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행문

2000. 8. 9. 엘부르즈

by 아~ 네모네! 2012. 10. 13.

 

 

 

 

 

엘부르즈

2000. 8. 9. ()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엘부르즈라?

사실 나는 엘부르즈라는 산이 있는지, 그게 유럽 최고봉인지 전혀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성수중학교에서 같이 근무하던 선생님들과 러시아에 있는 이 산에 갈 기회가 생겨 여름 방학을 기해 다녀오게 되었다. 71810시까지 김포공항 2청사에 모이도록 되어 있어서 8시에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공항에 도착하니 930분밖에 되지 않아서 그런지 아는 얼굴이 눈에 띠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저기 기웃기웃 하는데 큰 배낭을 앞에 놓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눈에 띠어 그리로 가봤더니 예상대로 엘부르즈에 가는 사람들이었다. 근처 의자에 앉아 T. V를 보고 있으려니 김숙임 선생님이 나타나고 곧 이어 임만재 선생님, 이제하 선생님이 나타났다. 화물을 부치는데 가스는 금지 당해서 싣지를 못하고 나머지 짐만 부치고 비행기에 올랐다. 12시에 출발한다던 비행기가 1시나 되어 이륙하였다.

 

비행기 안에서 졸다 자다 해도 시간이 가지 않아서 전날 아들 면회 갔던 일을 더듬어 글도 쓰고 옆에 앉은 사람과 이야기도 나누었다. 옆에 앉은 사람은 외대 교수였는데 모스크바 대학에서 러시아 문화를 연구한다고 하였다. 우리가 엘부르즈라는 산에 간다고 하니 그곳은 보통 사람들이 가지 않는 특이한 곳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어디에 숙소를 정했느냐고 하여 프린트를 보고 우크라이나 호텔이라고 했더니 좋은 호텔이라고 하였다. 저녁 10(현지 시각 5)에 모스크바의 쉐르메체보 공항에 도착하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날씨도 우중충하고 색깔도 우중충해서 음울한 러시아 문학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다음 날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호텔 주위를 산책하였다. 호텔 앞에는 레닌 동상이 서 있고 모스크바 강이 말없이 흐르고 있었다. 도시 전체가 회색 빛이 아닌데도 회색 빛으로 보이는 것이 마치 화장하지 않은 여자 얼굴을 보는 듯 했다. 호텔로 돌아와 아침 식사를 하고 다시 공항에 나가 비행기를 타고 미네랄 바디로 향했다. 11시에 미네랄 바디 공항에 도착하여 12시 반쯤 버스로 이트콜을 향하여 출발했는데 버스에는 에어컨도 없고 유리창은 깨어진 것이 한국에 있었으면 열 두 번도 더 폐차되게 생겼다. 차가 똥차라 그런지 기름이 나빠서 그런지 다니는 차마다 지독한 매연을 뿜어내어 숨쉬기가 힘들었다. 240분쯤 경찰이 검문하는 곳에 왔는데 이트콜 가는 곳에 홍수가 나서 산사태로 길이 끊어졌다는 것이다. 정말 하천에는 노도와 같은 흙탕물이 넘실대며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우리들은 버스에서 내려와 흙탕물을 바라보며 대책을 논의했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어서 다시 차를 되돌려 삐아띠꼬르스꼬라는 곳에 있는 뚜아리스트 호텔로 들어갔다. 저녁을 먹고 다시 대책 회의를 한 끝에 일인당 백 불씩 내어 헬기를 빌리기로 하였다. 우리 일행은 가이드를 포함하여 15명이었는데 일식 집을 하는 사람에, 인천 부두에서 하역을 하는 사람에, 별별 사람이 다 있었다. 대충 회의를 마치고 호텔 옆에 있는 소공원에 나와보니 여기도 레닌 동상이 있었다. 우리는 레닌 동상 앞에 앉아서 기 체조를 한다고 서로 등을 두들겨주며 한참 운동을 하였다. 그런데 이 공원에는 데이트하러 나온 젊은 남녀들이 많았다. 남자들은 그저 그런데 여자들은 정말 모두 미인이었다. 정말 러시아 여자들은 쭉쭉 빵빵(다리는 쭉쭉, 가슴은 빵빵)이었다. 남자들은 여자 보는 눈이 너무 높아져서 집에 가서 마누라 얼굴을 어떻게 볼 지 모르겠다고 농담들을 하였다.

 

20일에는 새벽 4시도 안 되어 잠이 깼다. 아직도 시차 적응이 안 되어 아침에는 잠이 일찍 깨고 저녁에는 졸리었다. 새벽부터 닭소리, 개소리, 까마귀 소리가 시끄러워 모닝콜이 필요 없을 지경이었다. 8시에 아침을 먹고 910분에 호텔을 출발하여 1040분에 헬기를 타려고 나르치크 공항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곧 헬기를 탈 줄 알았더니 또 그게 아니었다. 어디선가 눈사태가 나서 우리를 태우려던 헬기가 인명을 구조하러 갔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 올지 모르는 헬기를 공항 앞 땅바닥에 앉아 마냥 기다렸다. 오후 2시 반이 넘자 가이드가 도시락을 사와서 땅바닥에 앉아 요기를 하고 러시아어 공부도 하고, 김숙임 선생님과 같이 판소리도 부르고, 돌멩이를 주어다가 공기도 하면서 또 마냥 기다렸다. 정말 우리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여기 화장실은 또 희한했다. 더러운 것은 그런 대로 참겠는데 아예 문짝이 없었다. 범죄가 많아서 그랬는지 망가져서 아예 다 뜯어버렸는지 알 수 없지만 불안해서 볼 일 보기도 어려웠다. 5시가 넘자 모두 지쳐서 공항 앞마당에 있는 아에로 까페라는 곳에 들어가 맥주 한 잔씩 마셨다. 까페라고 해야 콘테이너 박스 같은 허름한 건물이었지만 역시 여기 있는 여자도 일등 미인이었다. 정말 러시아의 최고 관광 상품은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6시 반이나 되어 우리는 헬기를 타고 이트콜로 향했다. 헬기를 타고 가며 바라보는 산은 정말 이색적이었다. 만년설이 덮인 산봉우리들이 줄줄이 이어져 우리를 황홀하게 했다. 7시가 넘어 이트콜의 넓은 운동장에 내렸는데 온 동네의 아이들과 어른들이 나와 모두 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눈망울은 동물원의 원숭이 바라보듯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이트콜 호텔에 짐을 풀고 하루의 피로를 씻었다. 그런데 홍수로 단전이 되어 불도 안 들어오고 더운물도 안 나왔다. 우리는 헤드라이트를 켜고 짐 정리를 하고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21일 아침에도 일찍 일어나 모두들 배낭을 지고 숙소 앞에 나와서 버스를 기다렸지만 역시 버스는 와 있지 않았다. 한 시간은 기다려서 겨우 버스가 와서 타고 텔스콜까지 갔다. 원래는 여기서 케이블카를 타고 미르 스테이션까지 올라갈 계획이었는데 역시 정전으로 움직이지 않아서 우리는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 올라갔다. 생전 처음 무거운 짐을 지고 산을 오르려니 어깨뼈가 부러지는 것 같고 골이 핑핑 돌았다. 그래도 야생화도 바라보고 쉬엄쉬엄 쉬어가며 하염없이 걷다보니 멀리 케이블카 정류장인 미르 스테이션이 보였다. 그런데 빤히 보이면서도 그게 통 가까워지지를 않는 것이 참 미칠 지경이었다. 맨 뒤에 쳐진 나는 낑낑대며 힘겹게 올라가는데 수동 산악회의 조명구씨가 내 짐을 져 주러 내려왔다. 40m만 더 올라가면 된다고 하면서 내 짐을 가져가니 숨이 제대로 쉬어졌다. 우리는 미르 스테이션에 텐트를 치고 짐을 넣어놓은 후 4시 반이나 되어 하산을 시작했다. 텔스콜에 내려오니 7시가 다 되었다. 이번에는 버스가 미리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트콜 숙소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자리에 누우니 온 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팠다.

 

22일 아침에는 9시에 다시 이트콜 호텔을 출발하여 920분부터 산행을 시작하였다. 이번에도 무거운 짐에 짓눌려 터벅버벅 걷는데 1220분쯤 케이블카가 움직인다고 사람들이 중간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뒤에 쳐져있던 윤강명씨와 나는 너무 기뻐 환호성을 지르며 케이블카가 오기를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리니 정말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며 케이블카가 왔다. 먼저 간 사람들은 계속 걸어 올라가고 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미르 스테이션까지 순식간에 올라갔다. 가보니 우리 텐트는 아무 이상 없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거기서 걸어 올라오는 사람들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곳에는 캄차카에서 왔다는 사람도 있고, 캘리포니아에서 온 사람, 네델란드에서 왔다는 사람, 별별 사람이 다 있었다. 짧은 영어에 말은 잘 안 통해도 손짓 발짓 다 해가며 그래도 자기 할 말들은 다했다. 사람들이 다 가자 태고의 정적이 감돌고 엘부르즈의 동봉과 서봉은 베일에 싸인 얼굴을 내밀었다. 230분 윤강명씨와 나는 먼저 가라바시 산장으로 출발하였다. 4시 반에 가라바시 산장에 짐을 내려놓고 다시 미르 스테이션에 가서 또 짐을 지고 가라바시에 올라오니 7시 반이나 되었다. 누룽지를 끓여 간단히 저녁을 먹고 가이드와 함께 내일의 계획을 세웠다. 우리도 영어가 짧고 러시아 가이드도 영어가 짧아서 의사 소통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결국은 우리 짐 70kg을 가이드가 이틀에 걸쳐서 베이스캠프까지 40불에 날라다 주기로 하였다.

 

23일 새벽에 임만재 선생님과 러시아 가이드 루디는 미리 출발하여 베이스캠프를 치기로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830분에 출발하여 베이스캠프로 향했다. 1230분쯤 4200m고지에 친 베이스캠프에 도착하여 된장국과 밥을 먹었는데 높은 산이라 밥이 설어서 씹기가 힘들었다. 이곳은 퓨리웃 산장이 있었다는데 불타서 없어지고 건물의 뼈대만 일부 남아있었다. 점심 식사 후 고소 적응 차 조금 더 올라갔다 내려왔는데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속이 메스꺼워 약을 먹고 잠을 좀 잤다.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고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이날은 모두들 지쳐서 일찌감치 저녁을 해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24일 임만재 선생님과 조명구, 김숙임 선생님이 새벽 2시에 정상을 향해 출발하고 이제하 선생님과 윤강명씨와 나는 텐트에서 쉬었다. 940분에 임만재 선생님과 조명구씨가 정상에 오르고 하산을 시작했다고 무전이 왔다. 김숙임 선생님은 도중에 머리가 아파서 내려왔고 12시 반쯤 임만재 선생님이 베이스캠프에 도착했고 1시 반쯤 조명구씨도 내려왔다. 두 사람 모두 지쳐서 오자마자 텐트에 쓰러졌다. 이 날도 일찍 저녁 식사를 마치고 8시쯤 잠자리에 들었는데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며 비바람이 몰아쳤다. 임만재 선생님은 비를 맞으며 텐트 주위를 손보고 우리보고 눈이 쌓이면 산소가 더 부족해지니까 텐트 문을 조금 열어놓으라고 하였다. 바람이 어찌나 센지 텐트가 날아갈 지경이었다. 이러다가 텐트 채로 빙하의 골짜기에 파묻히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천둥소리가 조금 멀어지는 듯 하자 나도 모르는 사이 잠이 들었다.

 

25일 아침 잠이 깨어 침낭 속에서 뒤척이는 김숙임 선생님과 윤강명씨를 보니 마치 누에고치 속에서 누에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혼자서 슬그머니 일어나 볼 일 좀 보려고 텐트 밖으로 나오니 비는 그쳤지만 그래도 하늘은 오만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텐트 옆쪽에 있는 바위 지대로 가서 휴지를 들고 적당한 자리를 찾으려니 온통 구석구석이 오물 투성이였다. 그래도 볼일을 안 볼 수는 없어서 자리를 잡고 앉으니 빙하 위로 불어오는 바람에 엉덩이가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산장이 불탔으면 임시 화장실이라도 몇 개 갖다 놓았으면 좋으련만……. 우리 나라의 곳곳에 널려 있는 임시 화장실이 아쉬웠다. 조금 후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아침 식사를 하고 고소 적응 차 다시 산에 올랐다. 한 세 시간 걷고 나니 또 머리가 아팠다. 오후에는 모두들 텐트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모두들 며칠 째 씻지 못한 얼굴이 또 새카맣게 타고 얼굴은 퉁퉁 부어 쌍꺼풀도 풀리고 입술은 튀어나와 정말 가관이었다. 그래도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저것보다는 낫겠지 하며 안심하고 지냈다.

 

26일은 새벽 1시에 기상하여 누룽지를 끓여 먹고 2시에 모두 같이 출발하였다. 김숙임 선생님과 임만재 선생님, 조명구씨는 동봉을 향하여, 윤강명씨는 유진이라는 가이드와 5300m 고지에 있는 쌔들을 목표로, 제일 체력이 약한 나는 4800m 고지에 있는 비행접시 모양의 바위를 목표로 루디라는 가이드와 출발했다. 출발하기가 바쁘게 다른 사람들은 점점 멀리 사라져갔고 루디와 나는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며 천천히 올라갔다. 태고의 정적은 이런 것일까?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고 안 들리는 듯도 한 오묘한 느낌이었다. 조금 가다가 달이 떠올라 우리는 헤드랜턴을 끄고 희미한 달빛을 의지하여 쉬엄쉬엄 계속 올라갔다. 루디는 나이가 60인데 집은 모스크바에 있고 90이 된 어머니와 56세인 아내, 그리고 30세 된 아들 이렇게 4식구가 산다고 하였다. 루디는 인상이 정직하고 성실해 보여 안심이 되었다. 높은 산에서 오래 생활을 해서 그런지 숨소리도 안 들렸다. 올라갈 때는 내가 힘들어 하니까 뜨거운 차도 주고, 내려올 때는 무릎이 아파서 자꾸 쉬니까 무릎에 지압도 해주고 하였다. 내가 미안해서 10불을 주었더니 꽤나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러시아는 물자가 부족해서 그런지 절약 정신이 투철해서 그런지 배낭은 다 떨어진 것을 몇 번을 꿰매서 쓰고 있었다. 서서히 밝아오는 흰 산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빛을 띠고 별과 달은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거북이 걸음으로 걸어도 임종을 앞둔 사람같이 가쁜 숨을 몰아쉬게 되었다. 그래도 어느 결에 비행 접시 모양의 바위에 도착하였다. 그만 돌아갈까 하다가 그래도 갈 수 있는데 까지 가보려고 한 100m정도 더 올라갔는데 김숙임 선생님이 정상에서 무전을 보냈다. 나는 내려가는 속도도 느려서 올라간 사람들과 같이 내려오려고 하산을 시작했다. 좀 아쉽기도 하고 패잔병이 된 듯 허탈하기도 했지만 내 체력을 아는 나는 도중 하차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려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베이스 캠프가 빤히 보이는데 걸어도 걸어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올라가는데 8시간 내려오는데 4시간 정도 걸렸다. 텐트에 도착하자 일단 눕고 싶었다. 그냥 자면 고소가 안 가라앉는다고 돌아다니라고 하여도 모두들 오는 대로 텐트에 들어가 누웠다. 5시 반쯤 소고기 수프로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27일은 9시에 스노우카가 온다고 하여 일찍 아침을 먹고 짐을 모두 싸고 기다렸으나 12시가 넘어도 오지 않았다. 12시 반쯤 그냥 짐을 지고 내려오려고 조금 내려오는데 멀리 스노우카가 오는 것이 보였다. 배낭을 내려놓고 기다리다가 모두들 짐을 싣고 차를 탔다. 스노우카는 포크레인 같은 바퀴를 달고 자유자재로 눈밭을 치고 올라왔다. 가라바시 산장에 도착하여 이번에는 리프트를 타려고 기다리니 이번에도 기사가 밥 먹는다고 움직이지 않았다. 한 참을 기다리다가 리프트가 움직였다. 의자가 한 개씩으로 된 리프트라 짐을 따로 싣고 사람이 따로 탔다. 빙하를 바라보며 시원한 바람을 쏘이며 내려오니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뒤에 탄 조명구씨는 신이 나서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조명구씨는 가수 뺨치게 노래를 잘 불렀다. 빙하의 계곡으로 사라져 가는 노래 소리는 산이 노래를 부르는 듯 하였다. 리프트를 타고 미르에 내려와 이번에는 케이블카를 탔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 움직이지를 않았다. 이번에는 기사가 화장실에 갔다는 것이다. 또 한참을 기다리니 기사가 와서 기계가 움직였다. 케이블카를 타고 텔스콜에 도착하니 3시가 넘었다. 이트콜의 호텔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오랜만에 침대 위에 편안히 누웠다. 러시아는 공산주의 시절의 근성이 남았는지 노동자의 천국 같았다. 아무 때나 맘 내키는 때만 일을 했다. 정말 제대로 되는 게 없는 나라 같았다. 그러나 가이드 말이 또한 안 되는 게 없는 나라라고 한다. 돈만 주면 뭐든지 할 수 있단다.

 

28일 아침에는 6시에 일어나서 체조를 하는데 조명구씨가 모닝 커피를 끓여 가지고 왔다. 우리는 조명구씨의 따뜻한 마음에 마냥 행복해 하며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아침을 먹고 이 날은 텔스콜에 있는 계곡으로 트레킹을 떠났다. 그런데 길에 어찌나 소똥이 많은지 소똥을 밟지 않고는 걸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소똥을 밟지 않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었지만 나중에는 무감각하게 걸었다. 11시에서 3시까지 닭을 삶아 먹고 빙하가 녹아 흐르는 계곡에서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가 된 기분으로 초원을 뛰어다니며 놀았다. 5시쯤 다시 이트콜 호텔에 도착하여 저녁 식사를 하고 쉬었다. 아직도 입술이 아물지 않아 음식을 먹으려면 입술이 터져서 피가 흘렀다.

 

29일 아침 텔스콜의 다른 계곡에 텐트를 치려했으나 물이 없어서 헤매다가 다시 어제의 그 장소에 텐트를 쳤다. 다른 고기가 없어서 이날도 닭고기로 닭도리탕을 해먹고 저녁에는 캠프 화이어를 하였다. 비박을 하려고 침낭 속에 누워 하늘을 보니 수많은 별들이 떨어질 듯 하늘에 매달려 있고 유성은 아름답게 하늘을 가로질러 떨어졌다. 유성이 떨어질 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하여 빨리 빌어보려고 해도 미쳐 빌기 전에 떨어지고 말았다. 별을 실컷 바라보다가 텐트 속으로 들어와 다시 잠이 들었다.

 

30일 아침 6시 반쯤 일어났더니 아무도 일어나지 않고 어제 캠프 화이어 하며 먹던 그릇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모두 모아다가 설거지를 하고 혼자서 산으로 올라갔다. 조금 올라가서 보니 엊저녁에 내려갔던 소떼들이 서서히 산으로 다시 올라오고 있었다. 한 마리가 앞서서 가니 모두 그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다시 내려와 아침 식사를 하고 9시 반쯤 김숙임 선생님과 조명구씨, 나 이렇게 셋이서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 산에는 온통 야생화가 만발하여 우리는 야생화에 홀린 듯 마냥 올라갔다. 조명구씨가 임만재 선생님이 11시 반에 하산하라고 했다고 그만 가자고 해도 김숙임 선생님과 나는 조그만 봉우리 위까지 가보려고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조명구씨는 대장의 명령에 복종해야한다고 하산을 시작하고 우리는 봉우리까지 올라갔다가 봉우리를 돌아서 하산을 시작했다. 1시 반쯤 내려오니 점심식사들을 하고 있었다. 점심을 먹는데 임만재 선생님이 명령에 불복종한다고 한 마디 하였다. 나는 대장이 화내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별 필요도 없는데 왜 일찍 내려오라고 하나하는 생각에 불만이 가득하였다. 점심을 먹고 설거지를 하는데 임만재 선생님이 미안한 생각이 들었는지

대강 닦으세요.”

하고 위로를 하였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솟아올랐다. 눈물을 감추고 설거지를 마치고는 매트리스를 그늘에 깔고 누웠다. 가만히 누워있으려니 또 눈물이 나려고 하였다. 텔스콜 마을에 있는 사우나 생각이 나서 루디에게 사우나를 할 수 있겠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자기가 먼저 내려가 보겠다고 한다. 김숙임 선생님과 윤강명씨에게 사우나 하러 가자니까 내려가기 싫다고 안 하겠다고 한다. 혼자서 내려오니 루디가 준비가 덜 되어 30분을 기다려야 한단다. 그래서 가게에서 필요한 물건을 좀 사고 사우나에 가서 기다리는데 가만히 보니 손님은 나 하나 밖에 없고 이제서 장작을 때느라고 바빴다. 이제 와서 안 한다고 할 수도 없어서 의자에 앉아있는데 장작을 때는 아이의 동생같이 보이는 꼬마가 들락날락 하기에 음료수를 주니 얼른 받는 것이 퍽 먹고 싶었나 보았다. 조금 기다리니 준비가 다 되었다고 하여 안으로 들어가니 샤워하는 곳이 세 군데 있고 탕이 하나 있고 자갈 같은 것을 통에 붙여 열을 내는 사우나 실이 하나 있었다. 우리 나라의 개인집 목욕탕보다 더 엉성하게 보였다. 사우나 실에 옷을 벗어놓고 샤워를 한 후 탕에 들어가려고 했더니 물도 차갑고 바닥을 보니 뱀이 바닥에 앉아 있었다. 깜짝 놀라 다시 나와 자세히 보니 머리가 세모를 이루고 있는 것이 독사인 것 같았다. 물을 안 채우다가 갑자기 물을 채우니 구석에 있던 뱀이 미쳐 빠져 나오지 못한 것 같았다. 조금 후에 보니 위치만 조금 바뀌었을 뿐 여전히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어느 구석에서 또 뱀이 나올지 몰라 허둥지둥 샤워를 하고는 얼른 옷을 입고 나와 주인 총각에게 뱀이 있다고 하며 탕 속의 뱀을 보라고 손짓했더니 보고는 깜짝 놀라는 눈치다. 사우나탕을 나와 혼자서 다시 우리 텐트가 있는 계곡으로 천천히 걸어 올라가는데 윤강명씨와 이제하 선생님이 배낭을 지고 내려온다. 몸이 아파서 이트콜 호텔에 가서 자겠다고 하였다. 이 날도 캠프 화이어를 하며 별을 바라보다가 텐트에 들어와 잠을 청했다.

 

31일 아침 어제 캠프 화이어를 하며 먹던 그릇을 닦으러 물가에 내려오니 어떤 짐승이 왔었는지 온통 반찬이나 오이 등을 흩어 놓았다. 모두 모아 놓고 설거지를 한 후 아침을 먹고 짐을 정리하여 계곡을 내려왔다. 이날은 버스를 빌려 타고 그린 호텔로 향했다. 처음에는 무슨 호텔 건물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냥 푸른 숲이 있는 곳이었다. 11시쯤 버스에서 내려 비포장 길을 터벅터벅 걸어갔다. 조금 올라가니 사람들이 대포에 다닥다닥 붙어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눈사태를 막기 위해 겨울에 산을 향해 쏜다는 것이다. 우리도 대포에 올라가 사진을 찍고 계속 올라갔다. 1215분쯤 그린 호텔에 도착하여 간식을 먹고 각자 알아서 놀다가 3시까지 모이라고 하였다. 나는 김숙임 선생님, 임만재 선생님과 근처의 봉우리를 향해 올라갔다. 빙하의 끝에서 얼음이 녹은 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며 천둥소리를 내고 있었다. 보통 얼음은 흰 색인데 빙하는 엷은 녹색을 띠고 있었다. 아니 녹색이라기 보다는 연두색과 하늘색의 중간색을 띠고 있었다. 어째서 그런 색이 나타나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3시에 모여 샤슬릭(양고기 바비큐)과 와인을 먹고 다시 비포장 길을 걸어 내려와 버스를 타고는 이트콜 호텔로 향했다. 호텔로 오는 도중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다. 이 비는 밤에도 그칠 줄 모르고 퍼부어서 우리는 또 길이 끊어지는 게 아닌가 걱정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81일 아침에 일어나니 하늘은 맑게 개였다. 그러나 간밤에 비가 너무 와서 길이 어떨지 모르니 치켓봉을 오르고 하루 더 묵으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곧장 미네랄 바디로 가서 묵기로 하였다. 아침 식사 후 짐을 챙겨 호텔 앞마당에서 버스를 기다렸으나 이 날도 9시에 오겠다던 버스는 10시가 넘어서 도착했다. 윤강명씨는 버스가 9시에 오면 손가락에 장을 지진다고 큰 소리 쳐서 혹시라도 제 시간에 버스가 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그런데 10시가 넘어 출발한 버스가 1시간도 못 가서 멈추었다. 앞에는 다른 차들이 10여대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검문이라도 하나 하고 내려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가이드가 가서 알아보더니 비가 많이 와서 원래의 도로는 유실되고 임시로 낸 도로로 가야하는데 길이 좁아서 일방통행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 나라에서처럼 일방통행이 금방금방 교대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루디는 차 속에서도 열심히 영어공부를 하고 있고 다른 러시아 사람들도 늘상 있는 일인지 차밖에 나와 천하태평으로 잡담들을 하고 있었다. 1시간이 넘게 기다리던 차들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서로들 새치기를 하고 마구 먼지를 일으키며 몰려들었다. 새치기한다고 화내는 사람도 없고 새치기는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산길을 새로 깎아 길을 냈는지 꼬불꼬불한 산길을 한 시간이 넘게 달렸다. 침수 지역인 디쎄리어라는 지역을 지나며 보니 지붕만 간신히 보이는 집도 많고 큰 건물도 기울어져 물에 잠기고 다리는 몇 동강이 나서 떠내려갔는지 가운데 부분만 댕강 남아있었다. 임시도로를 한 시간쯤 달려서야 겨우 다시 아스팔트길로 올라설 수 있었다. 2시에 휴게소에 들러 샤슬릭과 수박으로 요기를 하고 다시 차를 달려 삐아띠꼬르스꼬라는 곳에 있는 뚜아리스트 호텔에 도착하니 3시 반쯤 되었다. 우리는 샤워를 하고 백화점 구경을 나갔다. 물건은 별로 많지 않았고 좋은 물건도 별로 눈에 띠지 않았다. 백화점 옆에 있는 맥주 집에서 생맥주를 마시고는 호텔로 돌아와 저녁 식사를 하였다.

 

827시에 일어나 레닌 동상 위쪽에 있는 약수터에 가서 약수를 먹고는 호텔에 돌아와 아침 식사를 하고 9시에 민버디(미네랄 바디)공항으로 출발하였다. 공항에 도착하니 10시쯤 되었는데 화물을 부치려고 짐을 쌓아 놓고 기다리는데 공항 직원이 직접 우리 짐을 들고 가더니 우리 짐이 191kg이나 되어 71kg 초과되었으니 20몇 불을 더 내라는 것이다. 임만재 선생님이 우리 비행기 계약서를 보여주며 1인당 30kg씩 무료인데 무슨 소리냐고 했더니 그러면 11kg 초과되었으니 11불을 내라고 하여 냈더니 공항 직원이 자기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우리는 우리 짐이 191kg이나 나갈 리가 없어서 억울하다고 생각했지만 총까지 들고 서 있는 공항 직원들이 겁나서 그냥 내기로 하였다. 1140분쯤 걸어서 비행기까지 간 우리는 좌석도 지정되지 않은 엉성한 비행기표를 들고 비행기에 올랐다. 2시쯤 되어 모스크바 쉐르메체보 공항에 도착하니 첫날 보았던 한국인 가이드가 마중 나와 있었다. 우리는 오랜만에 마음놓고 한국인 가이드와 얘기하니 너무 편하고 좋았다. 모스크바로 이동하여 유람선을 타고 모스크바 시내를 구경하고 7시에 우크라이나 호텔에 투숙하였다. 우크라이나 호텔에서 바라보는 모스크바는 신비에 차고 실낱같은 초승달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839시에 우크라이나 호텔을 출발하여 벼룩 시장에서 딸에게 줄 우표를 샀다. 여기서 출발하여 등산 장비 점에 들러 각자 필요한 장비를 사고 1시에 점심 식사를 하고 크레믈린궁과 바실리 성당, 붉은 광장을 둘러보았다. 바실리 성당은 동화에 나오는 집같이 아름다웠는데 이것을 건축한 사람은 더 이상 아름다운 건물을 짓지 못하도록 왕이 눈을 뺐다고 하는데 사실인지 모르겠다. 6시에 모스크바 공항에 도착했으나 공항 직원들이 일을 하는지 마는지 짐을 부치는데 1시간 반이나 걸렸다. 비행기를 타고 밖을 내다보니 오는 날과 같이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815분에 공항을 출발하여 동쪽으로 향하니 곧 해가 붉은 구름의 바다로 가라앉았다. 잠시 눈을 부치고 깨니 다시 붉은 구름의 바다에서 붉은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서로 인사를 나누고는 역시 한국이 좋다고 하며 각자 집으로 서둘러 헤어졌다.

'기행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1. 1. 30. 비에 젖은 타이완  (0) 2012.10.13
2000. 12. 30. 제주도 지질답사  (0) 2012.10.13
1999. 8. 2. 미야자끼에 다녀와서  (0) 2012.10.13
1999. 8. 2. 고씨동굴에 다녀와서  (0) 2012.10.12
1998. 11. 19. 채란여행  (0) 2012.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