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2022. 10. 20. 베드로순례길 2

아~ 네모네! 2022. 11. 24.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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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도 홍삼정과 사과로 룸서비스를 받는다. 순자 씨가 이렇게 열심히 챙겨주는데 엊저녁부터 입술도 부르텄다. 완전 저질 체력이다. 정연씨는 5시 반부터 사진을 올린다. 잠이 안 오나 보다.

  꼴레 디 발델사에서 엘사 강 찾아 삼 만 리 하다가 포기하고 순례길을 걷기로 했다. 꼴레에서 헤매다 꼴까닥하게 생겼다. 6명은 카페에 앉아 쉬고 김 사장님은 차를 가지러 되돌아갔다. 우린 이렇게 쉬는데 김 사장은 연일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입술이 다 부르텄다.

  차를 타고 보르고 산 루이지 호텔에 들러 짐을 푼 후 집 앞 소파에 앉아 초밥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순례길을 걸으러 갔다. 이래 잘라먹고 저래 잘라 먹는 짝퉁 순례다.

  개와 함께 걷는 여자를 세 번째 만났다. 배낭도 무지막지하고 체격도 다부지게 생겼다. 같이 가는 개도 주인을 닮았다. 개와 함께 걸으면 지루하지도 않고 안심도 될 것 같다. 비아 프란치제나 길은 여러 가지 표지판이 있다. 전체 이름을 쓴 것도 있고 VF만 쓴 비석 모양의 표지판도 있다. 표지판의 흰색은 순결을 나타내고 빨간 색은 피를 상징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예수님의 순결한 피를 뜻하는지도 모른다.

  몬테리지오니에 도착해서 성문으로 들어서니 길바닥이 빗살 모양이다. 미끄럼 방지도 하고 비가 오면 옆으로 흐르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옛사람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안내소로 들어가 스탬프를 찍고 미숙 씨, 순자 씨와 셋이서 베드로의 순례 모습이 그려진 티셔츠를 샀다. 몬테리지오니는 잠실 야구장 같이 생겼다. 여러 개의 망루가 야간경기할 때 불을 밝히는 조명탑처럼 보인다.

몬테리지오니에서 차를 타고 피렌체 방향으로 가다가 명품 아울렛 매장으로 갔다.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대충 구경을 하고 여기서 저녁 식사를 하고 보르고 산 루이지 호텔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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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밖에서는 패딩 입을 일이 없는데 방안에서 입는다. 이불을 뒤집어써도 춥다. 순자 씨도 패딩 입고 양말 신고 잤단다. 어제 라디에이터 좀 켜달라고 하니 아직 전체적으로 난방을 안 한단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열이 넘치나 보다. 아침 안개가 자욱하다. 몽환적이다.

  오늘은 몬테리지오니에서 시에나까지 걷는다. 도토리가 후드득 후드득 떨어진다. 길바닥에 널린 게 밤이다. 밤을 줍느라고 지체된다. 중간에 단테 알레기에리 중학교를 지난다. 단테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다.

  가다보니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올리브나무에서 올리브를 수확하는 소리다. 땅바닥에 커다란 그물망을 깔고 모터가 달린 긴 장대로 가지를 흔들면 올리브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렇게 수고하는 사람들을 보면 평생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입만 놀리는 내가 참 염치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을 심으려는지 잘 갈아놓은 밭도 보인다.

  시에나에 도착하여 캄포 광장으로 갔다. 결혼 피로연 하는 젊은이들이 소리 지르고 난리다. 야외 학습을 나왔는지 어린 학생들도 보인다.

  성을 나오다가 산 프란치스코 성당도 보았다. 이 성당은 바닥의 그림이 인상적이다. 주차장에 오니 주차비 내는 곳이 없다. 현지인에게 물어보니 엘리베이터 있는 곳에서 정산하고 와야 한단다. 오늘 이래저래 27km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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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래와의 전쟁, 모기와의 전쟁이다. 이틀을 말려도 바지가 물탱이다. 드라이기를 바짓가랑이에 넣고 열라 말려도 안 된다.

  시에나로 출발했다. 장갑 한 짝 없어졌다. 연일 분실이다. 차에서 정연씨가 원장님 납골당에 만들어놓은 온갖 장식 사진을 보여준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꾸며놓았단다. 갑자기 내 남편이 불쌍해진다. 나는 유골함을 납골당에 갖다 넣고 한 번도 못 갔다.

  시에나 로마 문에서 걷기 시작했다. 뙤약볕에서 계속 걷자니 산채로 바베큐가 될 판이다. 볼 것도 없고 찍을 것도 없으니 무념무상으로 걷는다. 매일 매일 아픈 부위가 달라진다. 어제는 오른팔이 아프더니 오늘은 오른쪽 발꿈치 윗부분이 아프다. 매일 부위별로 보강 공사를 한다.

  몬테로니 다르비아에서 피자를 먹으려 했으나 브레이크 타임이라 피자는 안 되고 빵만 된단다. 빵이 엄청 맛있다. 주인 왈 이 동네서 자기 집 빵이 젤 맛있단다. 빵과 맥주를 먹다 보니 피자 타임이 됐다고 해서 피자도 먹었다. 피자도 기막히게 맛있다. 아이들 다섯 명이 하교 후 빵집에 들어오자 김 사장님이 빵을 사준다. 아이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난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다시 출발했다. 71세 미국 할아버지를 만났다. 스위스 로잔느에서 41일째 걷고 있는데 로마까지 간단다. 슈퍼맨이다. 초원 위의 사이프러스 나무가 멋지다.

  도중에 해바라기밭을 만나자 해바라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사진이 잘 나오게 하려고 목을 비틀어라, 고개를 꺾어라 난리가 났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사람 잡는 줄 알겠다.

  폰테 다르비아까지 죽자 사자 걸었다. 순례길 걷다가 천국까지 갈 것 같다. 오늘도 25km 걸었다.

몬탈치노의 호텔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이 호텔은 레스토랑을 안 한단다. 마당에는 도토리가 가득 깔렸다. 손님이 없나 보다. 로비에는 할머니 한 분이 앉아 손님을 받는다.

  몬탈치노 구시가지에서 야경을 보았다. 멋진 성이 있다. 초승달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식당을 찾는데 식당 주인과 아들이 문밖에 나와 들어오라고 불러들인다. 둘 다 인상이 좋다고 이 집에 들어가자고 한다. 우리가 들어가자 아들이 얼른 주방으로 들어가 빵을 썬다. 효자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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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에 밖으로 나가니 운해가 가득하다. 산 위에 있는 호텔이라 전망이 좋다. 방안에서 보는 아침노을도 기막히다. 오늘이 최창욱 님 생일이다. 김 사장님이 서울서 공수해 온 미역국을 먹었다. 감동이다. 9일 연속 걸었더니 모두 몸이 엉망 됐다. 아침마다 한창 공사 중이다.

  몬탈치노 성에서 음식 축제 준비가 한창이다. 불 피우고 난리다. 몬탈치노 시내를 구경한다. 벽화가 재미있다. 모나리자가 술이 취해 해롱해롱한다. 그림을 그림 사람이 유머가 넘치는 사람인가 보다.

  성에서 나와 몬테 다르비아 가는 길을 찾아 헤매는데 현지 차가 자기를 따라오란다. 몬테 다르비아에서 걷기 시작했다. 뙤약볕에 비포장길이라 차가 지나갈 때마다 먼지를 뒤집어쓴다.

  사위가 카톡방에 동영상을 올렸다. 딸이 지팡이를 들고 걷는 모습이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구친다. 첫돌이 되는 날 첫발을 떼던 기억이 떠오른다. 온종일 눈물을 삼키며 걷는다. 동생들 카톡방에도 올렸더니 감동이라고 눈물 난다고 하며 난리가 났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한 성경 말씀이 생각난다.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나에게 천하를 다 준다 해도 딸과 바꿀 수는 없을 것 같다. 걷다 보니 말 타고 오는 사람들이 보인다. 가족인 듯하다. 좋아 보인다.

  나무 그늘에 앉아 빵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차가 다니는 큰길은 차를 타고 패스하기로 했다. 연일 강렬한 햇빛 속이라 우산을 쓰고 걷는다. 카파르조 와인 농장 위 능선부터 다시 걷는다. 산 퀴리코도르치아가 보이는 언덕에서 김 사장이 차 가져오기를 기다린다. 패잔병 모습으로 길가에 앉아 있다.

  김 사장님이 오더니, 이태원에서 대형사고 났다고 한다. 할로윈데이가 애들 다 잡는다. 몬탈치노에 와서 엊저녁에 먹은 식당에 또 들어갔다. 오늘이 최 사장님 생일이라고 와인과 맥주를 냈다. 케이크를 놓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니 옆 테이블 여자가 기념사진도 찍어준다. 우리가 남은 케이크를 주니 넘 좋아한다. 오늘은 24km 걸었다. 온몸이 뻐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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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챕터 오토바이 동아리가 엊저녁부터 묵어 온 호텔이 들썩들썩한다. 이탈리아는 어디 가나 개소리가 들린다. 한 마디로 개판이다.

  산퀴리코도르치아 성당에 들어서니 찬양 소리가 들린다. 천국에서 천사가 노래하는 것 같다. 앞쪽으로 가니 수녀님 두 분이 찬양하고 있다. 오늘이 일요일이라 미사 준비를 하는 듯하다.

  왼쪽을 보니 작은 방이 있고 수녀님이 있다. 스탬프를 찍을 수 있는냐고 하니 들고나와서 찍어준다. 무슨 도장인지도 모르면서 마구 찍어댄다.

  산퀴리코도르치아에서 출발하여 온천마을로 들어가니 완전 시장바닥이다. 출구를 못 찾아 헤맸다. 온천에서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김 사장에게 전화하니 이리로 오겠단다.

  김 사장과 만나 카스티우리오레로 가서 빵으로 점심을 먹었다. 식사 후 순례길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걸어가니 갈리나에 도착한다. 길이 갈리는지 이가 갈리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오늘은 여기까지다.

  몬테풀치아노에서 주차하려다 뒤의 기둥을 박았다. 다른 차를 박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겨우 주차를 하고 몬테풀치아노 구시가지를 구경했다. 성당의 종탑이 이색적이다.

  모든 식당이 예약되어 성 밖에 나와 작은 카페에서 파니니를 먹었다. 풀치아노에 와서 입에 풀칠도 못 하고 쫓겨났다. 참 먹고 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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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수 씨와 최 사장님 사이에 냉기가 흐른다. 냉전 중인가 보다. 정연씨도 원장님과 엄청 싸웠다는데 지금은 그토록 그리워한다. 나도 남편이 살았을 때는 개무시하고 살았는데 지금은 아쉽다. 아파트 소독하러 오는 날도 집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남편이 있을 때는 맘 놓고 돌아다녔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남편이란 존재는 죽어야 좋은 남편이 되나 보다.

  아침마다 보수 공사를 해야 한다. 순자 씨도 발가락을 반창고로 칭칭 감았다. 아무래도 엄지발톱이 빠질 것 같다고 한다. 누가 보면 저 짓을 왜 하나 할 거다. 거금 1,200만 원이나 주고서 말이다. 다른 동물이 보면 인간이란 알다가도 모를 참 미련한 존재라고 할 것이다. 할로윈데이인지 무시깽이인지 떼를 지어 다니다가 150명이 넘게 죽었으니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것도 다른 동물이 알면 기가 차다고 할 꺼다. 인간은 왜 이토록 별 필요도 없는 일에 목숨 거는지 모르겠다.

  포지오코빌리라는 곳으로 갔다. 영화 글레디에이터 마지막 장면을 찍은 곳이다. 사이프러스길 위에 멋진 저택이 있다. 여기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 찍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저런 집에서는 대체 어떤 사람이 살까 궁금하다.

  오늘은 갈리나에서 라디코파니까지 걷는다. 가끔 그늘이 있어 걷기 편하다. 길가에 클로버가 보인다. 예전 같으면 네 잎 클로버를 찾았을 텐데 요즘은 그냥 패스다. 앞으로는 땅속으로 들어갈 일만 남았는데 무슨 행운을 바라겠는가?

  남편이 살았을 때 고개를 숙이고 걸으면 뭔 죄지었냐고 기를 죽이며 고개 숙인 남자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고개 숙인 여자가 됐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걷는다.

길가의 풀 한 포기를 바라본다. 이름 모를 저 풀은 여기서 태어나 평생 살다가 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네 인생도 오늘 있다가 내일 사라지는 풀과 같다.

  풀잎에 맺힌 이슬 한 방울을 본다. 햇빛이 비치는 순간 사라질 운명이다. 어쩌면 모든 인간은 이슬인지도 모른다. 이슬이 증발하여 공기 중으로 들어가면 눈에 안 보이듯 우리 인간도 죽음의 문턱을 넘어 영원한 생명으로 흡수되는 것이 아닐까?

  라디코파니쪽으로 가는데 코를 파는지 귀를 파는지 가도 가도 8km. 가다가 길바닥에 앉아서 간식을 먹는다. 거의 걸인 수준이다. 길에 철퍼덕 앉아서 먹는데 이골이 났다.

  아무 생각 없이 계속 올라가니 왼쪽으로 라디코파니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 첨성대 모양의 망루가 인상적이다. 여기는 가을 색이 완연하다.

  한 카페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먹는다. 레몬 껍데기에 들어 있는 아이스크림이 너무 딱딱해서 먹을 수가 없다. 미숙 씨가 칼을 꺼내어 자르려고 했지만, 칼도 안 들어간다. 탁자에 놔두고 시내를 한참 돌아다니다가 와서 겨우 먹었다.

  여기를 떠나 온천마을로 갔다. 터키의 파묵칼레와 비슷하다. 얼굴에 하얀 석회를 바르고 온천욕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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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 5시에 일어나 일출을 보러 갔다. 운해에 잠긴 농가와 사이프러스 나무가 인상적이다.

  글레디에이터 촬영 장소에는 수많은 찍사들이 삼각대에 카메라를 고정하고 촬영 삼매경에 빠졌다.

  정연씨가 차에서 나오지도 않는다. 웬일인가 했더니 반려견 심바가 죽었다고 연락이 왔단다. 얼굴이 초주검 됐다. 원장님 보고 싶어서 하늘나라로 갔나 보다. 심바는 천수를 누렸다. 주인 잘 만나서 좋은 치료 받고 영양주사 맞으며 여태 버텼다. 모든 생물은 유한한 존재다. 그래서 더 귀하고 값진 존재인지도 모른다.

차로 라디코파니로 가서 첨성대 모양의 망루에 올라갔다. 망루가 볼수록 아름답다.

  오늘은 라디코파니에서 아쿠아펜덴테까지 걷는다. 초원 위에 양들이 점점이 박혀있다. 대관령목장이 생각난다.

  숲으로 들어가자 또 밤이 널려있다. 밤 줍느라 정신이 없다.

  어두워서 숙소에 도착했다. 와인리조트인데 숙소가 띄엄띄엄 떨어진 농가 같다. 방 이름도 쏼라 이탈리아 말이다. 우리 방은 단테 어쩌구 저쩌구인데 아무리 찾아도 없다. 단테 찾아 삼만리 하다가 겨우 찾았다. 문 앞에 있는 의자 뒤에 작게 붙어있다. 집 찾기 참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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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인 리조트라서 그런지 호텔 경관이 기막히다. 마치 수채화를 보는 듯하다.

  호텔을 출발하여 아쿠아펜덴테 야고보 탑에 있는 인포메이션센터에서 스탬프를 찍고 모자에 꽂는 단추도 샀다.

  산 로렌조 누오보 길가에서 빵과 야채로 점심 식사를 한 후 차로 이동했다. 호수를 구경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볼세나에 도착하여 대성당을 보았다. 김 사장님이 주차하는 동안 마을을 내려가 성당 앞에서 만나자고 한다. 성당을 못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가 겨우 찾았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최 사장님이 앉아 있다.

  명수 씨가 최 사장님에게 싫은 소리를 했는지 최 사장님이 화를 버럭 낸다. 명수 씨는 한마디도 안 하고 잘 참고 있다. 눈에는 눈물이 글썽인다.

  치비타로 가서 절벽 도시로 들어갔다. 야경이 환상이다. 공중도시 같다. 건너가는 다리가 없으면 천하의 요새다. 여기는 영화 아바타의 촬영 장소라고 한다.

  치비타를 나와 저녁 식사하러 갔다. 명수 씨는 남편 앞에 앉아 여보 당신 하며 이거 먹어라 저거 먹어라 한다. 명수 씨는 천사인가보다. 나 같으면 남편과 최소 1주일은 말 안 했을 것이다. 50년 동안 함께 살며 여보 당신 소리를 해본 적도 없지만, 이거 먹어라 저거 먹어라 해본 적도 없다. 이렇게 남편 속을 뒤집어 놔서 빨리 달아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정연씨와 나는 남편이 없어서 슬퍼하고 명수 씨와 순자 씨는 남편과 서로 맞추어 사느라고 힘들어한다. 남편이란 존재는 있어도 괴롭고 없어도 괴롭다. 뒤집어 생각하면 있으면 있는대로 좋고 없으면 없는대로 좋은게 남편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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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에 우리가 걷는 사진을 보냈더니 며느리가 청명 그 자체라고 한다. 그림은 좋은데 비포장길이 많아서 차가 지나갈 때마다 먼지를 뒤집어쓴다. 길가의 나무같이 땅강아지가 된다. 동생들이 부탁하는 기도가 점점 늘어난다. 마음을 비우려 해도 오만가지 생각이 가득하다. 아직 멀었다.

  호텔 식당으로 가는 길에 안개가 가득하다. 꿈속 같다. 식사하는데 웨이터가 객실 이름을 묻는다. 나는 단테~라고 얼버무리고 미숙 씨는 토~ 하며 얼버무리다가 김 사장이 카톡방에 올린 객실 이름을 보여줬다. 왜 이름이 이렇게 복잡한지 모르겠다. 미숙 씨 말로는 자기 조상들 이름 같다고 한다. 그럴 것 같다.

오르비에토로 향한다. 미켈란젤로가 여기 성당 벽화를 보고 영감을 얻어 시스티나 성당 천장의 천지창조 그림을 그렸단다.

  4번 동생이 제부가 내일 EBC 트레킹 떠난다고 기도해달란다. 기도 제목은 점점 늘어나는데 내 머리 용량이 딸려서 기억하기 힘들다.

  오르비에토 앞 노점상 아저씨가 스카프가 10유로라고 한국말로 소리친다. 노우 체이나라고 소리 지르지만, 라벨을 보니 메이드 인 차이나다.

  후니쿨라를 타고 올라가니 셔틀버스도 공짜다. 여기서 처음으로 한국인 관광객을 만났다. 오르비에토가 유명관광지가 맞기는 맞다.

  대성당이 웅장하다. 사람이 없어 한가하다. 눈이 휘둥그레 벌어진다. 이 수많은 조각품과 그림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어떨까? 어떤 형상도 그림도 만들지 말라고 했는데.

  치비타로 와서 절벽 도시를 다시 보고 볼세나에 와서 걷기 시작했다. 몬테피아스테네를 향해 숲길을 걷는다. 외나무다리도 있고 폭포도 있다. 걸음이 느리니 꼴찌에서 혼자 간다. 뒤에서 가니 좋은 점도 있다. 아무 데서나 노상 방뇨하고 방귀도 맘대로 뿡뿡 뀐다.

  몬테피아스테네 성안으로 들어가 스탬프도 찍고 계속 올라가니 교회도 보이고 호수가 발아래 펼쳐진다. 환상이다.

  한 아저씨가 차를 타고 올라오며 피오도라고 한다. 열쇠를 흔드는데 뭔소린지 모르겠다. 눈치로 때려잡으니 문을 잠그니까 나가라는 소리다.

  내려오다가 큰 성당에 들어갔다. 미사가 있었는지 사람들이 나온다. 제단 앞에는 미라 같은 사람이 누워있다. 젊은 남자에게 명수 씨가 물어보니 16~17세기 이탈리아 최초의 수녀님 미라라고 한다. 오늘이 이 수녀를 기리는 성일인가 보다. 촛불 앞 헌금함에 2유로를 넣고 스위치를 올리니 불이 들어온다.

  중앙광장 건물에는 귀신 모형이 매달려있고 호박 장식품을 팔던 박스도 보인다. 추워서 이 안에 들어가 핸드폰을 한다.

  730분이 돼야 식당 문을 여니 어두운 골목에서 덜덜 떨다가 차를 타고 베스트 웨스턴 호텔로 왔다. 이 호텔의 엘리베이터에 있는 숫자판은 엄청나게 크다. 눈 어두운 노친네가 보기에 딱 좋다. 방에 와서 쉬다가 호텔 근처 식당으로 갔다. 참 밥 얻어먹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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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딸의 생일이다. 생일날 집에도 못 오고 병원에서 외롭게 보낼 딸을 생각하니 또 눈물이 난다. 크리스마스 때는 다 같이 집에서 보내자고 카톡을 보냈다.

  아침부터 비가 온다. 젊어서는 비 오는 날이 좋더니 이제는 심란하다. 몬테피아스코네에서 걷기 시작이다. 매일 먹고 자고 걷는다. 비바람이 몰아쳐 우산 쓰기도 힘들다. 길가에 키위 농장이 보인다. 키위밭에 들어가 사진을 찍는다. 키위를 보니 제주도에서 키위 농사를 짓는 양숙 씨가 생각난다.

  우산을 두 손으로 잔뜩 움켜쥐고 걷는데 어~이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들어보니 순자 씨와 미숙 씨가 농가 주택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다. 포도를 먹으며 소나기가 지나기를 기다린다.

  아스팔트 길을 건너니 한 할아버지가 물을 받고 있다가 쎄뇨라~ 하더니 쏼라 쏼라 하는데 무슨 소린지 모르지만, 어느 길로 가느냐고 하는 것 같아 '비아 프란치제나' 했더니 직진하란다.

  한참 왔는데 순자 씨가 전화한다. 잘못 갔단다. 할아버지 있던 곳에서 우측 길로 갔다는 것이다. 다시 되돌아오겠다고 한다.

  비아 프랜치제나 표지판은 곳곳에 세우고 붙이고 땅에도 박았다. 심지어 소똥밭에도 세웠는데 똥이 비에 녹았는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도시가 보이는 곳 풀밭에서 햄버거를 먹었다. 땅바닥에 앉아 먹는 모습을 보니 이게 무슨 짓인가 싶다. 거금 들여 이탈리아까지 와서 날씨도 추운데 맨땅에서 빵 쪼가리나 씹고 있으니 말이다.

  마냥 걷다 보니 비테르보가 보인다. 비테르보인지 비틀어봐인지 도무지 외워지지 않는다. 포르타피오렌티나로 들어간다. 포르타는 문, 피오렌티나는 꽃이다. 즉 꽃의 문이다. 안으로 들어가 한 카페에서 커피도 마시고 스탬프도 찍었다.

  베드로 할아버지 그림을 따라간다. 순례길을 나타낸 그림이 꼭 베드로인 것 같아 우리는 베드로 할아버지라 부른다. 한 광장에 가니 군인도 보이고 헬기도 있다. 군에서 무슨 행사를 하나 보다. 마냥 가다 보니 로마나 문으로 나와 버렸다. 로마나 문 안쪽 바닥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란 표시가 있다.

  두오모를 찾아 다시 성안으로 들어갔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두오모가 어디냐고 물어 겨우 찾아갔다. 두오모는 공사 중인 것 같은데 문은 열려있다. 5유로를 넣고 초를 하나 켰다.

  두오모에서 나와 현지인에게 다시 묻고 물어 프로렌티나 문으로 오니 우리 일행 세 명이 서 있다. 우여곡절 끝에 여섯 명이 만나서 차를 기다린다. 조금 기다리니 김 사장님이 나타난다. 겨우 차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5시면 어두워지는데 7시 반이나 돼야 식당 문을 여니 방에서 쉬다가 식당으로 갔다. 미숙 씨는 피자 한 판을 다 먹는다. 위대 胃大하다.

  오늘은 비테르보에서 헤매느라 33천 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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