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20. 6. 21 삶이 답이다 (독후감)

아~ 네모네! 2020. 6. 21. 15:33

삶이 답이다?

류시화의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를 읽고 -

이현숙

 

  류시화는 1959년 충북 옥천에서 태어났다. 대광고등학교와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일찌감치 서울로 올라와 많은 고생을 한듯하다.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제목이 특이해서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인 듯한데 이걸 책 제목으로 쓴 아이디어가 참신하다. 새 등에 엎혀서 새와 함께 날아가는 표지 그림도 마음을 끈다.

책표지

  책에 둘려진 종이 띠에 쓴 내가 묻고 삶이 답하다.’라는 글도 뭔지 모르게 읽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류시화의 책이라고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라는 시집 한 권뿐이다. 이번에는 산문집이라 한 번 더 도전해 보았다.

류시화는 경희대 다닐 때 은사인 황순원의 시는 젊었을 때 쓰고, 산문은 나이 들어 쓰는 것이다. 시는 고뇌를, 산문은 인생을 담기 때문이다.”라는 말에 깊은 감명을 받은 듯하다.

  서문의 제목도 내가 묻고 삶이 답하다.’인데 저자가 청년 시절부터 끊임없이 삶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무수한 질문을 던졌지만 해답은 자신의 삶에 있었다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서문에서도 이 불확실한 시대에 자신의 글이 위로나 힘이 되진 않겠지만 다만 길 위에서 당신과 함께 인생을 이야기 하고 싶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총 51편의 글을 아무 구분도 없고 숫자를 매김도 없이 무턱대고 쭈욱 늘어놨다. 보는 내가 답답해서 1번부터 51번까지 번호를 매겨놨다. 단지 처음과 끝, 그리고 6~7편의 글 사이사이에 사진인지 그림인지 모를 것들이 하나씩 들어있어 장을 나눈 형태이다.

첫 번째 그림은 소년과 늑대인지 개인지 모를 짐승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 일단 뭔가 신비감을 자아낸다. 뭔가 있을 것 같은 분위기에 사로잡히게 한다.

  첫 번째 글은 퀘렌시아다 퀘렌시아는 스페인어로 투우장의 소가 숨어서 숨을 고르는 장소다. 즉 회복의 장소다. 모든 동식물은 자신의 작은 영역, 즉 퀘렌시아를 가진다. 명상에서는 인간 내면에 있는 성소를 퀘렌시아라고 부른다. 퀘렌시아는 장소가 될 수도 있고 어떤 행위가 될 수도 있다. 나의 퀘렌시아는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산이 될 때도 있고 글 쓰는 시간이 될 때도 있다. 사람마다 서로 다른 퀘렌시아를 갖겠지만 무엇이건 꼭 있어야할 것이 퀘렌시아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누구나 자신의 퀘렌시아를 갖는 일이 자신을 지키고 삶을 사랑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두 번째 그림은 곰과 소년이다. 곰과 소년은 함께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빛을 내는 무언가를 보는 듯하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길을 가는 사람이다. 방황한다고 해서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어느 길을 가건 그 길에 마음이 있으면 된다. 길의 어원이 길들이다임을 기억하고 스스로 길을 들여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야 한다.

  이름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물의 이름을 아는 순간 그것과 나 사이에 순수한 교감이 사라진다. 이름이 그것을 막아버린다. 야생화를 볼 때 이름을 모르면 그 꽃 자체에 신비감을 느낀다. 무언의 대화를 한다. 이름을 알게 되는 순간 다 알았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세 번째 그림은 사자인지 퓨마인지 앞에 소년이 앉아있다. 멀리 발아래 산을 바라보는 듯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혼자 걷는 길은 없다. 이것이 우주의 법칙이다. 같은 파동끼리 연결되기 때문이다. 우주 안에서는 어떤 에너지도 사라짐이 없이 보존된다. 지금 낭독하는 이 소리에너지도 그 파동이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모든 행위는 고유한 파장이 있고 그 파장이 일치하는 존재들이 있다. 함께 공부하고 공감하는 이 문우들이 이런 존재가 아닌가 생각한다.

  네팔 안나푸르나 기슭에 오스트레일리안 캠프가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이 안나푸르나 원정할 때 캠프를 쳤다고 하는데 지금은 캠프는 없고 몇 개의 게스트하우스가 있다. 이곳에 한 한국인 스님이 집을 짓고 매일 명상을 하며 살고 있다. 그의 법명은 정보스님이라고 했다. 오전에 두 시간, 오후에 두 시간 매일 네 시간씩 명상을 한다고 한다. 그의 집에 들어가 차도 마시고 함께 대화도 했다. 벽에는 그의 지인이 그의 명상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걸려있다.

  아침 식사 후 근처를 산책하며 스님 집 쪽을 바라보니 집 뒤 숲에서 꼼짝하지 않고 명상하는 스님이 보인다. 마치 미이라를 보는 듯하다. 스님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아니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우주의 파동을 감지하는 중일까?

 

네 번째 그림은 퓨마와 소년이 배를 타고 어딘가로 향하는 그림이다. 이들은 어디로 여행을 떠나는 것일까? 여행은 얼마나 좋은 곳으로 갔는가가 아니라 그곳에서 누구를 만나고 얼마나 자주 그 장소에 가슴을 갖다 대었는가 이다. 시간을 쏟아 사랑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신비가 너무 많다. 가고 또 가고 다시 가면 그 장소가 비로소 속살을 보여줄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며 나의 여행을 생각해보니 나는 지금까지 수박 겉만 핥아 먹고 왔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 생각 없이 가이드만 따라 다녔다.

 

 

다섯 번째 그림은 곰과 아이다. 처음에는 아이가 보이지 않아 왜 아이가 없을까 한참 찾았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아이가 곰의 등에 엎드려 있다.

  테러리스트가 되지 말고 테라피스트가 되어라. 공격과 치유는 둘 다 공명 현상이다. 어떤 에너지를 보내느냐에 따라 동일한 에너지가 메아리쳐 돌아올 것이다. 소년은 곰과 함께 공명하며 곰에게 치유를 받는 중일까?

 

여섯 번째 그림은 코끼리 앞에 앉은 아이다. 서 있어도 아이의 눈은 코끼리를 올려다 봐야할 텐데 앉아서 무얼 보는 것일까?

  삶은 우리의 영혼이 우리 자신에 대해 읽는 책이다. 그 책의 다음 장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 페이지를 넘기지 전에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앞부분의 내용이 슬프다고 이야기가 끝난 것은 아니다. 고통은 지나가고 아름다움은 남는다. 소년은 책의 다음 장을 보려고 기다리는 것일까?

 

일곱 번째 그림은 물속에 소년과 늑대가 마주 앉아있다. 서로 얼굴을 맞대고 무엇을 하는 걸까?

  우리가 마음에 품고 있는 나의 이야기는 과거에 수집한 돌들의 끊임없는 분류이다. 우리의 존재가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그 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뒤돌아보는 새는 죽은 새다. 모든 과거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날개에 매단 돌과 같아서 지금 이 순간의 여행을 방해한다. 마음이 과거에 일어난 일들에 분노를 느낄수록 현재를 사랑하기 어렵다.

 

여덟 번째 그림은 소년이 퓨마와 배를 타고 앉아있다. 노를 젓지 않는 걸 보면 그냥 물 위에 떠 있는 듯하다. 둘은 한쪽 방향을 보고 있다. 그냥 물이 흐르는 대로 흘러가나보다.

  만남은 결코 존재의 모자람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만남이 존재를 발견하게 한다. 만남을 통해 존재의 부족함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온전함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지금까지 만난 무수한 사물과 사람이 나를 만들어 왔다는 생각이 든다.

  류시화가 다닌 많은 곳에 나도 갔었다. 카그베니와 나가르곳에서 나는 과연 무엇을 느꼈을까? 같은 곳을 바라보았어도 그 사람의 깊이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을 보고 느끼게 되는 것 같다. 류시화은 무한히 긴 자로 물의 깊이를 쟀는데 나는 1미터짜리 자로 잰 것 같다. 류시화가 씹고 또 씹으며 음미했다면 나는 씹도 않고 꿀꺽 삼켰다고나 할까?

카그베니

 

마지막 그림은 코끼리 모녀와 아이들이 함께 어디론가 걸어가는 그림이다. 이들의 여정은 어디까지 이어질까?

  류시화의 글을 다 읽고 나니 작가와 함께 긴 여행을 마친 듯하다. 그는 참 진리를 알기 위해 세상의 오지란 오지는 모조리 찾아다녔다. 우리나라에도 많은 명상가들이 있을 텐데 왜 그리 멀리까지 돌아다녔을까? 멀리 있는 의사가 명의라고 했듯이 먼 곳까지 찾아가는 간절함이 더 큰 효과를 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은 한 마디로 명상집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생이 끝날 때까지 이 길을 계속할 것이다. 삶이 답해줄 때까지 가고 또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