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2001. 1. 30. 비에 젖은 타이완

아~ 네모네! 2012. 10. 13. 14:04

 

 

 

비에 젖은 타이완

2001. 1. 30. ()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대만? 타이완?

확실히는 모르지만 우리 발음으로 읽으면 대만이고 중국식 발음으로 읽으면 타이완인가보다. 이름이야 어찌됐던 지난 26일에서 29일까지 34일로 대만에 다녀왔다. 10년 전에 구의 중학교에서 같이 근무하던 선생님들과 1년에 두어 번씩 만났는데 만날 때마다 조금씩 모은 돈이 1000만원이 넘게 모여서 모처럼 해외여행을 가보기로 하였다. 그래서 날짜를 맞추다보니 34일이 나오고, 날짜에 맞추다보니 대만으로 정하게 되었다.

 

26935분 비행기를 타기 위해 6시에 집을 나서 군자역에서 윤정옥 선생님을 만나 5호선 열차를 타고 공항에 들어가 2층 신한은행 앞에 가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모이라는 시간이 넘었는데 웬일인가? 하고 짐을 의자에 놓고 윤정옥 선생님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더니 저쪽에 신한은행이 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짐을 들고 가보니 여행사 사람과 기산희 선생님, 우은희 선생님, 노혜정 선생님 모두 모여 있었다. 노혜정 선생님은 이번에 중학교를 졸업하는 아들도 데리고 왔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정영숙 선생님이 나타나지를 않는다. 윤정옥 선생님이 아마 그 선생님도 우리 모양으로 다른 쪽 신한은행에서 기다리나보다고 가보자고 하여 그쪽으로 가보니 아니나다를까? 그곳에서 짐을 땅에 놓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여권을 받아 외환은행으로 가서 미국 달러와 대만 달러로 환전을 하고 다시 제자리로 오니 여행사 직원이 우리에게 비행기표를 주고, 대만에 도착하면 다이너스티 텔레콤 여행사 직원이 나와서 기다릴꺼라고 하고는 가버렸다. X-ray 투시기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 면세점을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다가 10번 게이트 앞으로 가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안내판에 boarding이란 말이 오르자 곧 사람들이 몰려들어 타기 시작했다. 우리도 타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기산희 선생님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 기다리니 면세점에서 물건을 찾아가지고 부지런히 오고 있었다. 우리는 가이드가 없어서 불안했지만 그래도 7명이나 되니 어떻게 되겠지 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우리 자리는 여기 저기 떨어져 있었지만 빈자리도 많아서 자리를 바꾸어 같이 앉았다. 밥 한끼 먹고 의자에 붙어있는 단추를 이것저것 누르며 탐색을 하다보니 잠잘 틈도 없이 금방 중정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수속을 마치고 출구로 나가 아무리 다이너스티 텔레콤이란 글씨를 찾아도 그런 팻말을 든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그래도 해외여행 경험이 많은 기산희 선생님이 서울로 전화를 해보자고 하다가 그것보다는 롯데관광 팻말을 든 사람에게 물어보는 게 낫겠다고 물으러 갔다. 우리는 불안감을 억누르고 의자에 앉아 기산희 선생님이 오기만 기다렸다. 조금 후 기산희 선생님이 오더니 그 여행사 직원이 아직 안 나왔으니 조금 더 기다려보라고 했다면서 기다려보자고 하였다. 과연 조금 기다리니 한 여자가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다이너스티텔레콤 여행객이냐고 묻는다. 우리는 구세주라도 만난 듯 기뻐서 그렇다고 하며 얼른 일어섰다. 가이드는 차가 밀려서 늦었다고 사과를 하며 버스 기사에게 출구 쪽으로 오라고 전화를 할 테니 화장실에 다녀오라고 해서 그제서야 모두 화장실에 갔다. 가이드를 잃어버릴까봐 겁이 나서 가이드 이름과 핸드폰 번호를 적고 가이드를 졸졸졸 따라갔다. 우리 일행이 7명밖에 안되니 작은 승합차가 나왔다. 우리는 짐을 차에 싣고 타이뻬이로 이동하여 점심을 먹은 후 중정기념관으로 갔다. 차에서 내리는데 죽은 쥐가 아스팔트 길 위에 팅팅 불은 채 누워있어서 모두들 깜짝 놀랐다. 중국에는 쥐가 많은가보다. 그런데 중정은 장개석의 호이고, 이 사람의 일생을 전시해 놓은 곳이 중정기념관이란다. 어렸을 때부터 결혼하고 늙을 때까지의 모습이 사진으로 쭉 전시되어있었다. 그리고 건물의 2층에는 장개석의 동상이 본토를 향하여 육중하게 앉아있었다. 마침 위병 교대식을 하는데 위병들이 어찌나 말랐는지 마른 막대기에 제복을 걸쳐놓은 것 같았다. 또 걸음걸이는 어찌나 느리고 딱딱한지 마치 로보트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어느 집 아들인지는 몰라도 저거 하느라고 엄청 연습하고 고생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병 교대식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비는 철철 내리는데 지렁이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그런데 대만 지렁이는 중국 본토에서 넘어왔나 엄청나게 컸다. 언뜻 보면 작은 뱀 같았다. 지렁이를 피해 조심해서 걸으며 연못에 가서 가이드가 사온 잉어밥을 주었다. 연못에는 잉어가 어찌나 많은지 말 그대로 물 반, 고기 반이었다. 사람들이 얼마나 먹이를 많이 주었는지 몸이 퉁퉁하게 살이 쪘다. 이날은 비도 많이 오고 새벽부터 일어나 피곤하니 관광은 그만두고 호텔로 향했다. 제후반점(帝后飯店)이라고 써 있어서 무슨 중국 음식점인 줄 알았더니 그게 호텔이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왜 반점이 음식점으로 뜻이 변했는지 모르겠다.

호텔에 짐을 풀고는 과일을 사 먹자고 야시장으로 나갔다. 가이드가 없어서 우리는 리야카에서 과일을 파는 아저씨에게

"How much is it?"

해봤자 알 리가 없었다. 이번에는 가이드가 준 종이를 꺼내서

또아샤 치엔?”

하니까 알아듣기는 한 것 같은데 얼마라고 해봐야 이번에는 우리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우리가 먹고 싶은 만큼 봉지에 담아서 얼마냐고 물으니 저울에 올려서 값을 보여준다. 저울에 표시된 대로 돈을 주고는 호텔 방에 와서 이것저것 먹어보니 맛있는 것도 있고 영 먹기 힘든 것도 있었다.

 

27일은 8시에 아침 식사를 하고 9시에 고궁 박물관으로 향했다. 이 박물관은 장개석의 네 번째 부인인 송미련 여사가 설계했다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전체가 4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3층에 가장 볼 것이 많다고 하여 먼저 3층으로 올라갔다. 이 박물관에는 총 72만점의 물품이 저장되어 있는데 한 번에 8천 점씩 교대로 전시한다고 한다. 그래서 전체를 보려면 8년의 세월이 걸린다고 하니 그 규모가 가히 상상하기 어려웠다. 장개석이 이 유물들을 배에 싣고 대만으로 올 때 모택동의 부하들이 배를 폭파시키려고 하자 모택동이 못하게 말렸다는 것이다. 과연 큰 인물은 생각하는 폭이 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기기묘묘한 보물이 많았는데 상아로 만든 몇 겹 두께의 구와 탑들은 정말 볼 만했다. 겉에서부터 조각을 하여 둥근 구멍으로 칼을 넣어 안쪽의 구를 조각하는 방법으로 그렇게 여러 겹의 구를 만들었다니 얼마나 눈이 좋고 손이 예리한지 지금 사람은 감히 생각도 못할 일이다. 또 상아를 얼마나 얇고 가늘게 조각을 했는지 실보다 더 가늘게 보였다. 언뜻 보면 비단 천 같았다. 이런 것은 보통 70년 동안 3대에 걸쳐서 조각을 했다니 중국인들의 끈기와 인내는 정말 본받을 만하다. 그리고 서태후가 사용했던 병풍은 옥으로 만들었는데 큰 옥을 갈아서 얇게 만든 후 거기다 조각을 했다는 것이다. 그 큰 돌을 그토록 얇게 갈려면 얼마나 오랜 세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고생했을까? 지금은 전기톱으로 드르륵 자르면 순식간에 될 것을 일일이 손으로 갈았으니 정말 우리보고 하라면 미치고 환장할 일이다. 박물관을 나와 두 마리 용이 승천하여 생겼다는 쌍계공원과, 장개석과 함께 나라를 세운 5만 명의 위패를 모셨다는 충렬사를 보고 식당으로 향했다.

점심에는 몽골리안 바베큐를 먹었는데 야채와 고기를 담아 가면 즉석에서 요리를 해주는 곳이었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야류 해상 공원으로 향했다. 여기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들어가는 입구 양쪽에 있는 음식점과 진입로에 사람들이 가득 차서 콩나물 시루 같고 걸음을 옮기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진입로를 빠져 나오니 갑자기 앞이 탁 트이고 버섯 모양의 바위가 곳곳에 널려있었다. 사암이 오랜 세월 풍화 작용을 받아 이루어졌다는데 촛대바위, 선녀신발 바위, 클레오파트라 바위 등등 별별 형상이 다 있었다. 우리는 각 바위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클레오파트라는 목이 어찌나 가는지 앞으로 수명이 30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30년이 지나면 목이 너무 가늘어져 부러지고 머리가 떨어질 것이라고 한다. 참 클레오파트라 목이 떨어지기 전에 보았으니 우리는 모두 행운아들이다.

야류 해상공원을 나와 이번에는 용산사로 향했는데 오는 길에 공동 묘지를 지나왔다. 그런데 여기 묘지는 우리처럼 봉분을 만든 것이 아니고 집을 지어 놓았다. 아마도 그런 집에는 강시가 사나보다. 용산사에 도착하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어찌나 많은 사람들이 향을 태우며 주문을 외우고 절을 하는지 온통 향의 연기가 자욱해서 완전 너구리 잡게 생겼다. 그래도 한 바퀴 돌고는 문으로 나왔는데 노혜정 선생님의 아들 세원이가 관우상 앞에서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하여 다시 들어가 사진을 찍었는데 주위는 어둡고 비는 쏟아져 잘 나왔으려나 모르겠다. 비를 철철 맞으며 용산사를 나오니 승합차 기사가 우산을 들고 와서 하나씩 나누어준다. 여기는 비가 자주 와서 버스에 우산이 비치되어 있었다. 우산을 받고 야시장으로 가니 곳곳에 뱀을 잡아서 매달아 놓고 피를 빼고 있었다. 안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서 뱀탕에 뱀 튀김을 먹고 있었다. 우리는 쳐다보기도 겁나는데 중국여자들은 다 먹고는 느긋하게 이를 쑤시고 있었다. 안쪽까지 들어가 구경을 하고 나왔는데 이번에도 노혜정 선생님과 세원이가 안 보였다. 한참을 기다리니 뱀 잡는 구경을 하느라고 늦었다고 하며 둘이서 나타난다. 야시장을 나와 매운탕으로 저녁을 먹고는 호텔로 향했다. 이날도 호텔 옆 시장에서 과일을 사고 빵 가게에서 빵을 사 가지고는 호텔에 들어가 또 야식을 먹었다. 다음 날은 화련으로 가야하기 때문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28일은 아침을 7시에 먹고 8시에 호텔을 출발하여 기차역으로 향했다. 그런데 기차역에 도착하여 가이드가 표를 나누어주는데 가만히 보니 717분 표였다. 다들 놀라서 어떻게 하나 걱정을 하는데 가이드는 얼굴 색도 안 변하고 태연하였다. 우리보고 들어가서 기다리라고 하더니 역무원에게 가서 뭐라고 했는지 그냥 타라고 한다. 좌석이 많이 남아있으니 빈 자리에 앉으라는 것이다. 우리 나라 같으면 다시 표를 끊어야 하는데 그냥 그 표로 태워주는 게 참 희한했다. 우리는 빈자리에 앉아 있다가 좌석 임자가 오면 다른 자리로 이동하며 그래도 끝까지 앉아서 잘 갔다. 우리 앞에는 중국인 부부와 두 아들이 앉아있었는데 가만히 보니 여자는 앞좌석에 앉아 잠만 쿨쿨 자고, 두 아들을 다 아빠가 데리고 놀고 있었다. 빵도 먹이고, 화장실도 데리고 가고 잠이 들면 자리에 뉘고 하면서 혼자 애 둘을 다 보느라고 바쁜데, 여자는 실컷 자고 나서 부시시 일어나 화장실 갔다오더니 꾸역꾸역 먹고 또 잔다. 요리도 주로 남자들이 한다던데 참 중국 남자들은 피곤하게 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련에 도착하여 점심 식사를 하고는 대리석 공장을 견학하였다. 마침 휴일이라 기계들은 모두 멈추어 있었다.

공장 옆의 가게에서 쇼핑을 하고는 태로각의 대리석 협곡으로 향했다. 계곡이 온통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돌을 정으로 쪼아내어 파서 길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물은 대리석이 부서진 흙과 모래가 섞여 온통 잿빛을 띠고 있었다. 조금 들어가니 장춘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 도로를 낼 때 죽은 사람들의 위패를 모신 절이라고 했다. 이 길은 장개석의 아들 장경국이 냈는데 이때 많은 도움을 준 고산족 청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청년이 도로 공사 중 죽자 그의 동상을 만들고, 여기서 조금 지난 곳에 자모교(慈母橋)라는 다리도 만들었다. 자애로운 어머니라는 뜻의 이 다리는 이 청년의 어머니가 매일 밥을 들고 찾아와 아들에게 먹이던 곳에 세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뿐인 이 아들이 죽자 장경국이 그의 업적을 기리려고 동상을 세우고 다리 옆에는 자모정이란 정자도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는 녹수라는 곳에서 꽃차를 마시고는 차를 돌려 다시 되돌아 나오는데 길이 좁아서 곳곳에서 후진을 하며 서로 피하느라고 애를 쓰면서 겨우겨우 빠져 나왔다.

화련에서 현지식으로 식사를 한 후 720분에 시작하는 고산족 쇼를 보러갔다. 우리는 일찍 도착하여 그곳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제일 앞좌석에 앉았다. 고산족 아가씨들은 자그마하고 예쁘게 생겼는데 춤도 잘 추고 노래 소리도 영혼 깊숙히서 나오는 듯 신비에 차 있었다. 두 명이 막대기를 부딪치는 사이로 두 발을 들락날락하는데 발이 끼지 않고 요리조리 피하며 춤을 추는 것이 참 희한했다. 이 춤이 끝나고 무당굿을 하는지 한 여자가 무슨 나뭇잎을 흔들고 몇 명을 나오라고 하는데 우리의 용감한 총무 노혜정 선생님이 앞으로 나갔다. 엎드리라고 하고 나뭇잎으로 온 몸을 쓸어내리는 것이 잡귀를 몰아내는 것 같았다. 쇼가 끝난 후 아스타 호텔로 돌아와 이 날은 차를 마시러 갔다. 호텔 옆에 석두족낙원(石頭族樂園)이란 까페였는데 돌대가리가 사는 낙원이란 뜻인지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차는 맛이 있었다. 그런데 차를 어찌나 많이 주는지 1인분이 한 잔이 아니라 한 주전자였다. 우리는 마시다 마시다 포기를 하고는 다시 호텔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29일은 6시에 일어나 7시에 아침을 먹고 740분에 호텔을 출발하여 국내선 화련 비행장으로 향했다. 이날도 여전히 밤새 비가 오고도 모자라 아침에도 가는 비가 내렸다. 820분 비행기를 타고 출발하려는데 갑자기 어디서 멍멍하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웬 개소린가? 방송에서 나오는 소린가 했더니 그게 아니고 진짜 개소리였다. 참 비행기 속에 개까지 태우다니 참 기가 막혔다. 그러나 늘상 있는 일인지 중국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있었다. 어찌 보면 대범한 것 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무딘 것 같기도 했다. 9시쯤 다시 타이페이에 도착하여 공자묘와 보안궁을 보았다. 공자묘에는 묘는 없고 위패만 모셔있었고, 보안궁에는 관우상이 모셔있었다. 점심을 먹고 영빈관으로 쓰는 그랜드호텔에 가서 사진을 찍고 면세점에 들러 쇼핑을 한 후 중정공항으로 갔다. 450분에 출발인데 공항에 도착하니 2시도 안되어 다시 공항 면세점을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다가 칠보로 된 티스푼을 두 개 샀다. 시간이 되어 비행기에 오르니 그제서야 처음으로 햇님이 얼굴을 내민다. 4일 내내 우리 꼴 안 보려는 듯 구름 속에 숨어있던 햇님이 너무 미안했는지 얼굴을 내미는데 참 얼굴 잊어먹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올 때도 밥 한 번 먹고 눈 좀 붙이려니 금새 김포에 도착한다. 김포에 내려 화장실에 간 우리들은 우리 나라 화장실이 제일 깨끗하고 좋다면서 한국이 최고라고 만족해하며 각자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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