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2009. 3. 12. 네팔 히말라야

아~ 네모네! 2012. 10. 14. 21:44

 

 

 

 

 

 

 

 

 

 

 

 

 

 

 

 

 

 

 

 

눈의 거처 히말라야

 

기간 : 2009312~ 326

장소 : 네팔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칼라파타르

 

히말라야는 고대 산스크리트(범어)의 눈을 뜻하는 히마(hima)와 거처를 뜻하는 알라야(alaya)라는 말이 합쳐진 말이다. 히말라야는 몇 년 전 인도 가르왈 지방으로 한 번 가봤고, 재작년 경비행기 속에서 본 후 이번이 세 번째다. 이번에는 이름도 거창하게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와 칼라파타르에 오르기로 했다.

 

312일 만두를 카트 했나? (카트만두)

혼자 들기도 힘든 카고백을 남편 차에 싣고 아침 5시 반에 집을 나섰다. 이제 달러값 비싸 해외여행도 못 가겠다고 하니 남편이 집에 있는 금 팔아서 가란다. 집에 금도 별로 없지만 말만이라도 그렇게 해주니 고맙다. 공항에 도착하니 같이 가는 일행들이 커다란 카고백을 쌓아 놓고 기다리고 있다. 평소 같이 산에 다니는 양숙씨와 같이 앉아 기다리는데 연옥씨 한테서 문자가 온다.

조케타 크 크 크

애교스런 문자를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번진다.

수속 절차를 마치고 비행기에 오르니 사람이 별로 없어 널널하다. 네 자리 차지하고 이리 누웠다 저리 누웠다 하려니 집 네 개 지녔다고 종부세 내라고 할까봐 겁난다. 양숙씨는 스튜어디스에게 고추장 달라 참기름 달라 땅콩 좀 더 달라 하며 비위도 좋게 말도 잘한다. 가만히 보니 간식 준비, 부식준비는 비행기 안에서 다 하는 것 같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더니 천 냥은 못 되도 고추장을 열두 개나 얻었다. 나는 쥐뿔도 없는 주제에 입이 안 떨어져 한 개도 못 얻었다. 이럴 때 한 열 댓 시간 갔으면 좋으련만 일곱 시간 반 정도 가니 다 왔다고 내리란다.

카트만두 공항에 내리니 산행 가이드 왕추와 카트만두 가이드 피탐바가 마중 나왔다. 왕추는 왕초라고 외우고 피탐바는 피 터진 잠바라고 외웠다. 둘 다 대추 방망이 같이 단단하게 생긴 게 믿음이 간다.

타멜 시장을 둘러보고 정원가든에 들러 삼겹살로 영양 보충을 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카트만두는 재작년에도 왔었는데 그제나 이제나 만두를 카트해 속이 다 쏟아져 나온 듯 인파와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뒤범벅이 되어 소용돌이 치고 있다.

 

313일 또 사탕 주는 거야? (또 카트만두)

아침 첫 비행기로 루클라까지 간다고 아침도 못 먹고 도시락 한 개씩 배급 받아 들고는 국내선 공항으로 갔다. 엑스레이 검사를 하는데 보온병도 통과 물도 통과 모두 통과하니 양숙씨가

도대체 뭘 잡는 거야 폭탄만 잡나?” 한다.

공항 의자에 앉아 도시락을 먹으려니 안으로 들어간다고 빨리 오라고 하여 먹다말고 들고 뛰었다.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데 사람이라 어쩔 수 없이 따라갔다.

또 무슨 검사를 하는지 몇 번씩 몸 검사하고 배낭 검사하고 골백번을 하고는 버스에 올라 비행기로 향했다. 비행기에 오르니 스튜어디스가 사탕과 솜이 든 바구니를 들고 온다. 사탕만 받아 입에 넣고 빨고 있으려니 비행기가 이륙한다. 소리가 어찌나 큰지 솜 덩어리를 받을 껄 하고 후회한다. 냄새도 어찌나 심한지 양숙씨는 귀마개는 안 해도 코마개는 해야겠다고 농담을 한다.

30분 가니 설산도 보이고 밑으로 꽃도 보이고 하여 곧 내릴 줄 알았더니 갑자기 비행기 앞대가리가 올라가고 방향을 되돌린다. 웬 일인가 하고 있는데 스튜어디스가 앞으로 가 기장에게 말을 듣더니 왕추가 돌아다니며 루클라에 바람이 심해 카트만두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결국 매연만 잔뜩 마시고 귀가 멍멍하도록 소음 공해에 시달리다가 카트만두 공항에 다시 내렸다.

내리며 한 회원이 스튜어디스에게 묻는다.

아가씨 이따가 다시 타면 또 사탕 주는 거야?”

아가씨는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 웃기만 한다.

공항 청사로 돌아오니 우리 팀의 뒷사람들은 청사 밖으로 나가보지도 못 하고 청사 안에서 여태 기다리고 있다. 몇 시간을 청사 안에서 기다리려니 화장실만 들락거린다. 공항 화장실은 대변용 화장실 두 개만 문이 있고 소변용은 맨 바닥에 그냥 엉덩이 까고 앉아 누게 되어있다. 화장지도 물론 없고 물도 잘 안 나와 냄새는 진동하는데 나프탈렌을 한 사발씩 쏟아놓아 골 때리게 생겼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예티 항공인데 예티란 설인이라고 한다. 그러자 봉화 출신의 김선생님이 산에서 예티 남자를 만나면 위로 도망가고 예티 여자를 만나면 아래로 도망가야 한단다. 왜 그런가 하고 쳐다보니 남자 예티는 가운데 다리가 무거워 잘 올라가지 못하고 여자 예티는 가슴이 커서 앞이 잘 안보여 내려가지를 못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농담 따먹기를 하며 시간 죽이기를 하고 있다가 12시가 되어 오늘 비행기는 못 뜬다고 결정이 나자 다들 풀이 죽어 초상집 분위기로 변해 버스를 타고 하이앗트 호텔로 되돌아 왔다.

짐을 다시 풀고 잠시 쉬다가 시내로 나와 치킨과 비프스테이크로 점심을 먹고 힌두교 성지이며 화장터가 있는 파슈파티나트 사원을 보러 갔다. 이 사원은 시바신에게 헌납된 것인데 파슈파티나트는 시바의 많은 이름 중 하나라고 한다. 파슈는 생명체를 뜻하고 파티는 존엄한 존재를 뜻한다고 한다.

네팔 사람들은 사람이 일몰 전에 죽으면 그날 바로 화장을 하고 일몰 후 죽으면 다음 날 화장 한다고 한다. 관을 쓰지 않고 대나무로 만든 들것에 시신을 싣고 와 갠지스강의 지류인 이곳 바그마티강에서 발을 씻기고 화장한다. 살인자나 강도는 매장을 하는데 이것은 다시는 사람으로 태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5 원소설을 믿는데 만물은 하늘 땅 물 불 공기 이렇게 다섯 가지 원소로 되었고 죽으면 5 원소로 다시 돌려보낸다고 한다. 라마교의 경전이 적힌 깃발도 이 5 원소를 뜻하는 다섯 가지 색으로 되어있다.

2년 전에 왔을 때는 화장하는 시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오늘은 발을 씻기려고 발을 내놓은 채 강가에 눕혀 놓은 사람, 화장을 기다리느라 장작 옆에 눕혀 놓은 사람, 지금 막 엠블런스에서 내리는 사람, 한창 타고 있는 사람, 해서 바글바글하고 연기가 자욱하다.

자세히 보고 있으려니 발을 씻긴 후 옷을 벗기고 붉은 천으로 덮은 후 무슨 물감 같은 가루를 뿌리고 장작더미에 올린다. 입에다 불에 잘 타는 버터 같은 것을 채우고 아들이 불을 들고 시신을 세 바퀴 돈 후에 먼저 입에 불을 붙이고 다음에 장작 밑에 불을 붙인다. 다 타면 재를 바그마티강에 버리고 아들은 3일 동안 경전을 읽으며 명복을 빈 후 집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화장터에서 나와 에베레스트라는 한식당에 들러 불고기를 먹었는데 금방 사람 타는 걸 보고 와서 좀 찜찜했지만 곧 잊고 맛있게 먹었다. 식사 후 카운터 쪽으로 가보니 네팔 국기와 한국 국기가 그려진 아래 한국과 네팔의 영원한 우정이라고 쓰고 체어맨 이인정이라고 쓰인 깃발이 붙어있다. 이분이 네팔 명예 대사이고 한국등산학교 교장이었던 분이 아닌가 하니 다들 잘 모르겠다고 한다.

호텔로 돌아와 내일은 비행기가 잘 뜨도록 기도 많이 하자고 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314일 왕추를 강추한다. (또 또 카트만두)

아침에 화장실에서 물을 내리니 물이 멈추지 않는다. 룸서비스 번호를 누르니 굿모닝 미스 리하는 게 방 번호와 숙박객 이름이 바로 뜨나보다. 잠시 후 두 남자가 오더니 금방 고치고 간다.

오늘은 좀 늦게 출발하기로 해서 아침에 수영장 쪽으로 한 바퀴 산책을 했다. 호텔에서 제대로 된 아침 식사를 하고 다시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 청사에 들어가니 어제 왔던 라마승이 또 나왔다. 다들 반갑다고 인사를 하며 같이 사진도 찍고 이메일 주소도 주고받는다.

청사에는 밑이 축 늘어진 바지를 입은 아가씨가 왔다 갔다 했는데 다들 똥 싼 바지 입은 아기 같다고 똥 싼 바지라고 부르며 웃는다. 비행기를 배정 받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돌아다니는 왕추를 보니 미안하기도 하도 고맙기도 하다. 누가 네팔 트래킹 간다고 하면 왕추를 강추(강력 추천) 하고 싶다.

이 날도 몇 번의 몸수색을 거친 후 비행기에 탔다. 이번에는 사탕도 받고 솜뭉치로 귀도 틀어막고 한참을 갔다. 어제 보다 더 많이 가니 집도 보이고 흰 꽃도 더 만발했다. 오늘은 정말 루클라로 가나보다 했더니 웬걸? 또 스튜어디스가 앞으로 가더니 이번에는 안개 때문에 내리지 못하고 카트만두로 되돌아간다고 한다.

우리는 맥이 풀려 다시 카트만두 공항으로 돌아와 청사 밖으로 나오니 뒤 팀은 어제는 비행기에 타보지도 못하고 맨땅에서 기다렸는데 오늘은 비행기에 탔다가 떠보지도 못하고 내렸다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비행기라도 타고 가봤으니 자기들 보다는 낫다고 한다.

다시 호텔로 돌아와 점심을 먹으러 갔다. 이 날은 두 팀으로 나누어 한식당과 양식당으로 갔다. 식사 후 불교 성지인 스와이암부낫 사원을 보러갔는데 스와이암부는 스스로 존재하는.’을 뜻한다. 옛날에 이 지역은 큰 호수였는데 이 호수에서 찬란한 연꽃이 스스로 나타났다고 한다. 스와이암부낫 사원은 원숭이가 많아 원숭이 사원이라고도 하는데 무슨 축제 기간이라 그런지 원숭이보다 사람이 훨씬 많았다.

사원의 큰 탑에는 사람 얼굴 모양이 사면으로 그려져 있었는데 미간에 그려진 눈은 마음의 눈이고 입 대신 물음표를 한 것은 남에게 묻지 말고 자신에게 물으라는 뜻이라고 한다. 귀와 입이 없는 것은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오직 혼자 힘으로 진리를 깨우치라는 것이란다.

이곳에는 연못 속에 부처님 상이 있었는데 그 좌대에 동전을 골인 시키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동전을 던지는데 양숙씨는 골인이고 나는 노 골이라 내일도 루클라에 못 갈까봐 은근히 걱정이 된다.

여기서 내려와 꾸마리 사원으로 갔다. 꾸마리는 살아있는 여신인데 시험을 보아 뽑는다고 한다. 꾸마리가 되려면 석가모니 집안사람으로 카트만두에서 태어나야하고 자연분만을 해야 한다. 한 군데도 다친 곳이나 상처가 있으면 안 되고 깜깜한 방에 넣었을 때 울거나 웃으면 실격이라고 한다. 4~6세 여자 아이로 뽑는데 초경이 시작되면 다시 집으로 보내고 새 꾸마리를 뽑는다고 한다. 2년 전에 본 꾸마리는 예쁘고 당차게 생긴 아이였는데 지금은 네 살짜리 아기로 다시 뽑았다고 한다.

꾸마리 사원에 가니 문이 잠겼다. 피탐바가 웬 일이냐고 그 앞에 있는 사람에게 물으니 열흘 전 도둑이 들어 개방하지 않는다고 한다. 새 꾸마리는 못 보고 달발광장으로 갔는데 Durbar는 왕궁이란 뜻이다. 광장에서 원숭이 신상, 시바 신상 등을 본 후 다시 에베레스트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왔다. 피탐바에게 이인정을 아느냐고 했더니 자기 여행사 사장님 양아버지라고 한다.

 

315일 팍~ 뒹굴라고? (팍딩: 2600m)

이날은 다시 첫 비행기를 탄다고 또 도시락을 싸들고 비행장으로 갔다. 이 날도 엑스레이 검사, 몸수색 검사를 마치고 비행기에 올랐다. ‘이번에는 제발 가다오하고 마음속으로 빌며 이번에 또 스튜어디스가 앞으로 가면 절대 못 가게 발로 막아야 한다고 농담을 하며 이륙했다.

이번에도 산에 핀 하얀 꽃을 보며 또 돌아갈까 봐 조마조마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고도를 점점 낮춘다. 그러더니 드디어 하고 착륙을 한다. 모두들 신이 나서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질렀다. 루크라 공항에 내리니 어찌나 좁은지 활주로는 50m도 안 될 것 같고 경비행기 네 대 이상은 세울 수도 없는 좁디좁은 공항이다. 이러니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옆으로 쳐 박히게 생겼다.

비행기에서 나오는 곳에는 포터며 셀파들이 철조망 안쪽에 새카맣게 붙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들도 이틀씩이나 나와 우리가 오나 기다렸다고 한다.

비행장 옆에 있는 롯지 마당에 카고백을 갖다 놓고 차를 마시며 다음 비행기를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다. 우리가 통장님이라고 별명을 붙인 꽁지머리 아저씨가 가서 알아보더니 카트만두 공항에 안개가 심해 여기 있는 비행기들이 가지를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쪽에서 오라고 연락이 와야 여기 비행기가 가서 다음 사람들을 데리고 온다니 속수무책으로 기다릴 수밖에

비행기 소리가 날 때마다 온다고 뛰어나가니 그건 경비행기 소리가 아니고 헬기라며 다른 곳에 가는 거라고 한다. 이거 이러다 오늘 또 못 오면 우리끼리 가야하나 기다려야하나 걱정을 하는데 드디어 카트만두 공항에서 명령이 떨어졌다며 이곳 비행기가 이륙을 한다. 우리는 담장에 올라가 환호성을 지르며 빨리 가서 데려오라고 빌었다.

결국 2시간 정도나 지나서 우리의 후발대가 도착했다. 봉화 아저씨는 얼마나 속을 태웠는지 도착하여 한참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울었다. 다 큰 어른이 우는 걸 보니 안쓰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나중에 들으니 여기 오려고 다니던 직장도 때려치우고 6개월 전부터 준비했다고 하니 그럴 만도 하다.

전원이 다 도착하자 우리의 산행 셀파와 쿡 등을 소개하고 양숙씨와 나는 배낭 져줄 사람을 부탁했더니 왕추가 두 사람을 데리고 온다. 한 사람은 키도 크고 건장하게 생겼고 한 사람은 키도 작고 약하게 생겼다. 양숙씨가 먼저 큰 사람을 고르니 나는 자동으로 남은 사람을 차지했다. 큰 사람은 카르마라고 했고, 작은 사람은 칸차라고 했다. 나는 속으로 카르마는 가르마’, 칸차는 칸이 있는 차이렇게 외웠다.

대전에서 온 한선생님은 카르마에게 네 이름은 이제부터 마당쇠다. 칸차에게는 네 이름은 돌쇠다. 이분들은 마님이다 하며 가르친다. 그 후로 한선생님이 마당쇠하면 곧 하고 달려온다. 셀파(sherpa)는 네팔의 한 종족이름인데 샤르(shar)는 동쪽이고 파(pa)는 사람 즉 동쪽에서 온 사람이란 뜻이다. 실제로 이들은 동부 티베트에 살다가 이주해 온 사람들이라고 한다.

칸차는 스물여덟 살인데 아들이 둘이라고 한다. 몇 살이냐고 하니 큰 아들은 8살 작은 아들은 6살인데 둘 다 학교 다닌다고 한다. 아니 도대체 몇 살에 결혼했길래 애가 그렇게 크냐고 했더니 스무 살에 결혼했단다. 얼굴은 어려 보여도 애 아빠라 그런지 제법 의젓하고 성실하다. 내가 60살이라고 하자 자기 엄마도 60, 아버지는 65살이라고 한다.

내가 자기 엄마와 나이가 같아 그런지 수시로 물 먹으라고 물병을 꺼내 열어주고 먹으면 얼른 닫아서 넣는다. 더워서 옷을 벗으면 얼른 받아 배낭에 넣고 마치 입의 혀처럼 군다. 이런 대접을 받다보니 내 나이 60에 이게 웬 호강인가 싶기도 하고 하루 10불에 이런 대접을 받으니 마님 되기는 식은 죽 먹기라는 생각도 든다.

루클라를 출발하여 조금 가다가 점심을 먹었는데 이 집은 왕추의 누나가 하는 식당이라고 한다. 밥이야 준비해간 재료로 요리사 딜립이 만들었지만 여기서도 인맥은 통하는구나 싶다. 점심을 먹고 다시 출발하여 가는데 곳곳에 이름 모를 야생화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지상낙원 같은 광경을 연출한다.

길가에는 무슨 판때기 같은 위에서 땅따먹기 하듯 손으로 튀기는 놀이를 하는 아이들, 공깃돌 같은 것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이 보이고 바위에는 온통 하얀 글씨로 꽉 찬 것도 있어 이게 뭐냐고 물으니 마니라고 한다. 마니석은 라마교의 경전이나 기도문을 돌에 새긴 것인데 대부분 라마교의 창시자인 구루 림보체를 기리는 옴 마니 받메 흠을 반복해서 새겼다고 한다. 마니석에서는 항상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왼쪽으로 가야한다. 이것은 불교에서 행운의 상징인 만()자가 가리키는 방향이 왼쪽이기 때문이다. 나도 정상에 오르는 행운을 누리고 싶어 왼쪽으로 갔다.

루클라는 고도가 2800m이고 팍딩은 2600m이니 오르락내리락해도 별 힘 들이지 않고 팍딩에 도착했다. 팍딩에 도착하면 팍~ 뒹굴려고 했는데 방이 추워 식당 의자에 앉아 저녁 줄 때를 기다렸다. 저녁 식사를 하고도 난롯가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데 밖에 나갔다 오는 사람이 비가 온다고 한다. 그러자 한 사람이 비의 온도가 몇 도냐고 한다. 다른 사람이 ‘5!’ 하니까 다들 이유를 몰라 멍~ 하니 쳐다본다. 내가

비가 오도다. 비가 오~도다.”

하고 노래를 부르니 그제야 알아듣고 다들 웃는다. 이렇게 농담이 시작되자 양숙씨가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일단 미친년 시리즈로 시작해

사위를 아들 같다고 하는 년, 며느리를 딸 같다고 하는 년, 결혼한 아들을 내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년은 모두 미친 년한 다음 2탄으로

“10억도 없으면서 강남 살겠다는 년, 20억도 없으면서 자식 유학 보낸다는 년, 30억도 없으면서 유산 상속 걱정 하는 년, 40억도 없으면서 사() 자 붙은 사위 보겠다는 년, 50억 가지고도 찬 물에 밥 말아 먹는 년.”

하더니 다음은 아들 시리즈로 이어진다.

능력 있는 아들은 나라의 일군, 돈 잘 버는 아들은 며느리의 남편, ()자 붙은 아들은 장모의 사위, 백수는 내 아들.”

이렇게 일장 연설을 하니 다들 배꼽 잡고 웃는다. 이렇게 농담 따 먹기를 하다가 방으로 돌아와 뜨거운 물통을 발치에 넣고 잠이 들었다.

 

316일 웬 남자 몸? (남체: 3440m)

아침에 일어나니 화창하게 개였다. 팍딩을 출발하여 조금 가니 수탉 한 마리에 암탉 세 마리가 놀고 있다. 내가 한 남편에 세 아내라고 하니 파쌍이 "Big problem" 하며 받아 친다. 파쌍은 왕추의 누이동생 남편이라고 하는데 어찌나 재치 있고 유머 덩어리인지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뭐가 그리도 좋은지 입가에는 웃음이 싱글싱글 벙글벙글, 코에서는 콧노래가 흥얼흥얼, 어깨는 으쓱으쓱 덩실덩실 춤을 추며 신이 난다. 이렇게 즐겁게 일을 하니 보는 사람도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셀파들의 이름은 비슷한 것이 많은데 이것은 성이 모두 같은데다가 이름도 태어난 요일에 맞춰 짓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월요일은 다와이고 목요일은 파쌍이라고 한다.

점심 식사 후 다시 출발하여 조살레에서 입산신고를 하고 계속 가는데 비가 오더니 눈으로 바뀌어 순식간에 온 세상이 설국으로 변한다. 눈이 없어도 멋진데 눈까지 덮이니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다. 가다가 잠시 쉬는 곳에서 파쌍에게 얼마나 더 가야 하느냐고 물으니 이렇게 걸으면 한 시간, 이렇게 걸으면 두 시간하며 걷는 시늉을 낸다. 파쌍은 한글도 잘 읽고 9개 국어를 한다고 한다.

남체에 도착해 식당에서 쉬는데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온 부부가 난롯가에 앉아있다. 그들은 페리체까지 갔다가 남편이 고소가 심해 이곳으로 하산했고 다음 날 다시 올라갔다가 또 고소가 심해 다시 하산했다고 한다. 내일 또 갈꺼냐고 물으니 내일은 그냥 내려가겠단다. 그러면서 여자는 자기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남편이 문제라고 한다. 그런 소리를 들으니 은근히 겁이 난다.

저녁 식사 후 한 시간이 지나자 인솔자 장춘원씨가 무슨 조그만 기계를 가지고 나온다. 검지손가락을 기계에 끼우니 무슨 숫자가 나온다. 하나는 산소 포화도이고 하나는 맥박수라고 한다. 나는 산소약을 먹은 덕인지 90 이 나왔고 맥박도 정상이다. 이걸 보더니 외국인들도 서로 해달라고 손가락을 내민다. 이래저래 장춘원씨만 바빠졌다.

90루피(2000)를 주고 디카 배터리를 충전한 후 난방장치가 없어 썰렁한 방으로 돌아왔다.

 

317일 디리 보챈다고? (디보체: 3820m)

남체에서 8시쯤 출발하여 아마다블람을 바라보며 캉주마에 도착하니 아직 점심때도 안 됐다. 원래는 여기서 하루 묵을 예정이었지만 비행기가 안 떠 이틀을 허비한 관계로 디보체까지 가기로 했다.

캉주마까지는 완만한 오르막인데 캉주마를 지나니 계속 내리막이다. 내려가며 셀파들은 레쌈삐리리 노래를 부른다. 레쌈은 꽃이름이고 삐리리는 바람에 날린다는 뜻이란다. 레쌈삐리리는 계곡을 가운데 두고 양쪽 산에 사는 처녀 총각이 갈수는 없고 노래를 바람에 실어 보내며 사랑을 나누는 노래라고 한다. 내려가는 건 좋은데 다시 올라갈 일이 아득하다. 풍기텐가까지 띵까띵까 내려가 개울가에 있는 로지에서 점심을 먹었다.

여기서부터 다시 오르막길을 숨차게 올라가 탕보체에 도착하니 커다란 라마교 사원이 있다. 사원 안에는 라마의 족적이 찍힌 돌이 있었는데 딱딱한 바위에 어떻게 인간의 발자국이 찍힐 수 있는지 볼수록 신기하다. 설명하는 왕추에게 도대체 가 뭐기에 남체 탕보체 디보체 라고 하느냐고 물으니 는 라마의 발자취라고 한다.

사원을 나와 내리막길을 조금 내려오니 오늘의 기착지 디보체다. 이틀 치를 하루에 뛰었더니 사지가 제멋대로 움직이고 온 몸이 무감각하다.

저녁 식사 후 또 난로 가에서 몸을 녹이는데 노르웨이 남자가 스키모자라고 한글로 짠 털모자를 쓰고 있다. 사람들이 이거 어디서 샀냐고 물으니 카트만두에서 샀다는 것이다. 스키는 ski 이고 모자는 cap이라고 했더니 신기해한다. 그런데 옆에서 듣던 네팔사람 왈 네팔말로 모자는 양말이란다.

 

318일 파리채가 아니고 (페리체: 4240m)

어제까지는 스핑크스 같이 보이던 아마다블람이 가까이 갈수록 독수리의 날개 편 모습으로 변한다. 앞에는 눈이 덮여 흰 코처럼 보인다. 왼쪽의 눕체는 편안하게 누워있고 그 옆의 로체는 위풍당당한 모습이다. 가운데 에베레스트는 멀어서 그런지 오히려 작게 보인다.

에베레스트는 1852년 인도 측량국에서 세계 최고봉임을 밝혔는데 당시 측량국 장관이고 영국의 수리지리학자인 에베레스트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에베레스트를 티벳 사람들은 초모룽마라고 하는데 이것은 대지의 여신이란 뜻이고, 네팔 사람들은 사가르마타라고 하는데 이것은 하늘의 머리라는 뜻이다. 이렇게 이름을 붙인 것은 땅을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사는 서양인과 자연에 순응하며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동양인의 사고방식 차이인지? 아니면 이 산을 조상대대로 바라보며 살아가는 현지인과 일시적으로 바라본 외지인의 생각 차이인지 알 수 없다.

저녁식사는 잡채에 닭백숙에 돼지고기에 완전 잔칫상이다. 요리사 딜립이 솜씨가 좋아 한국 사람보다 한국 요리를 더 잘 한다. 요즘 연일 배 터지게 집에서 보다 훨씬 잘 먹고 있다.

저녁을 먹고 나니 양숙씨가 침낭 넣기가 힘드니까 내일부터 카르마와 칸차에게 부탁하자고 한다. 나는 입이 안 떨어져 가만히 있는데 양숙씨가 이들을 불러 부탁 한다. 그리고 칸차에게는 나에게 부지런히 물 먹이라고 지시까지 한다. 사실 이번 트래킹은 양숙씨만 믿고 왔다. 나 혼자서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데 양숙씨가 같이 하자고 하는 바람에 겁도 없이 따라 나섰다. 양숙씨는 간호사 출신이라 그런지 아는 것도 많고 다른 사람에게 말도 잘 한다. 한 마디로 나의 전담 간호사요 대변인이다.

 

319일 무슨 부채라고? (로부체: 4910m)

원래는 페리체에서 고소적응을 위해 하루 더 자게 되어있었지만 빼먹은 이틀을 메우려고 바로 로부체로 향했다. 4000m 가 넘으니 조금만 걸어도 헉 헉 댄다. 공부 잘 하는 년이 얼굴 예쁜 년 못 당하고, 얼굴 예쁜 년이 돈 많은 년 못 당하고, 돈 많은 년이 건강한 년 못 당한다는데 공부도 못하고 얼굴도 못 생기고 돈도 없으면 건강하기라도 해야 할 텐데 이도 저도 아니니 그저 숨이 끊질 때 끊어지더라도 죽자고 걸어갈 수밖에

꼴찌서 빌빌대고 있으니 대전의 한선생님이

어이 마당쇠! 마님들이 힘들면 어깨 주무르고 다리 주무르고 마사지 해야지.” 해서 또 한바탕 웃긴다.

오늘은 원체 힘드니 많은 사람들이 배낭을 쎌파에게 맡기고 맨몸으로 걸어간다. 우리는 맨몸으로도 헉 헉 대는데 셀파들은 배낭을 두 세 개씩 지고도 뛰어다닌다. 더구나 쫍교(소처럼 생긴 야크 비슷한 동물)는 우리의 카고백을 세 개씩 지고 넌줄넌줄 잘도 간다. 쫍교는 낮은 곳에서 높은 곳까지 다 살 수 있는데 야크는 3000m 아래로 내려가면 병이 들어 죽는다고 한다. 모든 생물은 생존의 한계 범위가 있는 모양이다. 인간도 살 수 있는 한계가 있는데 식물도 살 수 없는 신의 세계에 들어가려고 하니 이 고통을 겪는가보다.

로부체에 도착해 저녁식사를 하는데 고기 튀김이 나온다. 다들 맛있게 먹다가 더 달라고 하니 파쌍이 자기 넓적다리라도 썰어서 더 주랴? 는 뜻으로 넓적다리 살을 베는 시늉을 한다. 고기가 없나보다 하고 포기하고 있는데 고기 튀김을 가져와 듬뿍 듬뿍 더 준다. 고기가 많으면서도 그렇게 웃긴다.

 

320일 골았다고? (고락셉: 5170m)

오늘은 드디어 고락셉을 거쳐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EBC)에 가는 날이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산소약에 두통약에 활력소(로이코비)까지 모두 주워 먹고 출발했다.

주변 경치는 점입가경이라 갈수록 신의 세계로 들어가는 듯하다. 이러다 아주 천국으로 들어가 버리는 게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로 정신이 들락날락한다.

고락셉까지 가는 길에 약사 부부 신랑이 고소로 거의 사경을 헤맨다. 얼굴이 사색이고 입술이 바짝 말라붙었다. 그래도 고락셉까지 겨우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약사 부부는 도저히 못 견디겠다고 파쌍과 함께 페리체로 하산했다. 부인은 걸어가고 남편은 말을 타고 내려간다고 한다.

이들이 떠나고 우리는 간단한 간식만 챙겨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로 향했다. 길은 풀 한 포기 없는 너덜지대로 끝없이 이어진다. 그런데 이놈의 길이 요술을 부리나 가도 가도 같은 장소를 맴 도는 듯 끝이 보이지 않는다. 무념무상 아무 생각 없이 발걸음을 옮기는데 멀리서 선두가 너덜 능선 오른쪽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보인다. 칸차가 그쪽을 가리키며 노란 무늬가 보이는 곳이 베이스캠프라고 알려준다. 자세히 보니 과연 노란 텐트 몇 동이 자갈밭에 납작 엎드려있다. 빤히 보이면서도 가까워지지 않는 길을 또 하염없이 걷다보니 드디어 텐트 가까이 이르렀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벌써 사진을 찍고 우리를 기다린다. 함께 단체 사진을 찍고 양숙씨와 ‘EVEREST BASE CAMP 5363m'라고 쓰인 바위 앞에서 사진을 찍은 후 하산을 서둘렀다.

서둘렀다고 해봐야 아기다리 고기다리 걸음으로 쌕 쌕 숨을 몰아쉬며 내려오려니 벌써 날이 저문다. 칸차는 내가 너무 느리니 추워서 덜덜 떤다. 빨리는 가고 싶은데 마음뿐이니 나도 안타깝기 그지없다. 미안하긴 하지만 먼저 가랄 수도 없고 그냥 감각 없는 발걸음을 옮긴다. 이렇게 비몽사몽간에 걷다보니 어느 덧 고락셉의 롯지 지붕이 보인다.

롯지에 돌아오니 다들 지쳐서 늘어졌고 양숙씨도 방에 들어가 침대에 쓰러져 있다. 그래도 다음 날을 위해 저녁을 쑤셔 넣고 이 닦을 기운도 없어 그대로 침낭 속으로 들어가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321일 칼라파타르인지 칼로 뺨을 도려내는지 (칼라파타르: 5545m)

이번 트래킹의 최고봉 칼라파타르로 가는 날이다. 양숙씨는 몸이 천근만근이라 도저히 못 가겠다고 한다. 나는 그래도 미련이 남아 가다가 도중에 내려오는 한이 있어도 가겠다고 하며 옷을 입으니 양숙씨도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입는다. 4시 반에 수프로 대충 요기를 한 후 칼라파타르로 향했다.

딜립은 떠나는 우리에게 잘 다녀오라고 문 앞에 서서 인사한다. 해도 뜨기 전이라 무장을 한다고 했지만 바람이 어찌나 매서운지 칼로 뺨을 도려내는 듯하다. 손은 꽁꽁 얼어 뼈가 아프다. 칸차가 가끔씩 손으로 비벼주지만 속수무책이다.

오늘은 내 뒤에서 오겠다던 양숙씨는 말뿐이고 어느 새 앞장서서 저만치 달아난다. 나야 더 이상 빨리 갈 수도 없으니 천천히 소가 제자리걸음하듯 느릿느릿 걸어가는데 해가 뜨자 추위도 조금 누그러진다. 앞에 보이는 푸모리는 햇빛을 받아 튀어 나올 듯 눈부시게 빛나고 뱀같이 꼬불꼬불 이어지는 길은 하늘까지 이어지는 듯하다.

빠른 사람들은 벌써 정상에 갔다가 내려오는데 나는 아직도 밑에서 벌 벌 긴다. 내가 정상까지 갈꺼라고 했더니 칸차가 다른 사람들이 다 내려가도 자기와 같이 정상까지 가자고 한다. 내려오는 사람들의 격려를 받으며 얼마를 더 가니 드디어 돌멩이들이 가득 쌓이고 마니 깃발이 줄줄이 쳐 있는 정상이다. 아직 내려가지 않은 왕추가 양숙씨와 내 사진을 찍어주고 빨리 내려가자고 서두른다.

에베레스트 정상과 푸모리를 다시 한 번 바라보고 하산을 시작했다. 조금 내려오려니 한 남자 회원이 올라가고 있다. 나는 포기만 안 하면 갈 수 있다고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고락셉으로 향했다. 이제 더 이상 높이 갈 일은 없다고 생각하니 몸조심 할 일도 없어서 부지런히 내려오니 다들 아침 식사 중이다.

삼성의 조선생님은 삼성 6기 친구들이 만들어준 365깃발에 2009. 3. 21이라고 날짜까지 쓰고 밑에 이름을 쓴 후 조락셉 롯지 벽에 위풍당당하게 붙여놓았다. 동기들이 이토록 물심양면으로 후원해준 덕에 정상까지 오를 수 있었나보다. 설악산도 지리산도 한라산도 아무데도 오른 일이 없다는 분이 70의 나이에 5000 이 넘는 고지에 오른 것은 동료들의 막강한 기()와 자신의 강인한 의지력 때문이 아닌가 싶다.

늦은 나는 서둘러 아침을 먹고 페리체로 향했다. 내려오는 길은 지상인지 천상인지 모르게 붕~ 뜬 상태로 정신없이 내려왔다. 신의 세계에 들어갔다 온 듯 마음속은 텅 비어 내 안에 아무 것도 없는 듯하다. 인간의 손으로는 도저히 만들 수 없는 대자연의 웅장한 모습을 바라보니 세상에 부족한 게 하나 없고 그저 내가 여기 있다는 것 하나 만으로도 무한한 행복감을 느낀다.

페리체에 내려오자 어제 내려온 파쌍이 반갑게 인사한다. 하루 밖에 안 됐는데 몇 달 전에 헤어진 것처럼 아득하다. 오랜만이라고 내가

“Long time" 했더니 ”No see" 하고 단박 응답이 온다.

약사 남편에게 괜찮냐고 했더니 이제 좋아졌다고 하며 어제 고락셉에서 여기까지 말 타고 오는데 250불 주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고도에 따라 모든 물가가 기하급수 적으로 올라간다. 팍딩에서는 배터리 충전도 다 해주고 90루피인데 여기서는 한 시간만 충전해주고 300루피(6000).

5545m에서 4240m까지 내려오니 물 먹은 배추같이 다들 파릇파릇 살아났다.

 

322일 캉을 주는지 칼을 주는지? (캉주마: 3550m)

고락셉에서부터 나오는 코피는 내려와도 그칠 줄 모른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서울 가도 한 동안 계속 나올 것이다. 떡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누가 하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 고생을 사서 하는지 내가 생각해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고도가 낮아지니 숨 쉬기가 한결 수월하다.

캉주마까지 오는 길도 오르락 내리락을 계속하는데 웬 개 한 마리가 따라온다. 대전의 한 선생님이 또 장난기가 발동하여 카르마에게

개 혀?”

하니 한국말을 모르는 그가 멍하니 쳐다본다. 내가

“Can you eat dog?"

하며 개고기 먹느냐고 통역을 했더니 못 먹는다고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든다.

캉주마에 도착하니 다들 살아나서 술 생각이 나는지 맥주를 시킨다. 이번에도 한 선생님이 한국말로 맥주가 500루피 이상이면 목을 비틀어 놓겠다고 하니 신통방통하게도 알아듣고 250루피라고 맥주를 가져온다.

저녁상을 차리는데 보니 숟가락 놓다가 땅에 떨어지면 그냥 주워 놓지를 않나 놓다 말고 코를 후비지 않나 하여튼 눈이 밝은 게 탈이다. 그래도 이 사람들이 나보다 백 배 천 배 건강해서 산을 날아다니고 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요?

 

323일 팍딩까지 팍~ 내려오다. (팍딩: 2600m)

아침에 두 팀으로 나누어 한 팀은 산으로 올라가 쿰중에 있는 힐러리 스쿨을 본 후 남체로 가고 다른 팀은 그냥 남체로 내려가 시장구경을 하기로 했다.

양숙씨와 나는 학교를 보려고 산으로 가는 팀에 붙었다. 캉주마는 일출이 좋다더니 과연 산으로 오르는 도중 뒤의 설산에서 한 줄기 햇빛이 터져 나온다. 등 뒤로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30분쯤 오르니 쿰중 마을이 나타나고 조금 더 가니 에베레스트를 처음 오른 힐러리경이 지원하여 세웠다는 힐러리 고등학교가 나타난다. 시간이 일러 학생은 별로 없고 한 쪽에 2007년 한국의 알파인 클럽에서 세워준 컴퓨터 교실이 있어 가슴이 뿌듯하다.

힐러리 스쿨에서 남체로 오는 길은 지금까지 본 경치와는 전혀 달라 마치 유럽의 알프스에 온 듯 길이 순하고 아름답다. 남체에서 다른 팀과 합류하여 차를 마시고 다시 하산을 시작했다.

꼬불꼬불한 오르막길이 나타나자 파쌍이 다음에 오면 자기가 길을 평탄하게 쭉 펴 놓겠다고 또 농담을 한다. 계곡에는 무수한 출렁다리들이 있는데 다리를 건너다가 아차 하는 순간 내 모자가 바람에 날아갔다. 칸차는 레쌈삐리리 같이 되었다고 웃는다.

칸차는 어린 아이 같아 보였지만 자기 아들이 학교에서 놀다가 넘어져 병원에 가서 꿰맸는데 흉터가 생길까봐 걱정이라고 한다. 아무리 어려도 자식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똑같은 모양이다. 한국에서는 다른 곳의 피부를 떼어 흉터에 붙인다고 했더니 놀라는 눈치다.

다음 출렁다리를 건너려는데 이번에는 반대쪽에서 야크가 짐을 지고 건너온다. 중간에 야크를 만난 여자와 아이가 피할 길이 없으니 장작더미를 내려놓고 몸을 가장자리에 잔뜩 붙이고 야크를 피한다. 야크가 지나간 후 다시 지고 일어서지를 못하자 칸차가 달려가 장작을 들어주며 일으켜 세워준다. 칸차는 얼굴만 고운 줄 알았더니 맘씨도 곱다.

다리를 지나 얼마를 더 왔는데 앞에서 사람들이 서서 웅성웅성한다. 웬일인가 했더니 우리 짐을 나르던 쫍교가 앞에서 오던 말을 피하다가 계곡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는 것이다. 내려다보니 쫍교는 안 보이고 우리의 카고백을 담은 흰 자루가 약 50m 아래 계곡물에 쳐박혀있다. 이번에도 칸차와 다와(산행대장 셀파 이름) 또 다른 한 명이 번개같이 내려간다. 우리는 쫍교 걱정을 하며 다시 내려오는데 곧 칸차가 좇아온다. 어떻게 됐느냐고 했더니 쫍교는 떠내려갔는지 보이지 않고 짐 세 개는 모두 가져왔다고 한다.

팍딩에 도착하여 물에 빠진 짐이 누구 카고백인가 열어보니 약사 부부 것이다. 그들은 화도 안 내고 자기들이 당첨됐다고 웃으며 방으로 가져가 짐 정리를 한다. 참 보면 볼수록 천사표 부부다.

죽은 쫍교를 어떻게 처리하나 걱정했더니 말 주인이 200불 내고 왕추가 200불을 낸단다. 이런 상황이 되니 회원들이 상의하여 1인당 10불씩 내서 왕추에게 주었다. 왕추는 고맙다고 연신 인사를 한다. 그래도 우리 때문에 죽은 쫍교가 불쌍하다고 하니 장춘원씨는 좋은 곳에서 환생할꺼라고 우리를 위로한다.

 

324일 뭐가 큰다구? (루클라: 2800m)

열흘 동안 세수도 못하고 머리를 못 감았더니 머릿속은 구더기가 생긴 듯 미치게 가렵고 온 몸은 이가 기어 다니는 듯 근질근질하다. 고소 때문에 얼굴은 팅팅 붓고 눈은 뻑뻑하다.

식당으로 가 아침 식사를 하고 난롯가에 앉으니 폴란드에서 왔다는 여자가 우리 식판의 김치를 보고 일본 음식이냐고 묻는다. 내가 아니라고 하며 우리는 한국 사람이고 이건 한국음식이라고 했더니 자기는 일본 사람인 줄 알았다며 김치 맛을 본다. 그러더니 맛이 좋은지 손가락으로 김치며 깍두기며 가리지 않고 마구 집어먹는다. 참 성격도 좋고 먹성도 좋은 여자다.

팍딩을 출발해 루클라로 오다가 산행 대장 다와의 집에 들렀다. 다와의 집은 깔끔하고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벽에 붙은 사진을 보니 아들도 무척 미남이다. 다와 부인의 차 대접을 받고 있는데 아침에 팍딩에서 본 폴란드 부부가 들어와 차를 마신다. 반가워서 인사를 하고 나도 재작년에 동생들과 바르샤바에 갔었다고 하니 무척 좋아한다. 다와의 집에는 파쌍의 아들이 아버지를 마중 나와 있었다. 다들 반갑다고 귀여워하며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하니 쑥스러운지 슬그머니 나간다.

다와의 집에서 나와 이번에는 파쌍의 집으로 갔다. 파쌍은 왕추의 친구인데 집도 왕추가 사주었다고 한다. 이 소리를 듣더니 사람들이

파쌍이 알고 보니 순 도둑놈이네~” 한다.

하긴 누이동생 빼앗고 집까지 뺏었으니 칼만 안 들었지 거의 날강도 수준이다.

파쌍의 집에서는 셀파 티와 창을 대접 받았는데 셀파 티는 찝찔하면서도 고소하였고 창은 우리나라 막걸리와 비슷했다. 이 창은 부인이 집에서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벽에 있는 파쌍의 젊었을 때 사진을 보고 내가 핸썸보이였다고 하니 그 때는 플레이보이였다고 또 농담을 한다.

파쌍의 집에서 나와 길 건너편에 있는 왕추 누나네 집에서 또 점심을 먹었다. 왕추는 15살 때 한 달 사이에 부모가 모두 돌아가셔서 갑자기 소년 가장이 되었다고 한다. 그 때부터 이 길을 수없이 오르내리며 키친보이에 포터에 온갖 궂은일을 하며 누나와 동생들을 먹여 살리고 지금은 카트만두에 집이 다섯 채나 된다고 한다. 이런 소리를 듣고 보니 왕추가 한층 더 위대해 보이고 한 마디로 인간승리라는 생각이 든다.

점심을 먹고 루클라로 출발하여 내려오는데 올라갈 때보다 10일 동안 랄리구라스며 벚꽃이 더 흐드러지게 피고 밭도 한층 푸르러졌다. 한참 내려오는데 한 꼬마가 지붕 위에 앉아

나마스떼~ 나마스떼~”

하며 지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다. 네팔은 에베레스트도 좋은 관광자원이지만 무엇보다 긍정적이고 친절한 사람들이 더 큰 자원이 아닌가 싶다.

얼마를 더 내려오는데 인천대학교 모자를 쓴 사람들이 올라온다. 어디까지 가냐고 물으니 에베레스트 정상과 로체까지 간다고 한다. 뒤에는 KBS ‘촬영 팀까지 따라가고 있다. 양숙씨는 앞에서 인터뷰까지 했다는데 언제 나오려나 모르겠다.

루클라에 도착하니 저녁에 양을 잡아 쫑파티를 한다고 기다리란다. 양고기를 어떻게 먹을까 걱정 했더니 웬 걸 냄새도 안 나고 맛이 기가 막히다. 양고기와 락시라는 술을 먹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소주와 비슷했다. 술이 들어가자 그동안 우리를 도와준 셀파, 포터, 키친보이, 야크맨이 모두 한데 어울려 레쌈삐리리를 부르며 춤을 추고 놀았다. 장춘원씨는 덴싱킹, 덴싱퀸을 외치며 분위기를 살렸는데 전공이 레크레이션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잘 놀았다. 이렇게 한 바탕 놀다가 각자 방으로 돌아가며 히말라야에서의 마지막 밤을 아쉬워했다.

 

325일 나갈 곳인지 들어갈 곳인지? (나갈곹)

이번에도 비행기가 안 뜨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이 날은 바람도 없고 안개도 없어 순조롭게 카트만두로 날아갔다. 한참 가다가 스튜어디스가 앞으로 가기에 또 깜짝 놀라 눈치를 보니 별 게 아닌지 그냥 뒤로 간다.

30분 만에 카트만두 공항에 내리니 그토록 지겹던 카트만두가 갑자기 고향처럼 편안하고 포근해 보인다. 우리는 세 대의 비행기에 나누어 탔는데 1시간 반을 기다려 모두 도착한 후 버스를 타고 우리 집같이 친숙해진 하이얏트 호텔로 갔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욕실로 들어가 머리부터 감고 샤워를 하니 오랜만에 하늘로 날아갈 듯하다. 점심 식사 후 두 팀으로 나눠 카트만두에 그냥 있을 사람은 호텔에서 쉬고 원하는 사람은 나갈 곳인지 들어갈 곳인지 하는 곳에 가서 하루 쉬고 오기로 했다.

피탐바와 함께 여행사 봉고를 타고 2시간 가까이 가니 나갈곹에 도착했는데 산 위에 있는 조용한 마을이었다. 호텔도 정원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동화의 나라로 들어온 듯하다. 이곳저곳 꽃구경을 하다가 방으로 들어오니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지며 천둥이 치고 우박이 쏟아진다. 히말라야의 날씨는 예측을 불허한다. 시도 때도 없이 웃었다 울었다 한다. 그래도 숨 막히는 카트만두 보다는 여기 오기 백번 잘 했다고 감탄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326일 카트만두로 귀환

나갈곹은 일출이 좋다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안개가 자욱해 일출 보기는 다 틀렸다. 로비에 있는 사진을 보고 있으니 호텔 종업원이 와서 설명한다. 이게 여기서 찍은 일출 사진인데 10월이나 11월에 오면 이런 장관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멀리 설산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지고 아래는 운해가 깔린 것이 정말 기막힌 광경이다. 얼마나 덕을 쌓아야 이런 경치를 볼 수 있으려나

방에 돌아와 엽서 세 장을 써서 로비에 가서 부칠 수 있냐고 물으니 안 된단다. 피탐바에게 3달러를 주고 카트만두에 가서 부쳐달라고 부탁했다.

9시에 호텔을 출발하여 카트만두로 돌아와 점심 식사 장소인 일식집으로 갔다. 이 일식집은 정원에 온갖 꽃이 만발하고 식당도 깨끗했다. 여기서 맛깔스런 점심을 먹고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왕추가 흰 마후라(카타)를 걸어주며 우리를 환송한다.

 

오후 세 시 반 비행기를 타고 순조로이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밤 12시 반이 다 됐다. 공항을 나오니 내가 언제 히말라야에 갔었나 싶고 아득한 옛날일 같이 까마득하다. 속세의 인간이 잠시 신의 세계에 발 들여 놓았던 일이 꿈 같이 아련하기만 하다. 언제 또 눈의 거처 히말라야에 사는 대지의 여신이 나를 그의 세계로 초청해주려나 간절히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