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빈 강정
이현숙
누가 줬는지 생각도 잘 안 나는 지갑을 수십 년째 쓰고 있다. 아마 남편이 예원학교 근무할 때 학부형이 준 거 같다.
나는 따로 지갑을 가지고 다니지 않고 휴지를 넣는 비닐봉지를 지갑 대용으로 썼다. 교회에서 전도용으로 나눠주는 거나 다른 광고용으로 길거리에서 나눠주는 비닐봉지에 돈을 넣으면 가볍기도 하고 물에 젖지도 않아서 안성맞춤이다.
한 번은 동생과 마트에 가서 물건을 사고 비닐봉지를 꺼내 계산했더니 동생이 보고 기가 막힌 지
"언니, 지갑 하나 사." 한다.
그래도 이게 편해서 계속 썼는데 하루는 남편이 지갑을 하나 들고 왔다. 학부형이 줬다는 것이다. 그 때는 김영란 법도 없고 아무 개념도 없어서 주는대로 넙죽넙죽 잘도 받았다. 그래서 그 후로는 이 지갑과 비닐봉지를 함께 썼다.
고등학교 친구 모임에 갔다가 무심코 이 지갑을 꺼냈더니 요심이란 친구가 그 지갑 좀 보자고 한다. 왜 그러나 하며 주었더니 안쪽을 열어보며 이거 폐로가모라는 명품 지갑인데 100만원도 넘는 거란다. 다시 받아 자세히 들여다보니 '살바도르 페라가모'라고 쓰여있다. 페라가모인지 패러 가는지 모르지만 참 지갑 하나에 100만 원이라니 기가 막힌다. 그 지갑 속에는 달랑 만 원짜리 몇 장 들었을 뿐인데. 이런 걸 속 빈 강정이라고 해야 하나. 지갑만 삐까뻔쩍하면 뭘 하나 속에 든 게 없는데.
이 지갑을 볼 때면 내 모습을 보는 듯하다. 무늬는 KS인데 속에 든 건 아무 것도 없다. 남들은 KS라고 엄청 똑똑한 줄 아는데 그야말로 일자무식이다.
일전에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내렸다가 와 보니 핸드폰이 안 보인다. 깜짝 놀라서 쓰레기 버리다가 같이 버렸나보다고 뛰쳐 내려가니 버스 기사 아저씨가 뒤에서 부른다. 차에서 핸드폰 소리가 난다는 것이다. 누가 내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단다. 다시 올라와 보니 배낭 옆주머니에 있다.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하며 서울대 나온 사람도 이러냐고 한다. 그러면서 한바탕 웃게 해줘서 고맙단다. 나이가 들면 배운 년이나 안 배운 년이나 다 평준화된다고 하더니 그 말이 딱 맞는다. 아니 이제 평균도 안 된다. 어찌보면 KS가 훨씬 멍청하다. 교과서만 달달 외워서 시험은 잘 봤는지 모르겠는데 일반 상식은 완전 허당이다. 이대 나온 내 동생들이 나보다 훨씬 똑똑하다.
어차피 속이 비었으니 어쩌겠는가 죽는 날까지 계속 속빈 강정으로 살아갈 수밖에.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025. 12. 30. 이게 웬 난리 (5) | 2026.01.03 |
|---|---|
| 2025. 12. 22. 이게 웬 금 (6) | 2025.12.22 |
| 2025. 12. 12. 연주대에 올라 (6) | 2025.12.15 |
| 2025. 10. 10. 싸느냐 참느냐 (0) | 2025.12.10 |
| 2025. 12. 6. 억울한 명품백 (0) | 2025.1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