되어 날아갔다고도 한다. 예나 지금이나 스캔들 없이는 스토리가 안 되나보다.

 

비비하눔 모스크까지 보고 부하라로 향했다. 사마르칸트에서 부하라까지는 버스로 4시간 반 정도 걸린다. 이 길은 E-40번 국도인데 실크로드로서 파리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버스를 달리며 밖을 보니 당나귀도 보이고 사람도 보이고 풀을 뜯는 양도 보인다. 이들을 보니 모든 동물은 순간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물거품이 아닌가 싶다.

부하라 팔레스 호텔에 도착하여 식당으로 가니 식탁에 내프킨을 돌돌 말아 세워 놓았다. 양숙씨가 촛대 같다고 하니 호선생님이 발음 잘 해야지 잘못하면 오해한다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부자 되라고?

부하라는 산스크리트어로 수도원을 뜻한다. 뜻은 어찌 되었건 부자 되라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의 하나로 360개의 이슬람 사원과 100 여개의 메드레세(신학교)가 있었다.

쉬토라이 모리하사 궁전에 도착하니 아침 안개가 자욱하다. 쉬토라인지 쉿 또라이인지? 모리하사인지 모리상사인지 통 혀가 돌아가지 않는다. 쉬토라는 별, 모는 달, 하사는 장소라는 뜻으로 달과 별의 궁전이라고 한다. 이 궁전은 부하라 칸국의 최후의 칸인 아리우 칸이 많은 시간을 보낸 여름 궁전이다.

궁전 안에는 넓은 정원과 사각형의 큰 연못이 있다. 날씨가 쌀쌀한데 아직도 장미가 피어있고 공작새가 돌아다닌다. 접견실과 정자를 돌아보다가 한 떼의 군인들을 만났다. 우즈베키스탄은 18세가 되면 모두 군대 가는데 1달에 1번씩 박물관 견학이나 영화 구경을 시켜 준단다.

아들 같은 군인들을 보자 대장님의 마음이 끌렸다. 그들에게 한국도 알릴 겸 친선도 도모할 겸 태권도 시범을 보여 주겠단다. 앞 차기, 뒷 차기, 올려 차기, 내려 차기 한참 시범을 보이더니 인솔자를 부른다. 100달러를 줄 테니 맛있는 것 사먹으라고 하자 다들 박수를 치는데 배복순씨가 얼른 나와 대장님이 돈을 너무 많이 쓴다고 자기가 내겠다고 한다. 돈은 버는 것보다 쓰는 것이 중요하다더니 배복순씨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도 곱다.

 

이 궁전을 나와 이스마일 샤마니 영묘로 갔다. 이스마일인지 이스라엘인지 샤마니인지 사모님인지 아리까리한데 이스마일은 왕의 이름이고, 샤마니는 왕조의 이름이라고 한다. 이 묘는 AD900년에 만들었는데 실제로 시신이 매장되어 있다고 한다. 이 묘는 낙타 젖을 섞은 흙벽돌로 여러 가지 문양을 만들었는데 흙이 어떻게 1000년을 넘게 견디었는지 신기하다. 이 묘를 세 바퀴 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데 대충 한 바퀴만 돌았으니 수원성취 하기는 다 틀렸다.

 

다음은 사 계절 궁전인 아르크성을 보러 갔다. 아르크는 방주성채라는 뜻인데 7세기 초에 처음 만들어 졌고 그 후 여러 번 개축되었다고 한다. 성 안의 기념품 가게에서는 손으로 돌리는 부채도 팔고 있다. 유물관에는 옛날 그릇, 화폐, 책 받침대, 벽화 등이 있다. 성벽은 항아리 모양 둥글둥글한데 일정한 간격으로 나무가 박혀있다. 이것은 성벽안의 물기를 빼내려는 것인지 온도차에 의한 균열을 막으려는 것인지 모르겠다.

버스로 돌아오니 아침에 주문한 꿀이 도착해 주문한대로 나누어 가졌다. 꿀은 1kg10달러인데 무지 진하고 맛있다.

 

점심 식사 후 식당 앞에 있는 칼란 미나렛을 보았다. 이것은 1127년 카라한 왕조 때 만들어진 것으로 큰 첨탑이란 뜻이다. 첨탑의 높이는 46미터이고 본래의 목적은 상인들의 중요한 길잡이였다고 한다. 18세기 부하라 칸국 시대에는 죄인들을 주머니에 넣어 탑 위에서 던졌다고 하며 죽음의 탑으로도 불렸다.

첨탑 옆에 있는 미르아랍 메드레세(신학교) 문으로 들어가니 격자창으로 안쪽을 들여다보게만 하고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게 한다. 이곳은 중앙아시아 유일의 이슬람 신학교로서 1536년에 세워져 현재까지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창으로 들여다보니 신학생 둘이서 한창 탁구를 치고 있다.

메드레세를 나오니 달덩이 같이 큰 빵을 자전거에 싣고 팔러 나온 할아버지가 보인다. 어디서 왔냐고 묻기에 코리아라고 하니 김연아 최고라고 하며 엄지 손가락을 번쩍 든다. 중앙아시아의 빵장수 할아버지까지 아는 걸 보니 과연 김연아는 명실 공히 세계적인 선수다. 빵장수 할아버지와 한참 사진을 찍는데 남자들은 첨탑 꼭대기까지 올라간다고 빨리 들어오란다.

네 명의 남자들은 안으로 들어가고 우리는 길가 기념품 가게로 들어갔다. 이곳은 타키 자르가란이란 상점인데 타키는 둥근 지붕이란 뜻이다. 16세기경에 만들어졌고 상점마다 둥근 지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점 안에는 카펫과 가위, 모자, 향수 등을 팔고 있다.

김사장님은 여기서 아는 분에게 선물한다고 멋진 털모자를 샀다. 아기 오줌 받는 나무 대롱도 있었는데 동그랗고 깊숙하게 만든 것은 남자 아기용이고, 길쭉하게 패인 것은 여자 아기용이다. 이벨라가 이게 뭐냐고 묻자 한 회원이 애기 오줌 받는 거라고 하자 이거 맞춘 팀은 처음이란다.

 

마고키 아타리 메드레세는 문이 잠겨 겉에서만 보았다. 이 사원은 10세기에 지어졌는데 모래에 묻혀 있다가 1934년 러시아 과학자에 의해 발굴되었다. 마고키는 굴안이란 뜻이고, 아타리는 약을 판매하는이란 뜻인데 예전에 이 주변에서 약을 팔았다고 한다.

한참 걷다보니 목이 마른데 마침 메론 장수가 있다. 길가 리어카에서 팔고 있는데 즉석에서 썰어준다. 모두들 길에 서서 정신없이 먹고는 라비 하우즈로 갔다. 하우즈라고 해서 무슨 집인 줄 알았더니 사각형의 큰 인공연못이다. 이 연못은 피라미드를 거꾸로 뒤집어 놓은 모양인데 계단으로 되어있어 물이 줄어도 물을 길으러 내려갈 수 있게 되어있다. 연못 주변에는 노천카페와 고목들이 있는데 이것은 1477년에 심은 뽕나무라고 한다.

 

저녁 식사 후 벨리댄스를 보러 가기로 했는데 시간이 좀 남는다. 막간을 이용하여 유리병에 든 꿀을 패트병에 옮기는 작업을 했다. 넓은 주둥이의 유리병에 든 꿀을 좁은 패트병으로 옮기려니 이게 장난이 아니다. 연구 끝에 패트병을 반으로 잘라 꿀을 쏟은 후 패트병을 눌러 좁게 만든 후 다른 패트병에 따랐다. 다들 서툴러 병 겉에 꿀을 묻히고 쏟고 난리다. 그런데 노효선씨와 오세숙씨는 패트병에 따르지도 않고 유리병에서 직접 패트병으로 옮긴다. 꿀 한 방울 흘리지도 않고 말이다. 우리는 혀를 내두르며 노도사와 오도사에게 감탄했다. 다들 어찌나 진지하게 꿀을 따르는지 숨소리도 안 들린다. 이렇게 집중하여 공부했으면 모두 박사학위 땄을 것 같다.

 

꿀을 다 따르고 벨리댄스를 보러갔다. 벨리댄스는 어찌나 격렬하게 몸을 꼬고 흔들어 대는지 옛 어른들이 보면 그야말로 오두방정 떤다고 할 것 같다. 남자의 성욕을 불러일으키려는 듯, 오르가즘을 느끼는 듯 기성을 질러댄다. 마치 자신의 유전자를 세상에 남기려고 몸부림치는 듯하다.

 

이집트는 원 달러?

 

껍질만 남은 카이로

우즈베키스탄을 떠나며 남은 돈을 신고해야한다. 처음에 가지고 들어온 돈과 남은 돈을 적은 두 개의 종이를 출국 심사할 때 제출하면 금액을 비교하고 도장을 쾅 쾅 찍어준다.

5시간의 비행 끝에 터키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이스탄불 공항은 우즈베키스탄의 공항과는 때깔이 다르다. 불빛도 휘황찬란하고 면세점도 많아 구경하기는 좋은데 유로화를 쓰고 값도 비싸서 그림의 떡이다. 양숙씨와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아이스크림 하나씩 사먹고 환승 게이트로 갔다.

다시 3시간의 시차가 생겨 한국과는 7시간의 시차가 생겼다. 2시간의 비행 끝에 카이로 공항에 도착하니 빨간 넥타이의 공항 직원과 현지 가이드 에즈딘이 일중 산악회라고 쓴 종이를 들고 맞이한다.

에즈딘은 15년 전 한국에 와 연세대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웠다고 한다. ‘은 종교를 뜻하는데 예를 들어 알라딘은 종교의 최고자, ‘살라딘은 종교의 정직함, ‘에즈딘은 종교의 힘을 말한다고 한다. 에즈딘은 키도 크고 잘 생긴데다 발음도 정확해서 갑자기 귀가 확~ 뚫리는 느낌이다.

 

공항에서 곧장 이집트 고고학 박물관으로 향했다. 이곳은 입장하기 전에 모든 카메라를 맡기고 들어가야 하니 대장님과 호선생님은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 박물관의 유물은 영국 대영 박물관에 있는 이집트관보다 더 빈약한 듯하다. 얼마나 많은 유물이 해외로 반출 되었는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래도 투탕카멘의 황금가면, 여덟 겹으로 된 관, 람세스 2세의 조각상, 그 외에도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나온 3500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어 그런대로 볼만하다.

람세스 2세는 성경의 출애굽기에 나오는 압제자 바로이다. 뒤를 이은 메르네프타는 유대 민족이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 군주로 추정되고 있다. 메르네프타의 전승 기념비에 나오는 이스라엘은 황량하며 씨 뿌릴 땅이 없다는 대목이 나온다.

조각상들은 화강암이나 섬록암으로 만들었는데 카이로 근처에는 이런 돌이 없어 멀리 900km나 떨어진 아스완에서 나일강을 따라 운반해 왔다고 한다.

박물관에는 수많은 상형문자와 벽화도 있었는데 벽화의 색은 금속 산화물을 썼다고 한다. 예를 들어 붉은색은 철의 산화물을, 푸른색은 구리의 산화물을 썼다는 것이다. 이렇게 금속 산화물을 칠했으니 수천 년이 지났어도 전혀 변색이 되지 않고 선명하게 남아있는 가보다.

그 많은 왕의 무덤이 모두 도굴 당하고 투탕카멘의 무덤 하나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는 18살에 죽어 재위 기간이 짧아 부장품이 가장 적었다. 90살이 넘도록 산 람세스 2세 무덤의 부장품은 얼마나 방대했을지 상상할 수도 없다. 카이로는 알맹이는 다 뺏기고 껍질만 남은 느낌이다.

 

박물관에서 나와 나일강변을 지나 호텔로 향했다. 카이로는 나일강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는데 동쪽은 구 카이로이고 서쪽은 기자지구이다. 이 두 구역을 합쳐 카이로 특별시라고 한다. 강가에는 많은 인파가 있었는데 마침 오늘이 명절 끝이라 산책 나온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여기도 신종 플루가 유행이라 휴교한 학교가 많아 학생들도 많이 돌아다니고 있단다.

버스가 어둠침침한 구역을 지나가는데 이 지역은 묘지라고 한다. 카이로 면적의 1/5이 묘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비석은 안 보이고 집들이 많다. 이집트 사람들은 지하에 묘지를 만들고 그 위에 집을 지어 가난한 사람들이 무료로 살게 한다. 이 사람들은 묘지도 관리하며 지켜 준다. 말이 묘지이지 전기, 수도, 전화선까지 다 들어가고 시장, 학교 등 모든 시설이 다 있단다.

사람이 죽으면 헝겊으로 싸서 지하실 가운데 눕히고 먼저 시체는 옆으로 치운다. 시체 위에서 살면 냄새 나지 않느냐고 했더니 지하실은 돌로 단단히 막아 놓기 때문에 괜찮단다.

가다가 빵 장수가 보였는데 빵 값의 70%는 정부가 보조해 준다고 한다. 그러니 가난한 사람도 굶어죽을 일은 없겠다. 세계 어느 나라나 배고프면 폭동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더운 나라이니 얼어 죽을 일은 없고 이렇게 의식주를 해결해 주니 큰 문제없이 잘 돌아가나 보다.

 

산 자의 도시, 죽은 자의 도시

새벽 4시에 일어나 도시락을 받아들고 5시에 공항으로 갔다. 룩소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다. 공항에서 기다리는 동안 도시락을 먹고 대장님이 가져온 쇠고리 풀기를 했다. 꼭 뫼비우스의 띠처럼 생겼는데 이리 돌려도 저리 돌려도 빠지지 않는다. 한참 싱갱이를 하다가 대장님의 설명을 수없이 듣고야 겨우 풀 수 있었다. 이 거 하느라 지루한 줄도 모르고 금방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에 올라서도 계속 연습했는데 되다 안 되다 한다. 연습하다 보니 잠 잘 틈도 없이 1시간이 흘러 룩소 공항에 도착했다.

룩소는 카이로 남쪽 약 660km 떨어진 나일강변에 있다. 여기는 룩소 신전, 카르낙 신전, 왕가의 계곡 등이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태양이 뜨는 나일강 동쪽에는 신전을 지었고, 태양이 지는 서쪽에는 묘지를 만들었다. 따라서 나일강 서쪽은 죽은 자의 도시 네크로폴리스라고 하고 서쪽은 산 자의 도시 테베라고 한다.

 

먼저 죽은 자의 도시에 있는 왕가의 골짜기로 향했다. 여기는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 없는 황량한 산인데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아무 것도 찍을 수가 없다. 돌산 곳곳에 굴로 된 무덤이 있는데 이것은 BC 1600년에서 BC 1200년 사이 신왕국 시대 여러 왕들의 무덤이다.

고왕국시대의 피라미드가 도굴범들의 눈에 잘 띄어 부활에 필요한 미라가 손상되자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땅 속에 굴을 파고 복잡한 미로를 만들어 보물창고, 분묘 등을 만들었다. 정확한 무덤의 숫자는 누구도 알지 못하나 수천 개는 될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는 투탕카멘의 묘, 람세스의 묘, 귀족묘, 장인들의 묘 등이 있다. 투탕카멘의 묘가 손상되지 않은 이유는 람세스 6세가 투탕카멘의 묘 위쪽에 자신의 묘를 만들면서 나온 돌과 흙을 투탕카멘의 묘 위에 버려 그것이 덮여버렸기 때문이다. 전화위복이란 이런 때 쓰는 말인가 보다.

고왕국 시대의 왕은 곧 신이었다. 그는 사후에 태양신과 함께 여행을 한다고 믿었으며 그 여행을 위해 피라미드 속에 배를 만들어 넣어 주었다.

신왕국 시대의 왕은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여 존경을 받지 못했고 사후에도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죽으면 태양신 앞에 가서 1단계로 180개의 질문에 대답해야하는데 예를 들면

나일강 물을 더럽힌 적 있냐?”

남의 여자 뺏은 적 있냐?”

남의 물건 훔친 적 있냐?” 등 등 이었다.

그래서 신 왕국 시대의 왕 무덤에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 모두 적혀 있어 무수한 상형문자가 남아있다. 컨닝 페이퍼 아니 컨닝 벽은 이때부터 있었나보다.

1단계를 모두 합격하면 2단계 시험이 있다. 심장의 무게를 다는 시험이다. 심장을 꺼내 저울의 한 쪽에 놓고 다른 쪽에 새털을 놓아 심장이 새털보다 가벼워야한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 좋은 일을 많이 해야 심장이 가벼운데 만약 심장이 무거우면 악어 머리에 하마 몸을 한 괴물이 왕을 지옥으로 끌고 간다. 그래서 미라를 만들 때 뇌와 모든 내장은 꺼내지만 심장은 몸에 그냥 남겨 두었다.

두 번째 관문까지 무사히 통과하면 태양신과 함께 하루 24시간 여행한다. 즉 저녁이 되면 서쪽에서 저승(나일강 아래쪽)으로 내려가 12시간 여행하여 동쪽으로 이동한다. 아침이 되면 이승(나일강의 위쪽)으로 나와 12시간 여행한다. 저승을 여행할 때 많은 악마를 만나므로 벽에다 왕의 업적은 기록하지 않고 수많은 부적을 만들어 붙였다.

 

왕들의 무덤에서 조금 내려오면 합세수트 장제전이 있다. 장제전은 파라오가 죽었을 때 장례식과 매년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즉 장례와 제례를 지내는 곳이 장제전이다. 합세수트 장제전은 여왕 합세수트가 약 3400년 전에 바위산을 파내어 만든 것으로 멀리서 보면 웅대하고 아름다운 3층짜리 건물이다.

이 장제전은 여왕의 아버지 투트모스 1세의 부활과 자신의 부활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것이며 스스로 신전에서 제례를 관장하는 제사장이 되었다. 남편을 잃고 의붓아들의 섭정이 된 그녀는 신권, 왕권, 군사권까지 모두 장악한 최초의 여자 파라오였다.

이집트의 파라오 가문은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근친간의 결혼이 빈번히 이루어졌는데 합세수트도 아버지 투트모스 1세의 첩인 무트노프레트의 아들 즉 배 다른 오빠 투트모스 2세와 결혼하였다. 투트모스 2세는 병약하였고 딸 하나만 남긴 후 세상을 떠났다. 결국 파라오의 자리는 후궁의 아들인 투트모스 3세에게 돌아가게 되었고 그 때 나이 10살이었다. 어린 왕이 왕위를 잇자 그녀는 20살에 섭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집트의 관례상 여자는 파라오가 될 수 없었지만 스스로 파라오에 오르고 세간의 입방아를 막기 위해 남자의 옷을 입고 인조 수염을 달았다. 의붓아들 투트모스 3세는 파라오의 자리를 뺐긴 채 합세수트의 딸과 결혼하고 20여 년간 숨죽이며 살았다.

합세수트의 통치기간은 이집트 신왕조의 전성기였다. 그녀는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를 통합하고 많은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으며 자신과 이집트의 영광을 기리는 거대한 건축물을 건설하였다.

합세수트는 통치 20년 만에 파라오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죽음으로 인한 것인지 반란으로 인한 것인지 확실치 않다.

합세수트의 뒤를 이은 의붓아들 투트모스 3세는 그녀의 업적과 모든 기록을 지워버렸다. 벽화에 그려진 그녀의 얼굴은 모두 뜯겨졌으며 건축물은 파손되고 조각상도 파괴되었다. 그녀의 업적을 기린 기록과 비문도 모두 훼손되었다. 심지어 합세수트가 왕위에 있던 20년의 시간마저 지워 버렸다. 이집트 왕의 목록에서도 그녀의 이름은 빠지고 투트모스 2세에서 투트모스 3세로 곧장 이어진다. 그러나 투트모스 3세가 눈에 불을 켜고 지운 합세수트의 많은 업적은 수 천 년의 세월을 넘어 오늘날까지 그 자취를 보여주고 있다.

그녀의 관 뚜껑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왕의 딸, 신의 아내, 위대한 왕의 아내, 두 나라의 여주인 합세수트는 말한다.

~ 나의 어머니 누트(하늘 여신)! 내 위로 몸을 활짝 펼치시어 당신 속에 있는 사라지지 않는 별들 속에 나를 받아들이소서. 내가 죽지 않도록.”

 

장제전에서 조금 더 내려오면 멤논 거상이 있다. 네크로폴리스(죽은 자의 도시) 입구에 있는 한 쌍의 거대한 석상인데 상, 하 이집트를 통일한 아멘호테크 3세를 나타낸 것이다. 북쪽의 석상은 지진 때문에 틈이 생겨 아침 햇살을 받으면 이상한 소리를 냈다. 이것을 본 그리스인들이 트로이 전쟁 때 멸망한 에티오피아 왕 멤논이 자기 어머니인 새벽의 여신 오로라에게 노래를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왕가의 골짜기를 나와 배를 타고 나일강 건너편의 호텔로 갔다. 호텔에서 체크인 하고 점심을 먹은 후 잠시 쉬고 오후 관광을 시작했다.

오후에는 먼저 카르낙 신전으로 갔다. 카르낙 신전은 아몬 신을 모시는 곳으로 현존하는 신전 가운데 최대이며 남북의 거리가 1.5km나 된다. 특히 23m 높이의 기둥이 134개나 늘어선 대 열주실과 안쪽의 합세수트 여왕이 만든 오벨리스크는 보는 이의 가슴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다.

특히 에즈딘이 돌을 어떻게 쌓아올렸는지, 창문에서 들어온 햇빛이 어떻게 기둥 위에 파피루스 모양을 만드는지, 오벨리스크는 어떻게 세웠는지 스케치북에 그려온 그림으로 설명해 주니 너무도 이해가 잘 되고 머리에 쏙쏙 들어온다. 오벨리스크는 고대 이집트 왕조 때 태양신앙의 상징으로 세워진 방탑형 돌이다. 하나의 거대한 돌로 만들었는데 단면은 사각형이고 위로 갈수록 가늘어지며 꼭대기는 피라미드형이다. 오벨리스크는 그리스어로 바늘이란 뜻이다. 바늘처럼 길고 뾰족해서 그런 이름을 붙였나보다.

가는 데마다 사진 찍을 곳이 많아 수시로 단체 사진을 찍는다. 우리들은 아까와 같은 자세로 찍자고

아까멩키로~ ”

왼발은 앞으로, 가슴은 똑바로, 얼굴은 옆으로, 눈알은 앞으로~”

하면서 지금까지 본 파라오의 자세로 포즈를 잡는다. 이런 우리의 자세가 재미있는지 외국인들은 웃으며 셔터를 눌러댄다. 어떤 사람들은 같이 찍자고 끼어든다.

다음은 룩소 신전을 보았는데 이미 해가 져서 조명이 들어왔다. 조명이 들어온 신전은 더욱 더 신비감을 자아냈다. 룩소 신전도 아몬 신을 위한 신전인데 람세스 2세의 상으로 장식한 제 1탑문, 안뜰을 지나 알렉잔더 대왕의 방과 지성소까지 이어진다.

 

룩소 신전까지 본 후 다시 호텔로 돌아가 중국식으로 저녁 식사를 하고 재래시장을 보러갔다. 우리가 지나가자 가게 점원마다 물건을 들고 튀어나와

원 달러~ 원 달러~” 하고 외쳐 댄다.

뭐가 원 달러인가? 하고 쳐다보면 10달러, 다른 걸 한 번 만져보면 20달러, 비싸서 나오려고 하면 5달러라고 한다. 이 사람들의 원 달러는 1달러가 아니고

"Hello~" 하고 부르는 호칭이 되었다. 후에 보니 룩소뿐이 아니고 전국 어디를 가나 원 달러다.

시장을 지나며 보니 한 꼬마가 다른 사람의 콩 파는 리어카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훔쳐서 입에 넣는다.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구워먹기가 아니고 콩 주워 먹기다. 눈이 반짝반짝한 게 어디 갖다 놔도 굶어죽지 않게 생겼다. 이런 아이들을 보면 한국 아이들은 온실 속의 화초처럼 너무 나약한 것 같다.

곰보라구?

새벽 산책좀 하려고 호텔 밖으로 나가니 나일강으로 달이 가라앉는다. 나일강이 달을 삼키는 듯하다. 나일강이 매일 태양을 삼켰다가 다음 날 토해 놓는다는 이집트인들의 생각이 이해된다. 나일강 위로 열기구가 떠오른다. 열기구 타는데 170불이라고 한다. 체력도 딸리고 재력도 딸려서 포기했다.

산책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 아침 식사를 하였다. 커피를 먹다가 앞에 앉은 양숙씨가 내 잔이 더 커 보인다고 한다. 키를 대보니 똑 같다. 내참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소리는 들어봤지만 남의 컵이 커 보인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다. 달걀을 먹다가 또 내 노른자가 더 커 보인다고 한다. 남의 것이 커 보이는 것은 착각이기 전에 인간의 본능인가보다. 옆의 일본 아줌마들을 보니 과일만 조금씩 먹는다. 내 접시에 탑처럼 쌓아올린 빵을 볼까봐 겁난다. 그 여자들이 보면 무슨 씨름 선수가 온 줄 알겠다. 어쩌면 위대(胃大)해 보일지도 모른다.

아침 식사 후 대장님과 김사장님의 찬조로 마차를 탔다. 아침에 보는 룩소 신전은 어제의 그 신비감을 잃었다. 마부는 자꾸 말을 시킨다. 이집트 사람들은 친절하긴 한데 같이 사진만 찍어도 돈 달라, 지나가다 자기 사진 찍으면 또 돈 달라, 화장실도 돈 달라, 그저 눈만 마주쳐도 돈 달라고 할 판이다. 그래서 마부도 돈 달랄까봐 못 들은 척 했다. 아니나 다를까 내릴 때가 되니 한 명당 1달러씩 2달러를 달란다. 김사장님에게 물으니 마차 1대에 1달러 주라고 해서 1달러만 줬다.

버스를 타고 오아시스 도시인 에드푸로 향했다. 가는 길에 보니 한 떼의 사람들이 지나간다. 에즈딘이 보더니 장례식이라고 한다. 자세히 보니 들것에 시신을 헝겊으로 싸서 얹고 여러 명이 들고 간다. 우리나라처럼 땅을 파서 묻지 않고 지하실에 넣기만 하면 되니 간편하기는 할 것 같다.

두 시간 가량 가니 호루스 신전이다. 하늘 여신 누트와 땅 신 계브가 결혼하여 세트, 네프티스, 이시스, 오시리스를 낳았고, 이시스와 오시리스가 결혼하여 호루스를 낳았다고 한다. 신전 앞에는 검은 돌로 된 한 쌍의 호루스 상이 있는데 오른 쪽 것은 머리 부분만 남아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에즈딘은 알렉잔더 대왕의 동방 원정을 비롯하여 클레오파트라와 사랑한 이야기, 알렉잔더가 암살당한 이야기, 그 후 안토니우스와 사랑하고 악티움에서 패전하여 자살한 이야기, 등등 장장 세 시간 동안 서양사를 줄줄이 옛날이야기 하듯 풀어냈다. 클레오파트라가 죽은 후 이집트는 670년 동안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고 한다.

피곤해서 잠들기 딱 좋은 시간인데도 다들 넋이 빠져 두 눈을 초롱초롱 뜨고 경청하니 에즈딘은 자기도취에 빠진 듯 한없이 열강한다. 강의가 끝나자 우리는 박수갈채를 퍼부었고 교수님으로 승격시켰다. 그 후로는 에즈딘을 교수님이라고 불렀다. 정말 한국 와서 세계사 강의해도 좋을 것 같다. 그는 대학에서 6개월간 알렉잔더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교수님이 알렉잔더를 하도 좋아해서 다른 내용은 전혀 하지 않고 한 학기 내내 알렉잔더만 강의했단다. 에즈딘의 강의에 감명 받은 호선생님은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자기도 가이드가 되고 싶단다. 선생님 되고 싶다는 초등학생 같다.

마호멧에 대한 얘기로 또 장장 한 시간이 넘게 강의를 했는데 마호멧은 25살에 15년 연상의 과부 하디제와 결혼했고 생활비 벌 걱정이 없게 되자 사막에서 기도생활에 들어갔고 여기서 가브리엘 천사를 만나 계시를 받게 된다. 사막에 가면 해, , 별 밖에 안 보이니 누구나 명상에 잠길 수밖에 없단다. 부처님, 예수님, 모세, 마호멧 모두 사막생활을 통해 종교 지도자가 되었다.

이슬람교는 유대교, 기독교, 천주교와 똑같은 하나님을 믿는데 허락받은 거짓말이 네 가지 있단다.

첫째: 못 생긴 부인에게 네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

둘째: 못 생긴 남편에게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잘 생겼다.

셋째: 부부싸움 화해시키는 사람이 상대에게 당신이 제일 착하다.

넷째: 포로로 잡혔을 때 거짓 정보 말하는 것이란다.

정신없이 강의를 듣다보니 어느 덧 콤옴보에 도착했다. 콤옴보인지 곰보인지 아스완 북쪽 48km 지점에 있는 도시다. 여기에 콤옴보 신전이 있는데 이 신전은 악어 머리를 한 소백 신과 매의 머리를 한 호루스 신을 모신 신전이다. 신전 벽에는 포로의 팔과 다리를 묶어 대롱대롱 매단 조각도 있고, 포로들의 머리를 줄줄이 묶어 조기 엮듯 엮어 놓은 조각도 있다.

두 신을 모시므로 문도 두 개, 지성소도 두 개가 있다. 두 지성소 사이를 오가며 사제들이 신의 목소리를 흉내 내었는데 돌로 둘러싸인 벽에 메아리가 울려 신도들은 신의 음성을 들은 줄 착각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여기서 나와 아스완 나일강 가에 있는 이시스 호텔에 들었다. 이 호텔은 수영장도 있고 나일강이 내려다 보여 전망이 기막히게 좋다. 유유히 나일강을 오가는 돛단배와 나일강으로 지는 일몰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나일강 건너 산에는 성인지 탑인지 모를 멋진 유적이 붉은 빛 노을 속에 아련하게 빛난다.

저녁 식사 후 또 재래시장을 보러갔다. 여기도 온통 원 달러다. 머플러도 원 달러, 가방도 원 달러, 구두도 원 달러, 이집트의 모든 물건은 원 달러인가 보다.

호텔에 돌아와 남편과 아들, 딸에게 엽서를 썼다.

 

어찌 태양을 숭배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침 3시에 일어나 엽서를 부쳐줄 수 있나 물었더니 우표를 안 붙인 것은 못 부쳐준다고 카이로 가서 부치란다.

오늘은 아스완 댐을 보러가는 날이다. 새벽 4시에 호텔에서 싸 준 도시락을 들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들이 줄줄이 서서 경찰 콘보이(convoy)를 받으며 출발한다. 내 생전에 경찰 호위 받기는 처음이다. 갑자기 중요인물 된 기분이다. 이집트는 관광객의 안전을 위하여 버스마다 경찰이 한 명씩 동승한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예비 차량도 따라간단다. 하긴 관광 수입으로 먹고 사는 이집트에서 관광객 안 오면 뭘 먹고 살겠나 싶다.

버스에 오르니 버스 기사가 자기 아들 결혼식 한 비디오를 틀어준다. 이걸 왜 틀어주나 의아해 했더니 에즈딘이 여기 사람들은 결혼식에 밴드도 부르고 가수도 불러 무척 호화롭게 치르는데 순전히 자기 과시용이란다. 대학 교수 월급이 40만 원 정도인데 결혼식에 보통 800만 원 정도 쓴다고 한다. 그래서 결혼식 때문에 빚지는 사람이 많다. 우리 기사도 자랑하고 싶어서 틀어주는 거란다.

가는데 마다 화장실에서 돈을 받으니 이게 보통일이 아니다. 작년에 이집트 왔던 동생이 이집트 돈이 남았다고 주었는데 물 사먹고 물 빼는데 다 쓴다. 5파운드면 다섯 명 들어갈 수 있다. 휴지라고 쥐방울만큼 주고 화장실이라고 코도 못 들게 더러우면서 돈은 꼬박꼬박 받는다.

 

캄캄한 어둠 속에 1907년에 만들었다는 아스완 하부 댐을 지나 사막 속을 달린다. 얼마를 달리다 보니 왼쪽 하늘이 붉으스레 밝아온다. 한참 뚫어지게 바라보는데 마치 써치 라이트를 비추는 듯, 레이저 쇼를 하는 듯 햇살이 퍼져 나오더니 불덩어리가 솟구친다. 사막에서 떠오르는 태양은 어찌나 크고 장엄한지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지고 경배하고 싶은 마음이 울컥울컥 솟아오른다. 이런 태양을 보고 어찌 숭배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고대 이집트 사람들의 심정이 십분 이해되고도 남는다. 나도 그 때 살았으면 땅 바닥에 코 박고 열심히 절 했을 것 같다. 이렇게 밝은 태양 빛 속에서도 찬란한 금성이 빛난다.

조금 더 가는데 웬 수로가 나타난다. 무슨 수로인가 했더니 사우디 왕자가 만든 것인데 40km 떨어진 나일강 물을 끌어다가 과일 농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3시간 넘게 화장실을 못 가니 차가 흔들릴 때마다 방광이 터질 지경이다. 조금씩 싸서 말릴 수도 없고 이건 완전 고문이다. 아부심벨 신전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총알같이 화장실로 뛰어갔다.

아부심벨 신전은 아스완에서 280km 남쪽, 나일강 가에 람세스 2세기 세운 신전이다. 아부심벨 신전은 3000년이란 긴 세월 동안 날씨의 영향이나 어떤 침식도 없이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었다. 아부심벨은 두 개의 신전으로 되었는데 낫세르 대통령이 아스완 댐을 만들자 수몰 위기에 처했다. 이집트 정부는 유네스코의 도움을 받아 1964년부터 1968년까지 산 전체를 분해하여 80m 위쪽의 모래언덕으로 옮겨 재조립하였다. 산의 윗부분을 잘라낼 때는 이 신전을 모래로 덮어 보호하였고 신전을 잘라 옮겨 다시 조립한 후 산의 윗부분을 덮을 때는 신전 위에 지붕을 만들어 다치지 않게 하였다.

오른 쪽 신전 앞면에는 람세스 2세의 조각상이 네 개, 왕비의 조각상이 두 개 새겨져 있다. 이 신전은 람세스가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하며 만든 것으로 자신이 자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모양도 새겨져 있다.

왼쪽 신전에는 람세스의 조각상 네 개가 있고 출입문 위에는 태양신인 라 신상이 조그맣게 새겨져 있다. 신전 안에는 여러 가지 동작의 라암셋 2세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고추가 서 있는 모습, 열 명의 적군 머리채를 한 손으로 잡아 올려 쳐 죽이는 모습 등 자신의 위력 과시하는 가지가지 모양의 조각이 있다.

신전 앞에는 낫세르 호수가 바다처럼 넓게 펼쳐져 있는데 아스완 댐에 의해 생긴 인공호수이다. 이 댐 공사로 나일강이 범람하지 않아 좋기는 하지만 문제점도 있다고 한다. 강이 범람할 때마다 상류에서 내려온 기름진 흙이 강변에 쌓여 농사가 잘 되었는데 요새는 토양이 척박해져 농사가 잘 안 된다고 한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게 있기 마련인가보다. 비옥한 토양은 댐 바닥에 쌓이는데 일본 회사가 건져내어 판다고 한다.

 

신전을 보고 다시 아스완으로 돌아오다가 신기루를 보았다. 신기루는 뜨거운 사막에서 빛의 굴절 때문에 생기는 것인데 보면 볼수록 신기하다. 신기해서 이름이 신기루인가보다. 모래 언덕의 그림자까지 비쳐 물에 뜬 섬처럼 보이니 물을 찾아 헤매는 사람이 착각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아스완 댐에서 잠시 쉬었는데 발전소와 아스완 하이댐의 안내도가 있고 여기까지 낫세르 호수가 넓게 펼쳐져 있다. 아스완 시내에 도착해 점심 식사를 하고 미완성 오벨리스크를 보러갔다. 오벨리스크는 거대한 화강암에 작은 홈을 만들고 여기에 나무 쐐기를 박은 후 계속 물을 뿌리면 나무가 불어서 돌이 깨지는 원리를 이용했다. 미완성 오벨리스크는 길이 42m로 가장 큰 오벨리스크가 될 뻔 했는데 만드는 도중 돌에 금이 가서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다.

 

미완성 오벨리스크를 본 후 돛단배를 타고 나일강 건너 누비안 마을로 갔다. 배에서 내려 조금 가는데 김은주씨가 갑자기

아차 배에 가방 두고 내렸어.” 한다.

배에 가보니 가방이 없다. 버스에 두고 왔나보다고 하자 에즈딘이 버스 기사에게 전화하여 어느 자리에 어느 색 가방 있나 보라고 했다. 한참을 찾았는지 있다고 연락이 왔다. 대장님은 얼마나 긴장했는지

에고~ 내가 제 명에 못 죽어.” 한다.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마을 안에는 길가에 기념품을 내 놓고 또 원 달러를 외치는데 먼지투성이라 눈길도 가지 않는다. 박은숙씨는

아침 도시락에서 남은 음식을 가져다 아이들을 주니 순식간에 아이들이 달려든다. 한 애기 엄마는 자기 아이가 받은 걸 빼앗고 또 받아오라고 보낸다. 나도 남은 것이 많은데 가져올 생각을 못했다. 선행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보다.

우리는 마을보다는 어제부터 눈독 들여온 산 위 망루 같은 유적지를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30분 정도 시간이 있다고 하여 한 발 올리면 두 발 미끄러지는 흙길을 기를 쓰고 올라갔다. 해는 벌써 서쪽으로 기울었는데 나일강에 점점이 떠있는 흰 돛단배와 작은 섬은 눈길을 뗄 수 없게 만든다. 눈앞에는 나일강 위로 아스완이 아스라이 떠 있고 산 밑 마을에는 낙타 타고 오는 사람들이 보인다.

쏜살같이 내려와 배를 타고 아스완 시내로 돌아오는데 나일강 물에 왜가리 한 마리가 외로이 앉아있다. 사진을 찍으려고 줌으로 한참 당겨도 잘 보이지 않는다.

이런 된~장 땡겨 봐야 점이네.”

하니까 옆의 오세숙씨가 웃는다. 큰 카메라가 좋기는 한데 비싸기도 하려니와 무거워서 들고 다니기도 힘들다. 그저 조막만 한 카메라로 찍으니 나중에 보면 다 지울 것뿐이다.

나일강을 건너와 아스완 공항에서 카이로로 향했다. 1시간 반 비행하니 어느 덧 카이로 공항이다. 호텔에 도착하여 씻고 나니 새벽 2시가 다 됐다. 새벽 3시부터 일어나 설쳤으니 23시간 관광한 꼴이다. 이거 관광하다가 과로사하게 생겼다.

 

사막사막이라고?

어제 배에서 카메라를 떨어뜨려 렌즈의 후드를 깬 호선생님이 에즈딘에게 호텔에서 테이프좀 얻을 수 있나고 물으니 직접 가지고 가서 붙이자고 한다. 가서 반창고로 칭칭 동여맨 카메라를 들고 오니 사람들이 카메라가 중상이라 기브스했다고 놀린다. 그래도 눈알(렌즈) 안 다친 게 다행이라고 흐뭇해한다.

오늘은 사하라 사막을 보러 가는 날이다. 사하라는 불모의 땅, 곧 사막이란 뜻이란다. 그러니까 사하라 사막이라고 하면 사막 사막이 된다. 족발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앞으로는 유식하게 그냥 사하라라고 부르기로 했다. 사하라는 모로코에 갔을 때도 보았는데 그때 본 사하라는 온통 붉은 빛 모래 언덕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백사막과 흑사막을 본다는 것이다.

이집트의 사하라는 나일강 서쪽의 서부사막과 동쪽의 동부사막으로 나눈다. 백사막과 흑사막은 서부사막에 있다. 카이로에서 5시간 버스 타고 가면 오아시스 도시인 바흐리아에 도착한다. 바흐리아는 아랍어로 북쪽이란 뜻이다. 사하라의 북쪽에 있기 때문이다.

바흐리아의 중심지 바위티 마을 한 호텔에서 가져온 한식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다보니 웬 한국 아가씨가 보인다. 어째 혼자 왔냐고 하니 자기는 부산 부경대 학생인데 케냐에 교환학생으로 와 있다고 한다. 혼자 여행 중인데 사막에는 외국인 부부와 셋이서 같이 간다고 한다.

 

식사 후 짚차를 타고 사막으로 들어갔다. 사막으로 들어갈 때는 경찰서에 신고를 해야 한다. 신고하면 경찰이 한 명 동승한다. 이것도 관광객의 안전을 위한 조치다.

한참 가다가 짚차들이 멈춘다. 내려 보니 검은 산이 앞에 있다. 흑사막이다. 돌멩이를 집어 두드려보니 쇳소리가 난다. 철의 산화물은 붉은 색과 검은 색이 있는데 산화된 정도에 따라 색이 달라진다. 적철석은 붉은 색을 띠고 자철석은 검은색을 띤다. 여기는 자철석이 많은가 보다.

산만 보면 물 만난 고기처럼 싱싱해지는지라 모두들 산으로 나는 듯이 올라간다. 별로 높지 않은 산인데도 정상에 올라서니 검은색 작은 구릉이 끝없이 이어진다. 이쪽저쪽 사방팔방으로 사진을 찍고 내려가기 전에 볼 일을 보기로 했다. 세 남자가 내려간 후 반대쪽에서 볼일을 보고 내려오는데 효선씨가 영 오지를 않는다. 무슨 문제가 생겼나했더니 나중에 흑사막 꼭대기에서 큰 볼일 본 사람은 자기 밖에 없을 거라고 자랑한다.

짚차로 내려와 조금 가니 검은 사막 아래로 붉은 해가 떨어진다. 시간이 늦었다고 하면서도 짚차 기사들이 잠시 세워줘 해가 꼴까닥 넘어갈 때까지 사진을 찍었다.

사방이 캄캄해져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 기사들은 길도 없는 사막을 잘도 달린다. 한참 달려 모래밭에 차를 멈추더니 휘황찬란한 무늬의 장막을 치고, 텐트도 치고, 장작불을 피운다. 요리사는 장작불 속에 닭고기 바베큐를 구우며 음식 장만을 한다.

 

음식이 되는 동안 별을 관찰하기로 했다. 달이 뜨면 별이 안 보인다고 대장님의 성화에 부지런히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대장님은 사람들이 빨리 안 나오자 애간장이 다 녹는다.

불빛이 없는 바위 뒤쪽으로 가자 과연 하늘에 별이 가득하고 희미한 은하수가 하늘을 가로질러 뻗어있다. 여기 저기 별똥별도 떨어지고 하늘 가득 다이아몬드를 뿌린 듯하다. 아직 오리온도 안 뜨고 북두칠성도 안 보인다. 카시오페아가 높이 떠 있는 걸 보니 북두칠성은 지평선 밑에 있나보다. , 달과 같이 모든 별도 동쪽에서 서쪽으로 하루 한 바퀴씩 돈다. 우리나라에서는 북두칠성이 지지 않는데 여기는 위도가 낮아서 그런지 북두칠성도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는 가보다. 별을 실컷 보고 텐트 쪽으로 와 대장님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데 지평선에서 오리온이 떠오르고 있다.

닭고기 바베큐와 빵으로 저녁 식사를 하고 캠프 화이어를 하였다. 우리의 교수님 에즈딘은 요새 열강 하느라 몸살이 나서 텐트 속에서 꼼짝을 못한다. 목이 붓고 열이 나서 낑낑 앓는다는 것이다. 저녁도 못 먹고 누워있으니 김사장님이 약을 주고 쉬게 했다.

일급 무용수 노효선씨는 현지인과 한바탕 춤 솜씨를 발휘하여 우리를 즐겁게 해준다. 한창 춤판이 무르익어 가는데 동쪽하늘이 서서히 밝아온다. 멀리서 박은숙씨가 달 뜬다고 소리친다. 그쪽으로 가보니 보름은 조금 지났지만 여전히 둥근달이 소리 소문도 없이 조용히 떠오르고 있다.

 

우리는 달밤에 산책을 하자고 백사막 속으로 들어갔다. 달은 점점 밝아지고 흰 바위들이 빛을 발하니 북극해의 빙하 사이를 떠다니는 기분이다. 이 바위에도 올라가고 저 바위에도 올라가고 이건 말대가리를 닮았다느니 저건 노래하는 성악가라느니 온갖 이름을 붙이며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마치 몽유병 환자가 환상에 이끌려 다니듯, 점점 꿈속으로 빠져들 듯, 하염없이 헤매다보니 방향감각을 잃었다.

사방은 교교한 달빛만 흐르고 우리 텐트는 보이지 않으니 순간 겁이 덜컥 난다. 달빛의 방향이 바뀌어서 그런지 바위 모양도 달라 보인다. 집을 못 찾고 밤새 헤매다가 저체온증에 걸려 죽는 것 아닌가? 낮까지 못 찾으면 물이 없어 목말라 죽는 거 아닌가? 별별 생각이 다 든다. 그 환상적이던 사막이 갑자기 죽음의 골짜기로 보인다. 한참 헤매다가 호선생님과 양숙씨가 저쪽에 우리 텐트가 보인다고 소리친다. ~이 어~이 하며 그쪽으로 가니 과연 캠프 화이어 불이 보이고 우리의 짚차가 보인다.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부반장님과 오세숙씨가 안 보인다. 처음 출발한 후 바로 옆 쪽 다른 바위로 갔는데 여태 안 오니 이거 아무래도 길을 잃은 것 같다고 걱정이 태산이다. 벌써 두 시간 반이 넘게 흘렀는데 길 잃은 게 아니면 이럴 리가 없다고 다들 가슴을 졸이며 어쩔 줄 모른다. 대장님은 바위 위에 올라가 어~이 어~이 소리 질러도 대답이 없다. 모두들 파랗게 질려서 짚차를 타고 찾아보는 게 어떠냐고 의논들을 하는데 멀리서 어~이 하고 답신이 온다. 우리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두 사람을 얼싸 안았다. 어떻게 된 거냐고 했더니 달빛이 좋아 여태 걸어 다닌 것이지 길을 잃은 것은 아니라고 했다.

텐트에 들어가 물티슈로 대충 고양이 세수를 하고 수연씨와 부반장이 준 핫팩을 등에 붙이고 자리에 누웠다. 처음에는 별로 춥지 않아 흙투성이인 담요를 배까지만 덮었다. 새벽이 될수록 점점 추워지자 흙이고 먼지고 가릴 것 없이 얼굴까지 바짝 올리고 고양이같이 오그리고 날이 밝기만 기다렸다.

꽃 중의 꽃 사하라

텐트 밖은 달빛으로 환한데 새벽 5시쯤 소변을 참기 어려워 밖으로 나가니 카시오페아는 지고 북두칠성이 하늘 높이 떠있다. 바위 뒤로 가 볼일을 보고 모래로 덮은 후 텐트로 돌아왔다.

잠시 어두워지는가 했더니 다시 서서히 밝아온다. 일출을 보려고 밖으로 나오니 벌써 여러 사람이 나와 일출을 기다린다. 기기묘묘한 바위 뒤로 여명이 밝아오고 있다. 해가 뜨기를 기다리다가 아침 식사 전에 또 백사막을 보기로 하고 텐트를 나섰다.

어제 보았던 바위들을 아침에 보니 또 다른 모양으로 보인다. 이 바위 저 바위에 올라 이 폼 저 폼으로 사진을 찍었다. 어제 본 말대가리는 순백의 백마로 변신했다. 끝도 없이 펼쳐진 흰 사막은 여기가 북극인지 남극인지 시베리아 벌판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마리아 바위에서 사진을 찍고 텐트로 돌아왔다.

 

계란과 치즈, 빵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짐을 꾸렸다. 에즈딘은 아침 식사도 못 하고 얼굴이 반쪽 됐다. 우리 일정이 조금만 더 길었다면 아마 순직했을지도 모른다. 텐트를 걷어 차에 실은 후 이번에는 짚차를 타고 백사막으로 들어갔다. 오프로드로 길도 없는 모래밭을 달리니 또 다른 신선한 맛이다. 백사막으로 들어가다 어제의 그 부경대 여학생을 만났다. 외국인 부부와 아침 식사를 하고 있다. 이렇게 세계 각국으로 교환학생을 보내면 앞으로 세계 친선 도모에도 좋고 외교 차원에서도 도움이 될 것 같다.

햇살이 강해지자 흰 바위들은 눈이 부셔 바라보기 힘들다. 기기묘묘한 버섯 바위가 있는 곳에서 차를 세워주니 또 다들 신이 나서 뛰어 다닌다. 한 번 풀어 놓으면 다시 거둬들이기 힘드니 잘 안 세우려고 하는 것 같다.

버섯 바위는 처음에 평범한 바위였던 것이 바람의 풍화작용으로 밑이 잘록하게 된 것이다. 사막에 모래바람이 불면 그 모래에 부딪쳐 바위가 깎이는데 아무래도 아래쪽에 모래가 더 많아서 아래쪽이 많이 깎이게 된다. 그래서 버섯 모양으로 변하는 것이다.

터키 카파도키아의 버섯 바위는 검은색을 띠는데 이곳의 버섯 바위는 송이버섯보다 더 흰 백설버섯이다. 싸리버섯도 있고 버섯 앞에 암탉이 한 마리 앉아 있는 것도 있다. 하여튼 별 별 모양이 다 있는데 기기묘묘란 이럴 때 쓰는 말이지 싶다. 사하라는 바다 밑이었는데 석회물질이 쌓여 이렇게 흰 바위들이 많다고 한다.

 

다시 짚차를 타고 조금 가니 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나이를 알 수 없는 아카시아 나무다. 우리나라의 아카시아와는 다른 아랍 아카시아다. 사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카시아라고 하는 나무는 아카시 나무다. 아카시는 흰 꽃이 피는데 아랍 아카시아는 노란 방울 같은 꽃이 핀다. 나무가 있으니 새소리도 들리고 벌도 날아다닌다. 땅을 보니 개미도 줄지어 다닌다. 나무 하나의 힘이 이토록 크다니 감탄사가 절로 난다. 사하라는 죽은 땅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생명이 깃든 땅이다. 꽃 중의 꽃이요, 보석 중의 보석이다.

우리는 그저 사진 찍기 바쁜데 대장님은 휴지 줍기 바쁘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고 우리나라도 아닌데 스스로 청소하는 모습이 존경스럽다. 한 독일 사람도 대장님이 좋아 보였는지 손세정제를 주며 닦으라고 한다.

다시 차로 돌아와 크리스탈 마운틴으로 갔다. 마운틴이라고 해야 산이라기보다는 바위 덩어리다. 여기서 크리스탈이 많이 났다고 한다. 지금도 바닥에는 작은 수정 결정들이 보인다. 바위 근처에는 접근하지 못하게 줄로 막아 놓았다. 플라워스톤은 작년부터 출입통제라 보지 못하고 다시 바흐리아의 바위티 마을로 돌아왔다. 오다가 온천이 있다고 하기에 무슨 목욕탕이 있나 했더니 그냥 뜨거운 물이 콸 콸 솟아나오는 곳이다. 이 아까운 물을 왜 그냥 버리냐고 했더니 버리는 게 아니고 이 물을 야자수농장으로 보낸단다. 바로 옆에는 대추야자 나무가 자라고 있다.

 

어제 도시락을 먹었던 호텔에 다시와 현지식으로 점심 식사를 한 후 경찰서 앞에서 경찰은 내렸다. 한 가게에서 대추야자를 샀는데 야자씨를 빼고 아몬드를 넣은 것이다. 1kg5달러라고 해서 너도 나도 몇 개씩 샀다. 5개씩 소포장 된 것이 20개 들어 있어 먹기도 좋고 나눠주기도 좋다. 그런데 우리가 48개나 달라고 하자 물건이 없어 오토바이를 타고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다른 가게 것을 모두 수거해왔다. 아마 이 집 주인 어제 돼지꿈 꿨을 꺼다.

 

버스를 오래 타다보니 에즈딘 교수님의 강의가 이어진다. 목도 아픈데 쉬라고 해도 사명감에 불타는지 학생들의 진지한 태도에 감동 먹었는지 끝도 없이 계속한다.

자기는 1995년 한국에 와서 한국어를 배우고 98년에 한국 가이드 면허를 땄단다. 그러나 한국에 IMF가 오자 한국 관광객이 없어 놀고 있었다. 99년 여름 한국의 모 TV에서 촬영을 온다고 하여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나갔다. 그들은 시나이 반도에서 오지 촬영을 하려고 왔다. 7시간 버스 타고, 2시간 낙타 타고 오지로 들어갔다. 낙타는 5일 후에 오기로 하고 돌아갔다.

하지만 그들은 이상한 책을 읽고 왔다는 것이다. 유목민들이 물이 없어 낙타 오줌으로 목욕한다는데 그걸 찍겠다는 것이다. 유목민 할아버지는 자기 생전에 그런 목욕은 해본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다고 펄펄 뛰었다. 에즈딘이 난처해서 돈을 줄 테니 한 번만 해달라고 사정사정했더니 그럼 네가 하라고 소리쳐 결국 첫날은 싸움만 하고 그냥 잤다.

다음 날 이번에는 유목민들이 염소 똥으로 약을 만든다는데 그걸 보여 달라고 했단다. 할아버지는 또 펄펄 뛰며 그런 약이 어디 있느냐고 자신이 약초로 만든 두통약 설사약을 보여 주며 또 싸웠다. 그날 저녁은 하도 걱정이 되어 잠이 안 오더란다.

셋째 날이 되자 이번에는 모래로 세수하는 것을 찍겠단다. 이것도 도통 듣도 보도 못하던 일이라 할아버지는 또 날 뛰었다. 그만 가고 싶어도 낙타가 없으니 가지도 못한다. 이것만 찍으면 가겠다고 사정사정하니 할아버지가 8살 된 아들에게 시켰다. 막내아들이 모래로 세수를 하자 형들은 뒤에서 박장대소로 웃어댔다.

 

다음에 또 다른 TV 방송사에서 왔다. 이번에는 230번 결혼한 남자를 찍으러 왔다. 그 사람은 고향에서 사고치고 도시로 도망 온 사람이란다. 밸리 댄서들과 3일도 살고 일 주일도 살고 했단다. 이 사람이 이집트의 대표적인 남자도 아니고 방송에 내보낼 가치도 없는 사람인데 왜 한국 방송사는 이런 사람을 찍어 가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한 번은 알렉잔드리아에 있는 도서관을 찍으러 왔다. 해변에서 책 읽는 사람을 찍으려 하는데 아무리 다녀도 책 읽는 사람이 없어 결국 여행사 직원이 책 들고 찍었다.

비둘기 먹는 사람을 찍으러 왔을 때는 그런 사람을 못 만나자 먹지도 않는 사람을 먹는다고 하라고 해서 찍고, 왜 먹느냐고 하면 정력에 좋다고 하라고 해서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20가지 질문에 20개의 답까지 적어 와서 그대로 말 하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것은 다 지난 일이고 지금은 양국 간에 왕래가 빈번해서 이런 오해도 없고 2005년 한국어 학교도 생겨 한국인 가이드도 속속 나온다고 한다. 요새는 코리아 TV도 생겨 한국 드라마가 엄청 인기 좋단다.

자기가 한국 와서 또 놀란 것은 교과서에 이슬람은 한 손에 칼, 한 손에 코란이라고 쓰인 것이라고 한다. 자기는 이런 소리 한국 와서 처음 들었다고 하였다.

이슬람에 대한 오해, 이집트에 대한 오해를 풀려고 에즈딘은 날이면 날마다 코피 터지도록 열강한다. 이집트 정부에서 홍보대사로 임명해도 되겠다. 우리는 그 열성에 너무도 감동하여 1인당 10불씩 걷어 특별 보너스를 주었다. 연일 강의를 들으며 필기를 했더니 볼펜 세 개가 다 떨어졌다. 볼펜이 없다고 하니 박용옥씨와 이수연씨가 볼펜을 갖다 준다. 볼펜 세 개 떨어지기는 난생 처음이다.

 

버스로 5시간을 이동하여 카이로에 도착했다. 카이로에는 짓다만 집이 많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아버지가 1층만 짓고 살다가 아들이 돈 벌어서 2층 짓고, 또 작은 아들이 돈 벌어 3층 짓고 하기 때문에 한 20년 동안 짓는 집도 있단다. 창문이 없는 집도 많은데 이것은 창문 값이 비싸서 못 붙인 거란다. 창문 한 개 값이 벽돌 100장 값 정도 되는데 여러 개의 창문을 달려면 또 몇 년이 걸린다고 한다.

이날 저녁은 나일강 디너 크루즈에서 부페식으로 먹었다. 식사가 끝나자 쇼가 이어진다. 벨리 댄스도 추고 넓은 치마도 휘돌리며 묘기 대행진을 벌인다. 댄서는 손님도 불러내어 같이 추는데 효선씨와 박선생님도 나가 한바탕 추고 들어왔다. 어찌나 흔들어대는지 살 떨리는 모양이 2만 볼트 전기에 감전 된 듯하다.

크루즈 쇼까지 다 보고 호텔로 돌아와 사막에서 묻혀온 모래를 말끔히 씻어냈다.

 

태양에게 경배하는 스핑크스

아침 식사를 하고 올라오는데 김사장님이 이 호텔에서도 피라미드가 보인다고 한다. 12층으로 올라가 복도 창문으로 내다보니 희뿌연 안개 속에 멀리 피라미드의 꼭대기가 보인다. 피라미드라고 해서 사막 한 가운데 있는 줄 알았는데 카이로 시내에서 이렇게 가까이 있는 줄 생각도 못했다.

버스를 타러 호텔 밖으로 나가니 시내버스에 사람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간다. 우리 어렸을 때 생각이 난다. 누구는 열 댓 명 타는 버스에 수 십 명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가고 누구는 45인승 버스에 열 댓 명 앉아 가려니 공연히 죄를 지은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든다.

 

버스를 타고 10여분 가니 기자 지방의 피라미드가 나타난다. 제일 앞에 있고 큰 피라밋이 쿠푸왕 피라밋이다. 이 피라밋은 2.3톤의 돌 230만개로 만들어졌다. 높이가 146m인데 이걸 다 쌓으려면 10만 명의 노동자가 24시간 일해도 20년이 걸린다고 한다.

그 뒤에 있는 것이 쿠푸왕의 아들 카프라의 피라밋이다. 이 피라밋 앞에는 스핑크스가 있는데 피라밋을 만들고 보니 앞에 돌산이 있어 피라밋이 잘 보이지 않았다. 결국 돌산을 통째로 깎아서 스핑크스 상을 만들었다. 왕릉 단지의 수호신으로 여겨지는 이 스핑크스는 카프라의 얼굴이라 한다. 스핑크스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태양을 향해 경배하는 모습이다.

제일 뒤에 있는 것이 카프라의 아들 멘카우라 무덤인데 크기도 가장 작다. 피라밋은 모두 도굴 되고 안은 텅 비어있다고 한다.

 

이 날은 바람이 거세고 추워 길바닥의 쓰레기가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른다. 어제 사막에서 이런 날씨였으면 어쨌을까 생각만 해도 아득하다. 피라밋과 스핑크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예수 피난 교회를 보러 갔다. 예수님은 헤롯왕을 피해 이곳으로 와 지하실 방에서 3년을 지냈다고 한다.

볼 것 다 보고 들을 것 다 들은 후 점심을 먹고 카이로 공항으로 향했다. 비행기에 앉아 아프리카여 안녕~ 이집트여 안녕~ 카이로여 안녕~을 되뇌며 터키 이스탄불로 향했다.

 

이슬람의 도시 이스탄불

 

터키에 점찍고

비행기가 두 시간이나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이스탄불에 내리니 캄캄한 밤이다. 현지 가이드 이인규씨가 우산을 들고 우리를 맞이한다. 비가 오느냐고 했더니 오후까지 왔는데 이제 개였단다. 잠시 잠간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 이인규씨는 이것저것 설명하기 바쁘다. 오랜만에 한국인이 하는 한국말을 들으니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귀에 쏙쏙 들어온다.

터키 민족은 투르크족 즉 돌궐족인데 중국 쪽에서 여기까지 이동해와 정착하였다고 한다. 이스탄불은 아랍어로 이슬람의 도시란 뜻이고 옛 이름은 콘스탄티노플 즉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란 뜻이다. 이스탄불 공항의 이름은 아타 투르크 공항인데 이것은 터키의 아버지란 뜻이고 케말 파샤 장군의 성이라고 한다.

 

대장님은 저녁밥도 먹지 말고 관광하자고 했지만 이미 식당에 예약이 된 관계로 케밥인지 개밥인지 터키 전통식을 먹으러 갔다. 열흘을 먹고도 김치 볶음이 남아 대장님이 각 테이블에 김치를 꺼내자 써빙하는 총각들이 코를 싸잡아 쥐고 난리다. 창문을 모두 열어 놓더니 급기야는 방향제를 가져와 사방에 뿌려댄다. 짓궂은 효선씨는 먹어보라고 들이미니 질겁을 하고 도망간다.

2층에 우리 밖에 없기 망정이지 엄청 미안할 뻔 했다. 터키 빵은 이집트 빵보다 한 술 더 떠서 두 사람은 깔고 앉게 생겼다. 이걸 들고 사진을 찍은 후 뜯어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블루모스크와 성 소피아 성당을 보았다. 밤이 늦어 안쪽은 볼 수 없고 조명발을 받은 겉모습만 보고 사진을 찍은 후 호텔로 갔다. 나는 작년에 동생들과 다 본 것이라 별 미련은 없었다. 이인규씨는 이번에 터키에 와서 점만 찍고 가니 조만간 다시 오라고 당부한다.

 

너구리 잡는 타쉬켄트 공항

오전 11시 반에 이스탄불 아타 투르크공항을 출발하여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 공항에 도착하니 어둠이 깔렸다. 4시간 밖에 안 걸리지만 4시간이 빨라진 탓이다. 비행기에서 내려 버스로 가는데 다른 사람들을 따라가니 한 남자가

코리아? 코리아? 서울?” 하며 다른 버스를 타라고 한다. 버스를 타며 보니 버스에 'TRANSFER' 라고 쓰여 있다.

환승하는 건물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 환승 공항 청사로 들어오니 담배 냄새가 진동한다. 금연이라고 벽 위에 쓰여 있기는 한데 잘 보이지도 않고 지키지도 않는다. 한 회원이 공항 직원을 불러 담배좀 못 피우게 할 수 없냐고 물으니 안 된단다. 여기서 4시간 갇혀 있을 생각을 하니 끔찍하다. 이건 완전 너구리 잡게 생겼다.

화장실에 가 세수도 하고 찍은 사진 정리도 하고 별 짓을 다해도 시간이 안 간다. 면세점도 구멍가게처럼 작은 가게 하나에 물건도 별로 없다.

속수무책으로 앉아 있으려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두통약을 먹으려고 배낭을 뒤져보니 약이 없다. 큰 짐에 넣었나보다. 내가 약을 찾자 배복순씨가 마침 두통약이 있다고 준다. 약을 먹고 의자에 누워있으니 조금 가라앉는다.

4시간의 긴 기다림 끝에 비행기에 오르니 자리가 많다. 모두 흩어져 세 자리씩 차지하고 누웠다.

자리에 누워 가만히 생각하니 이번 여행은 인간의 최고 걸작품과 신의 최고 걸작품을 모두 본 느낌이다. 흑사막에서 본 끝없는 구릉들과 백사막에서 본 하얀 설원이 눈에 삼삼하다. 사하라는 천의 얼굴, 만의 얼굴을 가진 마법사다. 다음에 또 사하라를 만난다면 사하라는 내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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