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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2024. 8. 26. 독거노인 맞네

by 아~ 네모네! 2024. 8. 26.

독거노인 맞네

이현숙

 

  낮잠을 자려고 소파에 누웠는데 난데없이 초인종이 울린다. 누구세요? 하며 부랴부랴 윗옷을 걸치고 문을 여니 웬 여자가 서류를 들고 서 있다. 통장이란다. 서류에는 사람들 명단과 주소가 가득 적혀있다. 혼자 사느냐고 하기에 그렇다고 하니 주민센터에서 독거노인 상황 조사를 한단다. 얼마 전 한 노인이 혼자 집에 있다가 온열질환으로 숨졌다는 것이다. 누가 집에 있었으면 119라도 불러줬을 텐데 안타깝다. 집에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하기에 아들네가 자주 온다고 하니 1주일에 몇 번 오는지 묻는다. 주말에 한 번씩 온다고 하니 열심히 적는다.

  주민센터에서 정기적으로 관리를 받겠느냐고 한다. 전화만 받는 것도 되고 가정 방문을 받아도 된단다. 이것저것 묻는데 전부 안 한다고 하니 필요할 때 연락하라고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주고 간다. 언제 필요할지 모르니 냉장고에 잘 붙여놨다. 이걸 보고 있자니 진짜 독거노인이 됐다는 느낌이 든다.

  소파에 앉아서 냉장고에 붙은 종이를 보고 있자니 우리나라 좋은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옛날 같았으면 누가 혼자 있다가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 일일이 가정 방문까지 하면서 노인들을 보살펴 주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얼마나 되느냐 말이다. 무료 반찬 서비스도 있는데 주 1회 밑반찬을 배달해주는 경우도 있고, 7회 도시락 배달도 있다. 노인 맞춤 돌봄 서비스도 있고, 경로식당도 있다. 굶어 죽을 일은 없겠다. 아직은 수족을 움직일 만하니 내가 해 먹다가 이게 힘들어지면 이 서비스를 이용해야겠다.

  이제 만으로 75세가 되었으니 누가 봐도 어르신이요 독거노인이다. 얼마 전 고지혈약과 고혈압약을 타러 내과에 갔다. 의사는 당뇨 수치도 높다고 하며 당뇨병 전 단계이니 탄수화물을 줄이고 운동을 많이 하라고 한다. 운동은 얼마나 하느냐고 묻기에 주 3회 요가하고 등산도 가끔 한다고 했더니 등산은 1주일에 몇 번이나 하냐고 한다. 3번 정도 한다고 하니 얼마나 걷느냐고 한다. 조금 걸을 때도 있고 어제 같은 날은 7시간 걸었다고 하니 기가 찬다는 듯 쳐다보며 그렇게 하면 안 되고 한 두 시간씩만 걸으라고 한다. 어지럽지는 않으냐고 해서 산에서 내려올 때 어지럽다고 했더니 이런 더위에 그렇게 걸으면 탈수 증상이 생겨 어지러운 게 당연하다며 조금씩만 걸으라고 한다. 올해는 유난히 더 덥다. 기상 관측 이래 열대야가 가장 길다고 한다. 갈수록 더 더워진다고 하며 올해가 가장 시원한 여름이 될 거라고도 한다.

  식탁에는 약이 즐비하다. 고혈압약, 고지혈증약, 눈 다래끼약, 삐콤씨, 관절 약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화장대에는 백내장약, 다래끼용 안약, 항생제 안연고, 인공눈물, 알레르기성 비염에 바르는 바셀린, 입안의 염증에 뿌리는 프로폴리스 스프레이가 버티고 있다. 화장실에는 사타구니에 염증 생겼을 때 바르는 세레스톤지 크림, 벌레 물렸을 때 바르는 약이 있다. 온 집안이 약으로 도배를 한 듯하다. 어디를 보나 독거노인이 사는 집이다. 노인 냄새가 팍팍 난다.

  교회에서 점심 먹을 때도 경로석을 따로 만들어 놓고 거기 앉으라고 한다. 그러면서 이것저것 챙겨준다. 노약자라고 식사 당번도 빼줬다. 일은 안 하고 앉아서 받아먹기만 하려니 어쩐지 뒤통수가 가렵다. 가만히 있어도 더운데 불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미안하다. 그래도 매주 꼬박꼬박 잘 얻어먹고 온다.

  엘리베이터 교체 공사를 한 후 엘리베이터 앞에만 서면 뭐라고 하는데 아무리 잘 들으려 해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열흘이 넘도록 수십 번을 들었는데도 안 들린다. 얼마 전 아들네와 저녁을 먹고 우리 아파트에 왔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 또 소리가 나온다. 아들에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몇 층으로 가세요?” 라는 거란다. 그 후 잘 들어보니 정말 맞다. 얼마 후 지인들과 북한산에 가며 이 얘기를 하니 AI가 그렇게 말했을 때  층 수를 말하면 그 층이 눌러져 있느냐고 한다. 난 미처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 했다. 그래서 집에 오는 길에 한 번 “13층이요.” 해봤더니 10층이 눌러져 있다. 그 후에 계속해봐도 4층도 들어오고, 5층도 들어오고, 10층도 들어오고, 아예 안 들어올 때도 있다. 아주 개무시한다. 난 찰떡같이 말하는 거 같은데 개떡같이 알아듣는다. 13층이라고 하는데 왜 생뚱맞게 5층이라고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수 십 번 말한 중 13층에 불이 들어온 것은 딱 두 번이다. AI도 난청인지 아니면 내 발음이 틀렸는지 다음에 아들이 오면 말해보라고 해야겠다. 젊은 사람 말은 제대로 들으려나?

  이비인후과에서 노인성 난청 판결을 받은 것이 10년도 넘었다. 지난 6월에는 독일 여행을 갔다가 쾨니제 호수에서 배를 탔다. 가이드가 호숫가에서 트럼펫을 불며 메아리를 들어보라고 하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다 탄성을 지르는데 멍하니 있으려니 뻘쭘하다. 노인성 난청이 확실하다.

  그런데 내가 생각해도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날뛰는 거 같다. 노약자는 외출하지 말라고 해도 그냥 무시하고 나돌아다닌다. 독거는 맞는데 노인은 아니라고 착각하고 살았다. 이제 외모로 보나 내모로 보나 나는 노인이 맞다. 자타가 공인하는 독거노인이 되었으니 경거망동하지 말고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말 잘 듣고, 의사가 얘기하는 대로 잘 실천해야겠다. 이렇게 날뛰다가는 제 명에 못 죽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