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21. 7. 8. 단 하루만이라도

아~ 네모네! 2021. 7. 18. 16:44

단 하루만이라도

이현숙

 

  “단 하루 만이라도 저 의자에 앉아봤으면.”

같이 근무하던 선생님이 교감 자리의 의자를 가리키며 하는 말이다. 의자는 언제부터 사용했을까? 우리나라에서는 방바닥에 그냥 앉아서 지내는 일이 많아 의자는 별로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입식 생활이 익숙해졌다. 식당에서도 장례식장에서도 요즘은 입식으로 의자가 있는 곳을 선호하는 편이다.

  의자는 그 물건 자체를 의미할 때도 있지만 그 지위를 말하는 경우도 많다. 장관이 되고 싶고 사장이 되고 싶고 대통령이 되고 싶어 할 때도 그 자리에 앉는다고 말한다. 의자는 곧 자리고, 자리는 곧 지위다.

  성수중학교 근무할 때 한 남자 선생님은 퇴직하기 전에 교감을 꼭 해보고 싶었나보다. 교감을 하려면 교감 연수를 받아야하고 연수를 받으려면 근무 평점을 잘 받아야한다. 근무평점에는 연구 점수도 있고, 연수 점수도 있고, 부장 경력 점수도 있다. 거기다 교장이 주는 점수도 있어서 여간해서는 연수 받기도 힘들다. 이 선생님은 연수 받을 때 성적이 안 좋아 앞으로도 별 가망이 없다고 했다. 근무 평점은 매년 계산해서 교육청에 보고하고 점수가 높은 순서로 교감연수를 받는다.

  나는 연수 점수나 연구 점수, 부장 경력 점수는 모두 꽉 차서 교장이 주는 점수만 잘 받으면 되는 형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교장 선생님이 과학실로 와서 은근히 승진할 마음이 있느냐고 묻기도 했다. 마음이 있다면 점수를 주겠다는 무언의 표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줄 생각인 듯하다. 내가 별 뜻이 없다고 하면 그러냐고 하긴 평생 평교사로 있는 것도 좋은 생각이라고 했다.

  그 후 교감 선생님이 바뀌고 또 근무 평점을 냈다. 하루는 그 교감선생님이 과학실에 와서는 은밀하게 얘기 좀 하잔다. 먼저 교감 선생님이 내 점수를 잘못 계산하여 교감 연수 대상자로 올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다음 해에 다른 학교로 전근 갈 순서였다. 그러면서 올 해는 근평에서 최고 점수를 주었으니 전근 가면 그 학교 교장 선생님께 사정 말씀을 드리고 다시 교장이 주는 점수를 최고점으로 달라고 부탁하라는 것이다.

  전근 가자마자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다. 다른 사람들도 승진을 목적으로 교장 점수를 최고점 받으려는 사람들이 많은데 새로 간 사람이 이 점수를 가로채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당연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교감 연수도 받지 못했다.

  사실 교감이 되면 방학도 없이 매일 출근해야하고 큰 교무실 한 복판에 앉아 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는 것도 부담스럽다. 과학부실에서는 수업 없을 때 책상에 엎어져 졸아도 되지만 교무실 한 복판에서 엎드려 조는 것은 볼썽사나울 것이다.

  그렇게 몇 년을 더 근무하다가 아이들도 다 결혼시키고 나니 큰 돈 쓸 일도 없을 것 같고 그만 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연금도 받을 수 있으니 지금 나가도 굶어죽지는 않을 것 같았다. 사실 칠판을 향하여 16, 칠판을 등지고 32, 48년 동안 학교생활만 했더니 밖에 나가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싶었다. 이러다가 내 인생 여기서 쫑 나면 어쩐지 억울할 것 같았다. 그래서 명퇴 신청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몇 번씩 신청했다가도 떨어지는데 그 해에는 정부 예산이 넉넉했는지 많은 수가 명퇴할 수 있었다. 마지막 근무를 마치고 집에 오려니 감옥에서 해방된 것처럼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퇴직 후 지금까지 18년 동안 놀면서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으니 정말 잘 한 일인 것 같다.

  이리하여 나는 평생 교감 자리에는 앉아보지 못했다. 이게 잘 된 일인지 잘 못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만약 내가 그 때 교감 연수를 받고 교감이 되었다면 또 교장 되려고 기를 쓰다가 제 명에 못 죽었을 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에게 맞는 의자가 따로 있는 듯하다. 내성적이고 소심한 나는 나에게 딱 맞는 의자에 앉아 생활하다가 적당한 때에 잘 나온 것 같다.

  남에게 간섭 받기도 싫고, 남의 일에 간섭하기도 싫어하는 내 성격상 나는 그저 밑에서 적당히 살다가 가야지 남의 위에 서서 이래라 저래라 하다가는 스트레스 엄청 받아서 내 명을 내가 단축시켰을 것이다.

  그 후로도 그 남선생님은 교감 됐다는 소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 평교사로 정년까지 간 것 같다.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의자에 앉아 자기가 원하는 만큼 누리길 원한다. 하지만 나는 그릇이 워낙 작아서 위에서 복을 부어주어도 다 넘치고 말 것이다. 인간은 그저 자기에게 주어진 위치에서 자기 그릇만큼만 누리다가 가는 게 최상의 삶이요, 최상의 행복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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