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2022. 10. 20. 베드로순례길 3

아~ 네모네! 2022. 11. 25.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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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에 카톡방을 보니 목사님 메시지가 있다. 우리 일행을 위해 커피라도 한 잔씩 대접하고 싶으니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 하신다. 며칠 전에도 이런 글을 보내셔서 기도만이라도 감사하다고 했다. 그런데 담임목사로서 응원하고 싶다고 베푸는 기쁨도 있다고 하시니 어떻게 할까 망설이는데 순자 씨가 주시는 것은 받고 대신 선물을 사드리라고 한다. 좋은 생각이다 싶어 계좌번호를 알려드렸더니 즉시 입금하셨다. 목사 노릇도 참 힘들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목사안수를 받은 아들에게 이런 경우 어떻게 하라고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식당으로 내려가 빵을 먹으며 앞을 바라보니 벽에 미술 작품이 걸렸다. 무슨 넝마 쪼가리를 붙여놓은 것 같다. 저런 것도 작품이 되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미숙 씨도 한마디 한다. 무슨 마대 조각을 붙여놓은 것 같다고 한다. 누드도 그렇고 어디까지가 예술인지 알 수 없다.

  어제 비가 오더니, 하루 사이에 겨울로 변했다. 호텔을 출발하여 베트랄라로 향한다. 절벽 길이 나타난다. 바위산을 깎아 만든 길이다. 외적을 막아내기에 딱 좋게 생겼다.

  차에서 아침부터 예스터데이 음악을 튼다. 남편이 있던 때가 생각나 또 눈물이 난다. 항상 어제가 오늘보다 낫다는 생각이 드니 이게 문제다. 순례길을 걷다 보니 여기도 허수아비가 있다. 아주 세련되게 생겼다. 이탈리아는 허수아비도 멋지다.

  고속도로 밑 토끼굴을 지난다. 벽에는 낙서가 가득하다. 왜 사람은 빈 벽만 보면 낙서를 할까?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나 보다. 자신의 DNA를 남기려고 짝을 찾아 헤매고 어떤 사람은 그림이나 소리로 흔적을 남긴다.

  베트랄라인지 배틀어 버릴라인지를 향해 걷는다. 올리브 나무 아래서 간식을 먹는다. 오렌지 잎이 햇빛에 반짝인다. 어른들은 올리브 수확이 한창인데 어린아이 하나가 공을 차며 놀고 있다. 바람에 옷이 날아가자 달려와서 잡아든다.

  길가에 스탬프와 방명록이 있어서 도장도 찍고

'TNT 왔다 갑니다

2022. 11. 5.

SOUTH KOREA' 라고 썼다.

  오늘도 길가에서 김 사장님을 만나 샌드위치로 점심을 해결하고 베트랄라 시내로 들어갔다. 카페에 들러 커피도 마시고 도장도 찍고 화장실에도 갔다. 온 동네가 한적하니 죽은 도시 같다. 성당 문도 잠겨 있다. 성당 앞 의자가 예쁘다. 여기 앉아 사진을 찍고 쌩쌩 부는 바람에 쫓겨 차를 타고 호텔로 갔다.

  오늘 묵는 호텔에서는 코로나 예방접종 표를 요구한다. 고급호텔인지 웰컴티도 준다. 로비의 인테리어도 가을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저녁 식사 때 목사님이 보내주신 돈으로 와인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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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까지 80km 남았다. 비록 가끔씩 차를 타긴 했지만 15일 동안 열심히 걸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걸었더니 별 감흥이 없다. 오늘 오전에는 세 명이 호텔에서 쉬겠다고 하니 셋이 걸어야 한다. 체력도 안 되면서 무작정 덤비는 내가 좀 멍청하기는 하다. 어제는 왼쪽 종아리 근육이 단단하게 뭉치고 아파서 박찬호 크림을 듬뿍 발랐다. 오늘은 엊저녁에 간 베트랄라 성당에서 수트리까지 걷는다. 수 틀리면 안 걸을 수도 있다.

  우리 호텔에 작은 성당도 있다. 오늘의 여정을 위해 기도하고 베트랄라로 갔다. 성당에 들어가니 미사 중이다. 한 아저씨는 강아지를 데리고 왔다. 이탈리아는 성당에 강아지 데리고 들어와도 되나 보다. 강아지가 주인 무릎에 바짝 기대고 얌전히 앉아 있다.

  숲길을 걷는다. 강아지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 조깅하는 사람,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많다. 멧돼지가 많은지 곳곳에 멧돼지 그림이 붙어있고 멧돼지가 땅을 파헤친 흔적도 많다.

  걷다 보면 5번 동생이 연신 카톡을 보낸다. 쌀이 어디 있냐? 소금이 어디 있냐? 면봉은 어디 있냐 물으니 걸으며 답장하기 바쁘다. 요새 5번 동생이 집수리 하느라 우리 집에서 지낸다.

  큰길을 만나 우리 차를 기다리기로 했다. 기다리는 와중에 미숙 씨는 길에 떨어진 호두를 까먹는다. 장미숙은 사막에 던져놔도 살아나올 것이라던 원장님 말이 생각난다.

  금방 온다던 차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한참 기다리니 차가 왔는데 차가 설 수 없다고 하여 차도를 걸어 카페까지 가서 샌드위치를 먹었다.

  중간에 만나기로 한 곳에 훨씬 못 미치는 곳이다. 내가 걸음이 느려 매일 스케줄대로 걷지 못하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아무래도 순례길은 혼자서 걷는 게 좋을 듯하다. 혼자서 걷다가 길 위에서 죽는다고 해도 여한은 없을 것 같다. 길 위에서 죽으면 순례자가 순교자로 승격되려나?

  중간 미팅 장소까지는 차로 이동하여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오후에 걷는 길은 원시림처럼 우거진 산길이다. 폭포도 있고 나무다리도 있어 우리나라 산길을 걷는 기분이다. 숲속에는 순례길 표지판이 바위에도 붙어있고 나무토막에도 붙어있다. 집의 담벽에 있는 붉은색과 흰색도 순례길 표시다.

  나무에 해골 모형도 걸어놨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해골도 친숙하게 느끼나 보다. 하긴 모든 사람 안에는 해골이 들어 있으니 친숙한 게 맞다.

  어찌 보면 모든 사람은 순례자가 아닐까?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런 일 저런 일, 온갖 풍상을 겪는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을 만나 사랑하고 미워하며 아귀다툼을 하다 보면 죽음이 바로 코앞에 나타날 것이다. 죽음의 문턱을 넘는 순간 우리의 순례길도 끝날 것이다.

  수트리에 도착하여 카페에 들러 커피도 마시고 도장도 찍었다. 시청 앞 광장에 있는 미용실에 이상한 간판이 붙었다. 머리는 정상인데 얼굴이 거꾸로 그려져 있다. 무슨 맘 먹고 이렇게 그렸나 모르겠다. 하지만 눈길을 끄는 것은 확실하다.

  두오모 성당에 들어가니 제단 밑으로 들어가는 계단이 보인다. 지하로 내려가니 거기도 제단이 있고 기둥이 멋지다. 갑자기 불이 꺼지니 캄캄절벽이다. 모두들 핸드폰 플래시를 켜고 나왔다. 요새는 핸드폰이면 안 되는 게 없다. 성당에서 나와 호텔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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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텔 방에 누워 창밖을 바라본다. 아침 햇살에 나뭇잎이 반짝인다. 나무는 평생을 한 자리에 박혀 살다가 생을 마감한다. 답답할까? 하긴 인간도 지구의 중력에 붙잡혀 꼼짝없이 갇혀 지내니 나무와 다를 바가 없다. 차를 타고 폭포를 보러 갔다. 제법 규모가 크다. 로마 시대 문과 망루도 있다.

  수트리로 가서 선사시대 동굴집을 보았다. 작은 동굴도 있고 큰 동굴도 있다. 큰 동굴은 부잣집인가 보다.

  동굴 앞 잔디밭에 석상이 서 있다. 순례자의 모양이다. 형체가 거의 알아보기 힘들다. 자세히 보니 얼굴 모습도 보이고 지팡이와 괴나리봇짐 진 모습도 보인다. 엄청 오래된 것같다. 오래전부터 순례자가 있었나 보다.

  수트리에서 걷기 시작해서 캄파냐노디로마를 향해 걷는다. 길가에 개암나무 농장이 많다. 길바닥에 개암과 호두가 널려있다. 개암으로 뭘 하는지 모르겠다. 개암의 이곳 이름이 헤이즐럿이라니 혜이즐럿 향을 만드는건가? 걷다 보니 골프장도 있다. 잔디밭에서 스프링클러가 돌아간다.

  몬테로시로 들어가 카페에서 커피도 마시고 스탬프도 찍었다. 조금 더 가니 베드로 할아버지 그림이 또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스탬프도 찍어주고 그림 전시도 한다. 뭔 전시인지는 몰라도 여자아이의 눈이 슬프다.

  한 성당에 들어가니 바닥 대리석에 MEMORIA라고 쓰여있고 그 아래 뭐라고 한참 적혀있는데 아마도 누군가의 비석인 듯하다. 이 아래는 유골이 안치된 것 같다.

  몬테로시를 나와 계속 걷는다. 김 사장님을 만나 죽과 샐러드를 먹고 또 걷는다. 개울도 지나고 들판 길을 걷는데 김 사장님이 현재 위치를 보내라고 한다. 구글 지도에 나타난 현 위치를 스캔해서 보냈더니 4km 정도 남았으니 50분 정도 더 오면 완주할 수 있겠다고 한다. 희망을 가지고 열나 걸었는데 한참 지나서 캄파냐노디로마까지 50분이란 이정표가 보인다. 큰일이다 싶어 발에 불이 나도록 걷는다. 길가의 나무에 천사 세 명이 그려져 있다. 여기서 천사가 된 기분으로 사진을 찍었다. 순례객들을 위해 천사를 그린 사람은 천사의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 겨우 캄파냐디로마에 도착했다. 중앙광장 앞 바에서 김 사장님이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도 도장을 찍고 본젤라또를 먹었다. 바에서 도장을 받는데 거꾸로 찍혔다. "~ 거꾸로 찍혔네?" 했더니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순자 씨 것은 똑바로 찍어준다.

  오늘도 37,000보나 걸었더니 왼쪽 발 속에 있는 신경종 때문에 발가락이 저리고 아프다. 박찬호 크림이 이런데도 효과가 있는지 모르겠는데 무조건 처바른다. 요새 믿을 거라곤 찬호밖에 없다.

호텔에 짐을 풀고 중국식당으로 갔다 여기는 일식도 겸하는데 뷔페식으로 무한정 먹을 수 있다. 모두들 엄청나게 과식했다. 내일 저녁에 또 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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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딸이 퇴원하는 날이다.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집에 왔느냐고 카톡을 보냈더니 집에 와서 점심을 먹고 쉬고 있단다. 두 달 만에 집에 온 딸을 생각하니 내 마음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하다. 남편은 병원에 입원한 후 집에도 못 오고 하늘나라로 갔는데 딸마저 가는 줄 알고 심장이 녹아내렸었다.

  아침에 배낭을 꾸리는데 스탬프 북이 안 보인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 완주증 받지 말라는 소린가보다 하며 포기하고 있는데 트렁크에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트렁크에 넣었나 보다. 거금 1,200만 원 주고 20일 동안 개고생한 게 수포로 돌아가는 줄 알았다. 갈수록 건망증이 심해지니 무슨 짓을 할지 불안 불안하다.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갔다. 시간이 아직 안 되었는지 문을 열지 않았다. 순자씨와 큰길로 내려가니 한 건물에 베드로 할아버지 그림이 두 개 있다. 한쪽은 비테르보, 한쪽은 로마로 가는 방향이라고 표시되어있다.

  오늘은 캄파냐노디로마에서 라스토르타까지 걷는다. 한 성당에 들어가니 순례자 그림도 있고 조각상도 있다. 둘 다 돼지를 끌고 간다. 돼지는 성경에서 부정한 짐승이라고 했는데 왜 돼지를 데리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포르멜로에 도착하여 서점에 들러 도장도 찍고 성당도 보았다. 동네가 참 예쁘다. 한 할머니가 유모차를 끌고 온다. 안을 들여다보니 아기가 누워있다. 그림처럼 예쁘다. 우리가 들여다보며 예쁘다고 하자 할머니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손자 예쁜 것은 동서양이 똑같다.

  포르멜로에서 나와 계속 걷는다. 한 집 철장 안에서 강아지 두 마리가 물끄러미 우리를 바라본다. 왜 짖지 않는지 모르겠다. 우리를 완전 개무시하나보다. 계속 더 가는데 한 여자가 개 세 마리를 데리고 산책한다. 한 마리는 줄에 묶었는데 두 마리는 맘 판 뛰어다닌다. 그중 한 마리가 우리를 향해 억척스럽게 짖는다. 앞으로 가서 짖고 뒤로 가서 짖고 생난리다. 이건 개환영인가? 주인이 미안한지 쏘리라고 한다.

  오늘은 목장길을 많이 걷는다. 대관령 목장 같다. 라스토르타에 도착하여 성당을 찾느라 우왕좌왕했다. 시내 끝까지 가니 성당이 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찬송 소리가 들린다. 어린아이들이 앉아 있다. 성가 연습을 하는 것 같다.

  호텔로 돌아와 오늘도 중국식당에 갔다. 김 사장님이 많이 먹으라고 소화제를 하나씩 나눠준다. 어제의 경험을 되살려 오늘은 맛있는 것만 골라 먹었다.

  오늘은 43천 걸음 걸었더니 온몸이 말씀이 아니다. 오늘도 박찬호 크림으로 도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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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드디어 로마로 입성하는 날이다. 출발하자마자 정연씨가 핸드폰이 없단다. 차를 돌려 호텔로 돌아갔다. 엊저녁에는 스탬프 북이 없다고 난리 치더니 모두 제정신이 아니다.

  바티간 4km 앞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다. 공원을 통과하여 도심을 지나 바티칸 베드로 성당 앞에 이르니 경찰들이 검문한다. 엑스레이 투시기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 줄을 섰다. 수많은 인파에 정신이 없다. 교황님이 나오셨다는데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할망구가 되어서 그런가 눈에 뵈는 게 없다. 미숙 씨는 보았다는데 나는 못 봤다. 교황님이 들어가시자 많은 사람이 흩어진다. 베드로 성당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의 줄이 끝없이 길다.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겨우 입장했다.

  베드로 성당은 다시 봐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기도하는 곳이니 조용히 하라는 한국말 표지판도 보인다.

  성당 앞 오벨리스크에서 김 사장님을 만나 카페에 가서 빵과 음료로 간단히 점심을 해결했다. 오벨리스크 앞에는 난민선에 타고 오는 사람들의 절박한 모습을 담은 조각상이 보인다. 언제나 이런 모습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

 

  1시부터 6시 사이에 순례길 인증서를 받을 수 있다고 하여 다시 베드로 성당으로 갔다. 스탬프 북을 보여주니 줄 서지 않고 들어가게 해준다. 다시 엑스레이 투시기를 지나 성당 옆에 붙은 체크룸으로 갔다. 김 사장님이 어제 여권과 스탬프 찍은 것을 복사해서 메일로 보냈기 때문인지 인증서 종이 7장을 주고 각자 이름을 쓰라고 한다. 스탬프 북에 마지막으로 바티칸 도장을 찍었다.

  인증서까지 받고 로마 관광에 나섰다. 판테온은 세상의 모든 신을 모신 만신전이다. 구멍 뚫린 천장이 인상적이다.

  진실의 입에도 사람들이 사진을 찍으려고 줄을 길게 서 있다. 로마의 휴일에서 그레고리 펙이 거짓말을 한 사람이 손을 넣으면 손이 잘린다고 거짓말을 한 기억도 떠오른다.

  개선문도 보았는데 나폴레옹 이걸 보고 파리에도 만들었는데 그는 살아서는 그 문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죽어서 시신이 개선문으로 들어왔단다. 예전에 보았던 콜로세움도 보았다. 콜로세움 위로 새들이 떼지어 날고 있다.

  트레비분수 앞에는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인간 홍수가 난 것 같다.

  스페인 광장 앞 계단은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이 아이스크림을 먹던 곳 같다.

김 사장님은 발이 어찌나 빠른지 도저히 따라다닐 수가 없다. 오늘은 4km만 걷는다고 해서 무릎에 파스도 안 붙였는데 도가니가 아작날 판이다. 나중에 정연씨가 파스를 줘서 붙였다. 순례길보다 관광하다가 돌아가시게 생겼다. 앞으로는 관광도 못 다니겠다.

  로마 관광을 마치고 한식당에 가려고 지하철을 타고 네 정류장 가서 한식부페를 먹었다. 식사 후 호텔에 가려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10정거장 가서 내렸다. 어느 방향으로 어떤 버스를 탈지 몰라서 우왕좌왕하다가 버스 기사에게 물으니 우리 호텔에 간다고 해서 얼른 탔다. 한참 가다가 김 사장이 아무래도 잘못 탄 것 같다고 해서 버스에서 내렸다. 길 가는 사람에게 물으니 반대 방향으로 몇 번 버스를 타라고 알려준다. 다시 버스를 타고 가다가 내려서 캄캄한 밤에 찻길을 따라 마냥 걸었다. 이러다 호텔도 못 찾고 날밤 새는 거 아닌가 겁이 더럭 난다. 김 사장이 앱을 보며 걷고 걸어 겨우 호텔에 도착했다. 10시가 넘었다.

  호텔 방에 들어와 탄산수를 끓여 맹물을 만들려고 커피포트를 콘센트에 꽂는 순간 불이 나간다. 깜깜 절벽이다. 핸드폰 불빛으로 겨우 프런트에 전화하여 전기가 나갔다고 하니 몇 번으로 전화하라고 한다. 신호는 가는데 받지를 않는다. 김 사장님 방 번호도 몰라 난감해하는데 복도에서 김 사장 소리가 들린다. 뛰어나가 불이 나갔다고 하니 방에 들어와 전원 차단기를 올려준다. 10년 감수했다. 샤워하고 밤 12시가 넘어서 겨우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도 36천 보 걸었다. 왼쪽 종아리가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되어 아프다. 오늘도 박찬호 크림으로 떡칠을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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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사람들이 다리가 긴 것인지 아니면 내 다리가 더 짧아진 것인지 변기에 앉으면 발이 땅에 닿지 않는다. 발이 대롱대롱 매달린 상태로 볼일을 본다.

  순례길 걸으며 노상 방뇨 참 많이 했다. 이탈리아 땅에 거름 많이 주고 간접흡연도 많이 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실내에서도 실외에서도 마구 피워댄다. 도심지를 걸으면 자동차 매연과 담배 냄새 때문에 숨쉬기가 괴롭다.

  오늘은 티볼리로 향했다. 가는 길에 폭포를 본다고 내렸다. 2단 폭포라서 멋지다. 주차장에서 그동안 주웠던 호두를 까먹느라 정신이 없다. 시멘트 바닥에 비닐봉지채 놓고 짓밟으니 아주 잘 깨진다. 최 사장님도 호두 까는 재미가 단단히 들었다. 폭포는 안중에도 없고 호두 까먹느라 바쁘다.

  옆에 차 한 대가 오더니 폭포를 구경한다. 남자애가 여자 배에 연방 뽀뽀를 한다. 임신했나 보다. 엄마와 딸, 사위같다고 우리 맘대로 소설을 쓴다.

  기차역을 지나 주유소에서 다리를 건너니 티볼리 시내다. 화장실이 급하니 카페에 먼저 들어간다. 카페에서 나오니 산꼭대기에 있는 십자가가 보인다. 시간이 있으면 거기까지 올라가 볼 텐데 아쉽다.

  커피를 마시고 카페에서 나와 두오모로 간다. 성당 문이 굳게 닫혀있다. 티볼리는 로마 시대 휴양지라더니 로마 유적도 보인다. 작은 광장에 있는 수도는 물이 나오지 않는다. 여기서 쌍 과부가 손을 잡고 사진을 찍는다. 보기 좋다고 명수 씨와 최 사장님도 손을 잡고 사진을 찍는다.

  주차장 근처 바에서 피자로 점심을 먹었다. 빵이 바삭하니 맛있다. 출발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서 저택 빌라데스테에 들어갔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입장료도 13유로나 받는다. 안으로 들어가니 중앙 정원이 참 예쁘다. 분수대도 완전 예술이다. 저택 안에 있는 그림과 조각품도 기막히다. 해설사를 동반한 단체 관광객이 많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만하다. 저택 아래로 펼쳐진 정원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시간이 부족해서 정원을 다 돌아보지 못해서 안타깝다.

  우리 차가 티볼리 시내로 들어올 수 없다고 해서 걸어서 시내를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출발 시간이 늦어져 곧장 공항으로 달렸다. 렌터카를 반납하고 공항으로 들어오니 벌써 사방이 캄캄하다. 짐을 부치고 비행기에 오르니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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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 때는 좌석에 여유가 있어서 두 자리 차지하고 누워서 갔는데 올 때는 만석이라 꼼짝없이 꼿꼿하게 앉아서 왔다. 허리가 아프고 온몸이 뒤틀린다. 앞으로는 해외여행도 못 다니겠다.

  무심코 닫혀있는 비행기 창문 덮개를 만져보니 뜨끈뜨끈하다. 계속 동쪽으로 오며 남쪽에서 햇볕을 받아서 그런가 보다. 비행기 안에서 안약을 넣으려고 뚜껑을 여니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다. 기압이 낮다는 걸 깜빡했다.

  서울이 다가오자 김 사장님이 유심을 바꿔준다. 그동안 원래의 내 유심을 잃어버릴까 봐 긴장했었다. 명수 씨는 원래 유심을 잃어버렸단다. 해외 나오면 신경 쓸 일이 많아 멘붕이 온다. 인천공항에 내려 짐을 찾는다. 매번 짐이 안 나올까봐 조마조마하다. 짐을 찾아 전철을 타고 집에 온다. 사가정역에서 나와도 기다리는 남편이 없으니 허전하다.

 

  이번 여행은 난생처음 겪어보는 특이한 여행이다. 루카에서 로마까지 420km를 걸어야 하는데 큰길에서 차를 탔다고 해도 300km 정도는 걸은 것 같다. 내 인생 최고의 기록이다. 딸의 쾌유, 외손자 건희, 조카 지연이를 위해 기도했다. 기도 제목이 자꾸 늘어 친손자 이안이, 남편, 5번 동생과 히말라야 트레킹에 나선 제부를 위해서도 기도했다. 마음을 비우려고 시작했는데 여전히 짐을 내려놓지 못했다. 단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뿐이다. 하지만 비아 프랜치제나를 걷고 인증서까지 받았으니 내 생애 최고의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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