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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2017. 10. 27. 용눈이를 사랑한 영갑이

by 아~ 네모네! 2017. 12. 1.

용눈이를 사랑한 영갑이

아 네모네 이현숙



   동생들과 제주도 여행을 갔어요. 그동안 이름만 듣던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 갔어요. 두모악은 한라산의 옛 이름이라고 하네요. 제주도에는 여러 번 갔지만 김영갑 갤러리는 처음이었죠. 폐교된 삼달국민학교를 개조하여 만든 갤러리였어요.

   문으로 들어서니 아담한 정원이 펼쳐지더군요. 정원의 아기자기한 조각들은 조각가 김숙자님이 기증한 것이라고 해요. 20여 년간 이곳에서 살며 제주도의 속살을 찍어댄 김영갑 선생의 작품이 전시되어있어요.

   그는 제주도의 오름을 무수히 오르내리며 그 아름다운 자태를 사진에 담았죠. 말년에는 루게릭병에 걸려 전신이 마비되어오는 중에도 사진 촬영과 전시회를 멈추지 않았는데 나중에는 혀도 마비되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어요. 그의 생전에 찍은 동영상을 보니 가슴이 저려오더군요. 카메라 셔터를 누를 힘이 없어 안타까워하면서도 그 동안 찍은 사진으로 전시회를 기획하는 그의 열정이 눈물겨웠어요.

   수많은 오름 가운데 그가 특히 사랑한 곳은 용눈이 오름인 것 같아요. 용눈이 오름 사진이 가장 많았으니까요. 그의 영혼을 빼앗은 용눈이 오름은 그의 몸까지 앗아갔나봐요. 용눈이를 너무 사랑해서, 너무도 열정을 쏟아서 몸과 마음의 모든 예너지가 소진된 것일까요? 용눈이 사진 중 억새밭에 외로이 선 나무 한 그루는 그의 생전 모습을 보여주는 듯했어요.

   평생 결혼도 안한 그는 아마도 용눈이와 결혼한 게 아닐까요? 너무도 용눈이를 사랑한 나머지 상사병에 걸려 50살도 못된 나이에 생을 마감한 것 같아요. 그의 몸은 갔지만 그의 영혼은 사진에 깃들어 지금도 이곳을 맴돌고 있는 듯했어요.

   전시장을 보고 밖으로 나오니 무인 카페가 있었어요. 각자 자기가 원하는 차를 마시고 값은 통에 넣도록 되어있더군요. 다 마신 컵은 잘 씻어서 다음 사람이 사용하도록 했구요. 이곳 카페의 창밖 풍경도 한 폭의 그림이더군요. 김영갑도 여기 앉아 차를 마시며 작품구상을 했을까요? 마당으로 나오니 배롱나무꽃이 떨어져 붉은 피를 흘리며 처절한 모습으로 서있었어요.

   다음날은 김영갑이 그토록 사랑한 용눈이 오름에 오르기로 했어요. 밤새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아침이 되도 그칠 줄 모르네요. 제주도에는 호우 경보가 내렸어요. 하지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우린 무조건 가기로 했죠.

   용눈이 오름 주차장에 도착하니 용트림 같은 비바람에 기가 죽더군요. 하지만 비옷을 단단히 챙겨 입고 용감하게 차에서 내렸어요. 입구의 나무 막대 사이를 돌고 돌아 들어가는데 막대기를 좁게 세워서 사람은 돌아들어갈 수 있지만 말이나 소는 돌 수가 없으니 밖으로 빠져 나갈 수 없어요. 누구 아이디어인지 참 좋은 생각이더군요.

   용눈이를 배경으로 사진 한 방 찍고 매트 길을 따라 천천히 올라갔어요. 먼저 올라간 사람들은 정상에 못 갔는지 되돌아오며 여기 같이만 바람이 불어도 정상에 갔을 텐데 너무 세게 불어 못 갔다고 아쉬워하더군요. 능선에 올라서자 과연 바람이 엄청 났어요. 그래도 우린 비옷을 잔뜩 움켜쥐고 계속 전진했죠. 바람에 쫓기듯이 걸어갔어요. 용눈이를 그토록 사랑한 영갑이가 용눈이와 서로 만나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정상 가까이 가지 드넓은 억새밭이 나타났어요. 억새밭에 유난히 큰 나무가 눈에 띄었어요. 제부가 저거 어제 사진에서 본 거 같다고 하기에 자세히 보니 김영갑 갤러리에 여러 장 전시된 나무였어요. 우리는 이걸 영갑 트리로 이름 지었죠. 이 나무에 김영갑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듯 외로워 보였어요.

   그는 이 오름을 너무도 사랑하여 여인을 사랑하지 못한 것일까요? 아니 사랑의 모든 에너지를 여기에 쏟아 부어 더 이상 사랑할 힘이 없어졌는지도 몰라요.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초록의 들판에 검은 밭들이 어우러져 조각이불을 보는 듯했어요. 초원에서 풀을 뜯는 말들의 모습은 평화롭기 그지없었어요. 용눈이의 완만한 능선이 여인의 허리선처럼 우아했어요. 영갑이는 이 모습에 반했을까요?

   앞에 있는 다랑쉬오름과 용눈이 정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분화구를 돌았어요. 정상에서 뒤쪽으로 일부분은 생태복원을 위해 막아 놓아서 한 바퀴 돌지 못하고 되돌아 와야 했어요.

   내려오는 길에는 비가 그치고 바람도 약해졌어요. 용눈이와 영갑이의 눈물 바람이 끝났나봐요. 나는 용눈이라고 해서 용의 눈알을 생각했는데 용와(龍臥) 용이 엎드린 오름, 즉 용이 누운 오름이더군요. 하긴 용이 누운 형상 같기도 해요.

   지금쯤 영갑이는 그토록 사랑하던 용눈이를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요? 한 번 왔다 가는 인생, 사람을 사랑하던, 사물을 사랑하던, 혼신을 다해 사랑하는 삶이 아름다운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