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2009. 5. 15. 중국 삼청산, 황산

아~ 네모네! 2012. 10. 15. 16:08

 

 

 

 

 

 

 

 

 

 

 

 

 

 

 

 

 

 

 

 

비래인(飛來人)

 

기간 : 2009521~ 525

장소 : 중국 강서성 삼청산, 안휘성 황산

황산이라고 하면 우리나라의 설악산과 같다는 소리를 들어 꼭 가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번에 덤으로 삼청산까지 간다는 바람에 동생까지 달고 무조건 따라 나섰다.

황산은 199012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자연유산으로 등록된 별 다섯 개짜리 산이다. 중국의 고대 시인들은 황산을 보고나면 그 어떤 산도 눈에 차지 않는다고 칭송했다고 한다.

삼청산은 20087월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으로 등록되었으며 1600여년의 역사를 가진 도교의 명산이라고 한다. 주요 봉우리는 옥경, 옥허, 옥화봉인데 세 봉우리가 마치 도교의 옥청, 삼청, 태청이라는 신선과 같다고 하여 삼청산이라고 했다고 한다.

중국에는 5악이 있는데 동악-산동성의 태산(1524m), 서악-성서성의 화산(1997m), 중악-하남성의 숭산(1440m), 남악-호남성의 형산(1290m), 북악-산서성의 항산(2017m)이다. 삼청산은 5악에 들지는 않지만 삼청산을 보고 나면 5악이 눈에 안 들어온다고 한다. 그래서 소동파는 중국의 5악을 한 번에 보려면 삼청산에 가보라고 했단다.

 

비행기에서 내리기도 힘드네.

항주 가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모든 좌석이 매진되어 콩나물시루같이 빽빽이 차서 항주로 출발했다. 3시간 정도는 식은 죽 먹기라 식사 한 번하고 커피 한 잔 마시니 곧 절강성의 성도인 항주 공항에 내린다.

착륙까지는 수월했는데 비행기에서 내려주지를 않는다. 기내 방송에서 요새 신종 인플루엔자 때문에 검역소 직원이 직접 기내에 들어와 체온 측정을 하니 기다리라고 한다. 한참을 기다리니 흰 마스크를 하고 가운을 입은 검역소 직원이 들어와 권총 같은 걸 머리에 들이댄다. 이마에 대고 체온 측정을 한다는 것이다.

그 많은 사람을 하려니 시간이 마냥 길어진다. 그런데 한참 하다가 다시 기내 방송이 나온다. 기내의 온도가 너무 높아 모두 체온이 높게 나오는 바람에 에어컨을 켜고 실내온도를 낮추고 다시 한단다. 이러다가 비행기에서 내리기나 하려나 모르겠다.

며칠 전 한국에서 온 중국 사람도 내리지 못하고 한국으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한 명이라도 열나는 사람이 있으면 황산은커녕 중국 땅에 발도 못 디뎌보고 한국으로 돌아갈 판이다. 다행히도 열나는 사람이 없었는지 비행기 문이 열리고 공항 청사로 들어갔다. 일단 입국은 성공이다.

출구로 나오는데 한 떼의 중국 소녀들이 한글로 무슨 이름을 쓴 종이들을 들고는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친다. 뭐라고 썼나 하고 쳐다보니 창민, 진원, 조권, 2AM 슬옹 사랑합니다, 등 등 나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을 들고 안쪽에서 그 사람들이 보였는지 괴성을 지르며 환호한다. 어찌됐든 우리나라 사람에게 이토록 열광하는 중국 소녀들을 보니 기분이 좋고 한류 바람이 거세게 불어 중국 돈이나 많이 벌어들였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밖으로 나오니 현지 가이드 아가씨가 일중산악회라고 쓴 종이를 들고 우리를 맞이한다. 주차장에 있는 버스들이 작아 보여 옆의 사람에게

왜 이렇게 버스가 작냐?” 했더니 앞서 가다말고 돌아보며

걱정 마세요. 우리 버스가 젤로 커요.” 한다.

과연 조금 더 가니 대형 버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대장님이 그토록 칭찬하더니 과연 눈치 빠르고 싹싹한 아가씨라는 생각이 든다.

버스에 오르니 가이드가 자기 이름은 신순복이며 평산 신 씨에 순할 ’, ‘자라고 소개를 한다. 대장님은 신순복씨는 실전에 강하다고 하며 천리마를 얻은 듯 든든하다고 극찬을 한다. 보기에는 배짝 마르고 체구도 작아 무슨 힘을 쓰랴 싶은데 하여튼 기대해 봐야겠다.

중국에서는 외국인이 가이드를 못 하기 때문에 조선족이 주로 한국 관광객 가이드를 한단다. 신순복씨도 고향은 길림성인데 황산에 살며 가이드를 한다고 하였다. 나는 황산에 산다고 하여 산 속에 사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고 황산이란 도시가 있다.

강서성으로 이동해 중국식으로 저녁을 먹었는데 이 날이 마침 전창애씨 생일이라 케잌을 놓고 생일 축하 파티를 했다. 중국 케잌은 어찌나 큰지 무슨 북을 가져 온 줄 알았다. 전창애씨는 생일 선물로 이번 여행에 왔다고 하며 엄청 즐거워한다. 전창애씨 덕에 맥주에 약주까지 마시며 변사또”(함없이 랑하며 만나자.)를 외쳤다.

저녁까지 잘 먹고 수운호텔에 들어오니 욕실 벽에 웬 발이 쳐있다. 욕실 한 쪽 면이 온통 유리로 되어있고 침대가 있는 방에서 발을 올리고 내리게 되어있다. 샤워하며 누드쇼 할 일 있나 싶고 혹시 여기가 러브호텔인가 싶기도 하다. 남이야 러브를 하건 사랑을 하건 우리는 내일을 위해 일찌감치 꿈나라로 향했다.

 

에고~ 하루 만에 토끼눈 됐네.

아침에 일어나 베란다 문을 여니 물소리가 졸졸 난다. 밖을 내다보니 우리 호텔 뒤가 바로 산이고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다. 냇물을 보고 있노라니 발 빠른 우리 회원들이 벌써 나와 냇가를 걷고 있다.

7시에 호텔을 나서 금사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며 바라보니 곳곳에 두견화가 피어 온 산이 희끗희끗하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대장님의 설명을 듣고 산행을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진달래를 두견화라고 하는데 여기 두견화는 만병초 비슷하게 생겼다. 꽃송이가 어찌나 크고 탐스러운지 어른 주먹만 하다. 색깔은 흰색에서 분홍색까지 다양한데 그 색이 어찌나 예쁜지 새 색시 얼굴에 떠오르는 홍조 같다.

거대한 코브라를 닮은 128m 높이의 거망출산과 또아리 모양의 머리를 한 동방여신을 보고 서해안 길로 들어섰다. 산속에 웬 서해안인가 했더니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듯한 풍경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서해안 길은 그야말로 깎아지른 절벽에 매달린 길이다. 건곤로(하늘 , , )라는 말 그대로 하늘과 땅 사이에 매달린 길을 걷다보니 나도 모르게 신의 경지에 들어선 듯하다.

삼청산 정상 옥경봉(1817m)에 올라 사진을 찍고 하산을 시작했다. 2시까지 수운호텔에 가야 점심을 먹을 수 있다고 하여 끝없는 시멘트 길을 부리나케 내려오려니 발에서 불이 난다. 여기 저기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내려와보니 6시간이나 걸었다.

밥 굶기고 잠 안 재우는 건 참아도 구경 안 시켜주는 건 못 참는 대장님 성격을 아는지라 박사장님과 신순복씨는 최대한 볼 수 있는 건 다 보여 주려고 노력한다. 사실 나도 밥은 간식으로 때우면 되고 잠은 차에서 자면 되니 구경을 많이 하는 게 좋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지만 식후에는 구경 못 할 판이니 굶고라도 해야 한다.

2시가 넘어 수운호텔에 내려와 점심을 먹고 안휘성의 황산 시로 향했다. 황산 시는 둔계(屯溪)라고도 하는데 옛날에 이곳의 주민인 식인족(산월족)을 토벌하기 위해 만 명이 넘는 군대가 주둔했었다고 한다. 가는 길에 신순복씨에게 노래를 하라고 하니 황포돛대를 부른다. 얼굴만 예쁜 줄 알았더니 목소리도 곱고 노래도 가수 뺨치게 잘 한다. 안휘성은 중국의 23개 성 중에서 두 번째로 작은 성이라는데 성도는 포청천의 고향인 합비라고 한다.

황산 시에 도착하여 이 날은 환갑축하 파티를 위해 박사장님이 한 턱 쏜다고 하여 전통 공연을 보는 식당으로 갔다. 그런데 좋은 자리는 이미 다 차고 스피커 옆 자리에 앉으란다. 그곳은 소리가 커서 귀청이 찢어질 지경이라 대장님이 뒤쪽의 가운데 자리로 달라고 했더니 안 된단다. 격분한 대장님이 그러면 다른데 가서 먹는다고 우리를 몰고 우르르 나오니 다시 들어오라고 하며 뒷자리로 옮겨준다. 대장님도 하도 해외여행 다니다 보니 그곳 사람들 다루는 솜씨가 수준급이다.

이날도 북통만한 케잌을 앞에 놓고 올해 환갑인 안순자, 박영희, 이현숙을 축하하는 파티를 벌였다. 환갑까지 건강하게 산에 다니는 것도 감사한데 이렇게 축하 파티까지 받고 보니 내가 참 복도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산에 갈 때마다 애인을 만나는 기분이다. 사람은 나를 섭섭하게 하는 때도 있지만 산은 나를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내가 즐거울 때는 같이 즐거워해주고 내가 슬플 때는 나를 위로해준다. 머리 골치가 아플 때는 세상사 잠깐이라고 잠시만 참으라고 한다. 오래 못 보면 보고 싶고 소금에 절인 배추같이 풀이 죽다가도 산에 가면 물 먹은 배추같이 파랗게 살아난다. 이런 애인을 앞으로 얼마나 더 만날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환갑잔치까지 다 마치고 명청거리(명나라와 청나라 때 만들어진 상가 거리)를 보고 인력거까지 탄 후 발 맛사지를 받으러 갔다. 30명 가까운 사람들이 일시에 들이 닥치니 사람이 부족하여 다른 곳에 지원 요청을 했다. 남자 맛사지사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 남자 품귀현상이 나타나자 초년병까지 데려왔는지 남자에게 맛사지를 받은 사람들의 불평이 쏟아진다. 맛사지가 아니라 주무르기만 했다는 것이다. 나는 여자를 원했더니 아줌마가 들어왔는데 경락까지 배웠는지 관절 마디마디를 어찌나 시원하게 잘 하는지 맛사지를 받고 나니 하루의 피로가 싹 가신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호텔방에 와 거울을 보니 오른쪽 눈의 실핏줄이 터졌는지 토끼눈이 됐다. 이런 체력으로 어떻게 황산까지 마칠 수 있을 지 걱정이다. 이 날은 호텔에 남길 짐과 황산으로 올릴 짐을 분류한 후 12시가 넘어 잠자리에 들었다.

 

대장님 애간장 다 녹이네.

아침에 일어나니 비가 내린다. 동생이 짐 싼 걸 보니 도끼 빗에 롤 빗에 우산까지 넣었다. 다 빼라고 하고 짐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나도 무릎이 아픈데 동생은 더 하겠다 싶어 내가 어제 한 아대를 빌려주고 나는 새 아대를 했다.

호텔을 나오는데 모두들 무릎이 아픈지 계단에서 무릎을 내 놓고 김방자님에게 스프레이 치료를 받고 있다. 신순복씨는 대장님이 준 하늘색 티셔츠를 입고 입이 귀에 걸렸다. 우리가 봐도 참 잘 어울린다. 대장님은 어떻게 신순복씨 사이즈까지 기억하고 있다가 이렇게 딱 맞는 셔츠를 선물했는지 정말 눈썰미가 대단하다.

케이블카 입구까지 가는 길에 대장님이 우스개 소리를 시작한다. 한 부부가 낱말 맞추기 게임에 나갔단다. 화면에 천생연분이란 단어가 떠오르자

남편이 우리 둘 사이하니까

부인이 웬수했다.

그러니까 남편이 그게 아니고 네 글자했더니

평생 웬수하더란다.

부부란 무엇인가? 전생의 원수가 만났다고도 하고 애인들이 못 이룬 사랑을 이루기 위해 만났다고도 한다. 살아있을 때는 원수같이 으르렁거리다가도 한 편이 죽으면 다시 태어나도 그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그리워한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것이 부부사이다.

자광각 케이블카 앞에서 일부는 케이블카를 타고 가기로 하고 일부는 걸어서 천도봉까지 가기로 했다. 천도봉 가는 사람들 중 일부는 배낭을 맡기기로 했는데 배낭을 져줄 여자와 흥정을 하느라 한 시간은 허비했다. 포터비는 일일이 배낭마다 무게를 재서 무게와 거리에 따라 값을 매긴다. 옥병루까지 져주는데 일인당 3만원에 낙찰을 보았다. 나는 배낭 한 개도 힘들어 헉 헉 대는데 이 여자는 긴 대나무 끝에 네 개의 배낭을 매달고 잘도 간다. 얼마나 힘이 드는지 대나무를 계속 이쪽저쪽으로 옮겨 대며 땀을 비 오듯 쏟는다. 반산사를 지나니 어찌나 경사가 급한지 앞 사람의 엉덩이는커녕 뒤꿈치가 눈앞에 있다.

천도봉으로 오르는 길에는 계속 비가 오며 안개가 시야를 가린다. 어쩌다 구름이 조금 벗어지면 어마 어마한 절벽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진다. 천도봉이 다 와가도 안개가 안 걷히자 대장님은 안타까워 난간에 기대서서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자고 한다. 우리는 안개가 가려도 좋기만 하건만 대장님은 그 속의 절경을 아는지라 자꾸만 멈춰 선다. 그 놈의 안개가 걷힐 듯 걷힐 듯 하며 안 벗어지니 대장님 애간장이 다 녹는다. 결국 포기를 하고 천도봉(1810m)에 오르니 케이블카를 타고 온 신순복씨와 한 회원이 우리를 맞아준다.

천도봉 정상에서 사진을 찍는 순간에도 구름이 엉겼다 벗어졌다 순간순간 변한다. 천도봉에서 옥병루로 내려오는 도중 구름이 벗어지고 봉우리가 보일 때 마다 온 산에서 사람들이 탄성을 지른다. 저 아래 옥병루 가는 길에는 사람들이 많아 새카만 개미들이 줄 지어 이동하는 것 같다. 처음부터 홀딱 벗고 다 보여주는 것보다 조금씩 조금씩 애간장을 태우면서 보여주는 황산은 마치 첫날밤을 맞은 신부 같다.

구름이 걷힐 때마다 멈춰 서서 앞을 보랴 뒤를 보랴 사진 찍으랴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그저 보이는 게 없어야 부지런히 걷는다. 이럴 때는 그저 눈이 앞, , 옆에 모두 붙어 있지 않은 게 한스럽다.

곳곳에 있는 이정표에는 한자, 영어, 한글로 쓰여 있어 우리나라의 위상을 실감케 한다. 암벽 사이 좁은 계단 길을 정신없이 오르내리다보니 어느 덧 옥병루 건물이 나타난다. 옥병루 옆에는 영객송(迎客松)이란 소나무가 있는데 손님을 환영한다는 뜻의 이 소나무는 1500년 된 소나무라고 한다. 후에 보니 황산을 선전하는 그림마다 이 소나무가 나온다.

영객송 앞에서 사진을 찍고 옥병루 건물로 들어가니 케이블카를 타고 온 회원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점심은 중국식이었는데 늙은 호박 삶은 것이 맛있어 내가 계속 먹어대다가 멋쩍어서

늙은 호박이 늙은 호박만 찾네.” 하니 웃음바다가 된다.

점심을 먹고 우리의 숙소인 북해빈관까지 가야하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 혹시 일행을 잃어버리면 각자 알아서 찾아오라고 한다. 대장님이 북해빈관이라고 하면 이곳 사람들이 못 알아들으니 뭐라고 하느냐고 묻자 신순복씨가 베이하이라고 하란다. 내가 그거 외울 사람이면 길 잃어버리지도 않겠다고 하자 대장님도 그렇다고 웃는다.

가는 길에 수시로 구름이 열렸다 닫혔다 하니 그때마다 도처에서 아우성 소리가 들린다. 넋 놓고 가다가도 멀리서 환호성이 들리면 멈춰 서서 사방을 둘러본다. 그러면 동양화 속에 내가 들어가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핸드폰 바위, 토끼와 거북이 바위를 지나 오어봉(자라 , 고기 )에 오르니 또 운무가 시야를 가린다. 대장님은 또 속이 타서 기다리자고 한다. 뒤로는 연화봉과 천도봉이 손에 잡힐 듯한데 앞은 깊은 바다 속 같이 운해에 덮여 있으니 대장님이 안타까워 기다리자고 할 밖에.

과연 조금 기다리니 앞이 열리기 시작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절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야말로 눈이 뒤집힐 지경이다. 바라보면 볼수록 그 속으로 내가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동생도 태어나서 이런 경치는 처음이라고 황산 오기 백 번 잘 했다고 감탄하니 듣는 순간 내 어깨가 으쓱으쓱 올라간다. 내가 만든 황산도 아닌데 왜 내 어깨가 올라가는지 모르겠다.

배부르도록 감상을 하고 오어봉을 내려와 가파른 계단 길을 오르니 광명정 정상이다. 광명정이라고 해서 정자가 있는 줄 알았더니 그냥 정()상이란 뜻이다. 광명정에는 둥근 공 모양의 시설이 얹힌 관측소가 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천도봉, 연화봉(1864m)을 보고 조금 전에 올랐던 오어봉을 보니 그 위에서는 안 보이던 자라 모양의 바위와 입 벌린 물고기 입이 실감 나게 보인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부지런히 발걸음을 재촉해 북해빈관에 도착하니 사방에 어둠이 깔린다. 곧장 식당으로 가 식사를 하고 발맛사지를 받았는데 여기는 맛사지사가 적어 두 팀으로 나누었다. 14명은 910분에 받고 12명은 1010분에 받았다. 맛사지를 받으며 중국 TV를 보니 한국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투신자살했다는 뉴스가 몇 번씩 나온다. 한국이 얼마나 충격에 휩싸였을까 걱정이 된다.

방에 와 내 발을 보니 하루 종일 고생한 발이 대견하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다. 주인 잘못 만난 내 발이 엄청 원망할 것 같다.

 

하늘에서 날아온 인간(飛來人)

일출을 보려고 440분에 호텔을 나섰다. 호텔 방에는 일출 때 입으라고 두꺼운 오리털 잠바가 두 개씩 있었지만 어째 꺼림칙하여 내 옷을 있는 대로 껴입었다. 아래 네 개, 위에 다섯 개를 껴입었더니 굴러갈 지경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출 보기 좋은 장소를 차지하려고 서둘러 사자봉으로 오른다. 일출 조망 장소는 곳곳에 있었는데 이왕이면 높은 데서 보려고 계속 올라가니 철근으로 만든 문이 가로 막는다. 자물쇠까지 채워져 있어 옆의 풀숲 길을 지나 바윗길로 기어 올라갔다. 평소 산행하던 실력으로 박영희님이 잘도 뚫고 나간다. 얼마를 올라가다가 다시 큰 길로 내려서 전망 바위로 올라가는데 그 사이 해가 뜰까봐 달음질 하듯 올라가려니 장딴지가 끊어질 지경이다.

가장 높은 바위 위에서 일출을 기다리는데 붉게 물든 구름 사이로 뿌연 햇살이 터져 나온다. 조금 있으니 진홍색의 눈썹 같은 해가 이마를 내민다. 허구한 날 보는 태양인데도 볼 때마다 새로운 감흥이 일어나는 것은 위치가 다르고 날씨가 다르고 내 마음이 다르기 때문인가? 하여튼 모든 것의 시작은 경이롭고 경건하다.

눈이 시도록 뜨는 태양을 바라보다가 북해빈관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그제야 올라오는 사람들도 있다. 내려가다가 문이 잠겨 되돌아오는 사람인 줄 알고 우리가 옆으로 가려고 하니 뒤에서 오던 외국인이 그냥 가라고 손짓을 한다. 따라 가보니 철근 한 개가 끊어져 있고 바깥쪽으로 휘어져 있다. 개구멍 없는 문은 없다더니 과연 철책 사이로 좁은 틈이 있다. 우리가 보고 있으니 외국인이 먼저 그 사이로 머리를 통과시키고 몸을 밀어 넣는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은 좁은 틈으로 희한하게 빠져 나가는 걸 보고 박수를 쳐주며 엄지손가락을 쳐드니 자기도 우스운지 겸연쩍게 웃는다. 우리도 그대로 개구멍을 통과하여 무사히 호텔로 돌아왔다.

방에 와 간단히 샤워를 하고 식사를 한 후 태평케이블카를 타러 갔다. 오늘은 서해대협곡을 보러간다기에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가 계곡에서 노는 줄 알았더니 케이블카는 타고 갔다가 그대로 올라온다고 한다. 이 날이 일요일이라 한 번 내려갔다가 다시 타려면 서너 시간씩 기다려야 한단다. 신순복씨가 그곳 관리인에게 사정하여 케이블카에서 내리지 않고 그냥 올라오기로 했다.

태평케이블카는 한 굽이 내려갈 때마다 위 아래로 흔들려 마치 바이킹을 탄 듯 요동친다. 그때마다 우리는 어린 아이처럼 환호성을 질러댔고 같이 탄 외국인은 우릴 보고 또 웃는다. 케이블카에서 보는 황산은 또 다른 비경을 선사했고 엷은 안개에 싸인 황산의 암봉은 신의 세계에 들어온 환상에 젖게 했다.

밑에 도착해 내리지 않고 다시 올라와 서해 대협곡으로 들어섰는데 말이 서해이지 깎아지른 절벽이 우뚝우뚝 솟아 마치 석림을 연상케 한다. 멀리 비래석도 보였는데 비래석은 바위 능선 위에 혼자 오도카니 앉아있다. 하늘에서 날아온 돌이라고 하여 날 , 를 써서 비래석(飛來石)이다.

바위 꼭대기에 뱀처럼 감겨있는 길을 이리 돌고 저리 돌아 협곡으로 내려가니 우리가 내려온 길이 하늘에 걸린 듯 아득하다. 우리가 저기서 내려왔다고 생각하니 우리도 하늘에서 날아온 인간 즉 비래인(飛來人)이란 생각이 든다.

가는 길에는 이쑤시개 바위, 고추 바위, 칼바위, 당나라 사신 바위, 마리아 바위 등도 있었는데 이쑤시개 바위는 너무 두꺼워 이빨이 잘 안 쑤셔질 것 같고, 고추 바위는 정력이 너무 센지 위로 치켜 올라갔다. 칼바위는 끝이 예리해 맞으면 즉사할 것 같고, 마리아 바위는 우리를 위해 끝없이 간구하는 간절한 모습이다. 당나라 사신 바위는 관모를 쓰고 고개를 다소곳이 숙인 모습인데 사신의 등을 쪼아대는 딱따구리가 하나 붙어있다.

기기묘묘한 형상의 바위들을 보느라 시간 가는 줄도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겠다. 신선이 걸었다는 보선교(步仙橋)는 수백 길 낭떠러지에 걸려있고 여기를 건너 아치형 다리를 건너면 천애의 절벽 위에 탁 트인 전망 바위가 나타난다.

여기서 나와 계속 오르면 누운 바위에 구름이 입혔다는 와석피운(臥石被雲)이 나타난다. 와석피운 앞 넓은 바위에 앉아 우리들이 걸어온 길을 바라보니 마치 꿈속에서 보는 듯 실 같이 가는 길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2시에 백운호텔에 점심 예약을 해 놓았다고 하여 부지런히 걸어 백운호텔에 도착하니 식당이 어딘 줄 모르겠다. 거기 직원에게 레스토랑이 어디냐고 물으니 멍 하니 쳐다본다. 그래서 손으로 밥 먹는 시늉을 했더니 저쪽으로 올라가라고 가르쳐준다. 그저 발음도 시원찮은 영어로 혓바닥 굴리는 것보다 바디랭귀지가 최고다.

점심 식사 후 다시 바위 능선 길을 가다가 군봉정 넓은 바위에서 30분간 휴식을 취했다. 30분 동안 쉰다고 하자 너도 나도 신을 벗고 맨발로 바위에 누웠다. 누워서 바라보는 황산은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고 인간과의 대화를 끊자 산이 말을 걸어온다. 온갖 새는 지저귀고 바람에 살랑대는 나뭇잎 소리는 사랑의 밀어처럼 속삭인다. 아무 소리도 없이 침묵에 잠겨 있는 무수한 산봉우리는 무언(無言)으로 가장 말을 해온다. 끝없이 이어지는 봉우리를 바라보고 있자니 물이 차오르듯 무언지 알지 못할 것이 가슴 가득 차오른다. 보면 볼수록 가슴이 점점 부풀어 오르고 터질 듯한 포만감에 온몸이 휘청거린다.

30분 동안 황산과 말 없는 대화를 나누다가 그 유명한 비래석으로 향했다. 비래석으로 가는 길은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밟혀죽게 생겼다. 거기다 비래석 바위로 올라서는 길은 좁디좁아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지경이니 위에서 내려오면 한참씩 기다렸다가 올라가야한다. 그래도 비래석을 세 번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지고 네 번 만지면 애인이 생긴다는 신순복씨 말에 비집고 들어가 세 번 만졌다. 내 나이 한 살만 젊었어도 네 번 만지련만 환갑잔치까지 한 마당에 애인은 도저히 감당이 안 될 것 같아 세 번만 만졌다.

비래석에서 쫓기듯 내려와 다시 광명정으로 왔다. 여기서 아침부터 설사에 시달린 한 회원이 박사장님과 곧장 북해빈관으로 가고 우리는 시신봉(始信峰)으로 향했다. 시신봉에 가기 전에 대장님이 잠시 할 말이 있다고 한다. 무슨 소린가 해서 모두 앉으니 시신봉 가서 멋진 것 보여주면 만원씩 내란다. 도대체 얼마나 멋있게 저러나 하며 수락을 하고 다시 출발했다. 그런데 시신봉이라고 해서 시체라도 걸려있나 했더니 그게 아니고 믿음이 시작된 바위란다.

명나라 때 여행가이자 지리학자인 서하객이 황산이 하도 좋다고 하여 기대에 부풀어 황산에 왔는데 와 보니 별 볼일 없어 실망하면서 시신봉까지 왔단다. 그런데 시신봉에 올라보니 과연 그 명성에 걸맞는 기막힌 절경이 나타났다. 이 절경에 탄복한 그는 여기서부터 그 소문에 대한 믿음이 시작되었다고 하여 시신봉(처음, 믿을, 봉우리)이라고 이름 붙였다.

시신봉 옆에서 그 너머로 가니 관음봉이 멀리 나타난다. 왼쪽 끝에 관음상이 있고 그 앞에 동자승 세 명이 관음보살을 바라보는 모양인데 관음보살이 식음을 전폐하고 도를 닦았는지 너무 말라 곧 쓰러질 것 같다.

관음봉에 넋을 빼앗겨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대장님 소리가 들린다. 그 쪽을 바라보니 송곳처럼 뾰쪽한 수 십 미터 바위 위에 서서 원맨쇼를 하신다. 우리는 바라보기만 해도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아 빨리 내려오라고 소리쳤다. 김방자님은 이거 심장 떨려 못 보겠다고 십 년 감수 했으니 만원 씩 내기는커녕 만원씩 받아야겠다고 한다.

이렇게 우리 애간장을 다 녹인 대장님은 한참 후 내려와 신순복씨에게 먼저 올라가라고 하더니 만원씩 내란다. 다 걷은 후 신순복씨를 오라고 하여 그동안 수고했다고 15만원을 건넨다. 아니 묘기대행진을 벌여 15만원 팁 주는 것도 좋지만 이제 몸 생각해서 그냥 걷었으면 좋겠다.

여기서 다시 올라와 시신봉에 오르니 벌써 날이 저물어온다. 시신봉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서하객의 심정을 알만하고, 천 길 낭떠러지 위에서 멀리 바다를 바라보는 원숭이상은 자연의 순리를 생각케 한다.

어두워오는 길을 따라 북해빈관 쪽으로 오며 박사장님은 해 있을 때 호텔에 들어가 보는 게 소원이라더니 오늘 소원 성취했다고 말하는데 이 말을 마치자마자 박사장님이 나타난다. 아니 모처럼 소원 성취했는데 왜 왔냐고 했더니 더 보여줄 것이 있어 마중 나왔단다. 비단결 같은 그 마음씨가 한 없이 고맙다.

내 동생 혜숙이는 하루 네 시간 이상 걸은 일이 없는데 언니 잘못 만나 연 사흘을 밤이 되도록 걸었으니 계단길이 나올 때마다 옆으로 게걸음을 치며 쩔쩔맨다.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따라다니는 모습을 보니 내가 생각해도 신기하고 본인도 놀랐단다. 다음에는 서서히 강도를 높여 더 높은 곳까지 시도해봐야겠다.

북해빈관에 돌아와 식사를 하고 발맛사지를 신청한 사람들은 맛사지를 받으러 가고 다른 사람들은 방에 가 쉬었다. 샤워를 하고 자리에 누워있는데 밖에서 찾는다. 웬일인가 나가보니 안순자님 방에서 쫑파티를 하잔다. 그 방에 가보니 맥주에 소주에 안주까지 잘 차려놨다.

화기애애한 가운데 그동안의 산행담을 말하는데 안순자님과 박영희님은 10년 전에 왔을 때보다 열 배는 더 봤다고 흡족해 한다. 송중섭님은 그랜드캐년 갔을 때 보는 순간 눈물이 났었는데 황산은 몇 배 더 좋다고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감격한다. 다들 몸도 마음도 흡족하여 먹고 마시며 놀다가 각자 방으로 흩어졌다.

 

일중 특공대

아침에 일어나니 또 비가 내린다. 황산 오는 첫날도 비가 오더니 가는 우리를 환송하느라 또 비가 내리나보다. 원래는 오늘 아침에 일출을 보려고 했었는데 대장님의 탁월한 선견지명으로 어제 보기를 정말 잘 했다.

아침 식사 후 비옷을 입고 보따리를 하나씩 옆에 차고 호텔을 나서려니 마치 피난 가는 사람들 같다. 운곡케이블카를 타고 다시 한 번 황산의 운해를 감상하며 밑으로 내려와 황산 입구에서 사진을 찍었다.

수운호텔에 돌아와 맡겼던 짐을 찾아 다시 정리하고 버스에 오르는데 어찌나 동작이 빠르고 일사분란한지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일중산악회는 앞으로 일중특공대라고 해야겠다.

항주로 향하는 버스에서 신순복씨는 다시 항주에 대한 설명을 한다. 항주의 어머니강은 전단강이고 그 옆에 있는 유카탑은 유카라는 소녀의 이름을 딴 탑이라고 한다. 전단강은 해마다 대홍수가 났는데 한 해에는 유카의 아버지가 물에 휩쓸려 용왕님께 잡혀갔단다. 유카는 아버지를 돌려달라고 전단강에 돌을 던졌는데 용왕이 항복하고 너에게 졌다고 하며 물을 줄여주었단다.

유카탑 옆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공항으로 향하며 신순복씨가 이별의 노래를 하고 박사장님은 산악인의 본적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산악인의 본적은 프랑스 샤모니인데 여기서 최초로 몽블랑 원정에 나섰다고 한다. 산악인의 현주소는 히말라야이고 한국 산악인의 본적은 인수봉이란다.

에베레스트를 초등한 사람은 뉴질랜드 사람 힐러리인데 그는 영국 원정대가 뉴질랜드 마운틴 쿡에서 훈련할 때 가이드였다고 한다. 힐러리의 재능을 알아본 영국 산악인들이 그를 영국 원정대에 편입시켜 에베레스트 원정에 나섰다. 하지만 그 당시 뉴질랜드는 영국의 식민지라 세계 초등을 하고도 뉴질랜드 국기를 들고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먼저 뉴질랜드 국기를 눈 속에 묻고 그 후 영국 기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뉴질랜드 사람들은 그 후 다시 등정하여 뉴질랜드 깃발을 찾아냈고 그의 화상을 화폐에 찍었다. 산 사람이 화폐에 올려진 것은 힐러리가 최초라고 한다. 이 소리를 들으니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을 하고도 일장기를 가슴에 달 수 밖에 없었던 손기정 선수의 심정이 떠오른다.

한 인간의 영예는 그 나라의 영예가 있을 때 가능하다.

 

오악을 돌고 나면 볼 산이 없고 황산에서 돌아오고 나면 오악을 볼 필요가 없다

이는 30여 년간 중국 각지를 돌아본 명나라 서하객이 남긴 말이다. 이 황산을 쥐구멍까지 샅샅이 돌아보고 왔으니 이제 어디를 봐도 눈에 안 찰 것 같다. 갈수록 눈높이가 높아져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천정부지로 올라갔으니 앞으로가 걱정이다. 이제 눈높이를 팍 낮춰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마음의 눈으로 자연을 바라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