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20. 6. 22. 나무가 되고 싶어

아~ 네모네! 2020. 7. 3. 16:13

나무가 되고 싶어

이현숙

 

  차 밑에서 고양이가 납작 엎드려 기어 나온다. 무엇인가 노려보고 있다. 앞을 보니 여러 마리의 참새가 열심히 모이를 쪼아 먹고 있다. 보는 내가 더 긴장된다. 살금살금 기어 나와서 참새를 낚아채려는 순간 참새들이 잽싸게 날아간다. 고양이의 비애가 느껴진다.

  남의 생명을 빼앗지 않으면 내 생명을 이어갈 수 없는 기구한 운명은 모든 동물의 공통점이다. 내가 태어나서 7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생물이 희생되었을까?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생선 가게 앞을 지난다. 동태 코다리가 뱃속 내장은 모두 제거된 상태로 이쑤시개로 뱃가죽을 벌린 채 매달려 있다. 내가 저렇게 매달려 있으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한다. 식인종들은 사람을 어떻게 요리해 먹었을까? 산채로 요리했을지도 모른다. 인간도 산 낙지를 그대로 토막 내어 먹는다. 조각조각 끊어진 상태에서도 꿈틀꿈틀 하는 걸 보면 보기만 해도 끔찍하여 젓가락이 가지 않는다. 산 낙지를 펄펄 끓는 물에 통째로 넣는 걸 볼 때도 내가 끓는 물에 들어가는 것처럼 심장이 오그라드는 듯하다.

  횟집 앞을 지나며 수족관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를 본다. 예전에는 횟집에 가면 생선을 산 채로 회를 뜨고 그 생선뼈 위에 살점을 나란히 놓아 접시에 담아주었다. 살이 다 발리어진 생선은 아직도 살아있어 눈을 껌뻑이곤 했다. 이걸 보면 내가 이 아이의 생살까지 뜯어먹고 살아야하나? 하는 비참한 생각이 든다. 보기가 끔찍하여 얼른 뼈를 가져다가 매운탕을 끓여달라고 한다.

  조물주는 어이하여 생명을 통해서만 생명을 이어갈 수 있게 만들었을까? 남의 생명을 먹지 않으면 내 생명을 이어갈 수 없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무엇인가 먹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예외도 있다. 식충식물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식물은 무생물을 먹고도 살 수 있다. 물과 이산화탄소와 햇빛만 있으면 스스로 광합성을 하여 양분을 만든다. 이 양분으로 생장하고 꽃을 피워 생명을 이어간다.

  내가 만약 다시 태어나야한다면 나무로 태어나고 싶다. 살고 싶은 만큼 실컷 살아서 다시 태어나고 싶지는 않지만 굳이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면 한 그루의 느티나무가 되고 싶다.

  나무가 되어 대지에 뿌리박고 빗물과 이슬을 먹으며 살아가고 싶다. 나무가 안 되어봐서 그 기분은 잘 모르겠지만 남의 생명을 해치지 않아도 되니 맘 편히 살 수 있을 것 같다. 한 그루 느티나무가 되어 빠르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할아버지와 아들, 손자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싶다. 나의 그늘아래 평상에서 수박 참외 먹으면서 노는 아이들도 보고, 한가로이 장기를 두는 할아버지들도 보고 싶다.

  하지만 한 곳에서만 평생 살아야하니 지겨울지도 모른다. 산불이 나도 도망 갈 수 없으니 발을 동동 구르며 동물로 태어나지 못한 걸 한탄할 지도 모르겠다. 비록 이런 괴로움이 있을지라도 난 나무로 태어나 하늘을 바라보며 살고 싶다. 밤에는 별을 보고 낮에는 해를 보면서 비바람 맞아가며 살고 싶다. 재수 없으면 산불이 나서 산채로 타죽을 지언정. 모든 생물은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남을 부러워하며 살고 있다. 이것이 생명을 가진 존재들의 숙명인가보다.

두물머리의 느티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