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17. 6. 17. 정세권 그는 누구인가? (독후감)

아~ 네모네! 2017. 6. 18. 15:03

정세권 그는 누구인가?

아 네모네 이현숙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라는 책은 식민지 경성을 뒤바꾼 디벨로퍼 정세권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한 다큐형식의 책이다. 디벨로퍼(developer)는 개발자라는 뜻으로 택지개발, 주택개발에 힘쓴 정세권을 표현한 말이다.



   지은이 김경민은 하버드 대학교에서 도시계획 부동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를 하고 있다.

   그는 서문에서 많은 사람들이 북촌에 있는 전통한옥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지만 정작 누가 이 건물들을 지었는지 모르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다고 말한다.

   정세권은 경성(지금의 서울)의 북쪽(청계천 이북)에 한옥집단지구를 건설했다. 1920년대 일본인들이 북촌 진출을 시도하면서 조선인의 주거공간을 위협할 때 대규모 한옥지구를 만들어 일본인의 진출을 최대한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집장사로 불렸고 그가 만든 한옥들은 20세기 후반까지 대중의 관심 밖에 머물렀다.


1경성의 토지전쟁

   경성이냐 게이조냐라는 말이 생길만큼 일본인의 경성 진출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게이조는 경성의 일본말이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본인들의 경성 진출은 눈에 띠게 늘었으며 막강한 자본으로 경성의 토지를 매입했다. 특히 왕가의 재산을 몰수하여 국가에 귀속시키면서 일본 소유의 땅이 급속도로 늘어났다. 일본인 주거지는 주로 남촌(청계천 남쪽)이었는데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20년 동안 몇 배로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국가체제를 일본에게 강압적으로 빼앗긴 터라 국공유지와 일본인 사유지를 합하면 경성 전체 토지의 72%가 일본인 소유가 된 상황이었다. 경성의 조선인들은 경제력이 미약하여 토지 매입이 어려웠으므로 조선인의 경성이 아닌 일본인의 게이조로 바뀔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했다.

   주로 남촌에 머물던 일본인은 1926년 경복궁에 조선총독부를 건설하는 등 많은 관공서와 동양척식회사 같은 통치기구를 청계천 이북으로 이전하며 그들의 영역을 북쪽으로 넓혀갔다. 경성부청(시청)은 덕수궁에, 동숭동에는 경성제국대학(서울대)를 건립하고 많은 관사와 사택을 짓게 된다. 정동에는 재판소(대법원), 광화문에는 총독부 수신국 등 그들의 진출이 자못 밀물과 같았다.

   현재도 경복궁 서쪽 서촌에는 일제 시기의 관사로 지어진 적산가옥들이 많이 존재한다. 적산 가옥(敵産家屋)이란 적의 재산인 가옥을 말한다.

   경성이 산업화 되면서 농촌의 많은 인구가 경성으로 유입되고 경성은 조선괴 일본의 토지 전쟁터가 되었다. 북촌 소재 주택이 시장에 나오는 대로 속속 일본인의 손으로 떨어지니 조선인들은 점점 북촌에서 쫓겨나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2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2장에는 경성을 지키기 위해 나타난 근대적 디벨로퍼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었는데 그 중에 으뜸이 정세권이다. 조선인 디벨로퍼들은 관급공사에는 전혀 진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로 민간 주택 사업에 힘 쓸 수밖에 없었다.

   정세권은 1888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농업과 어업으로 생계를 잇는 어려운 가정에서 자랐다. 그의 집안은 총 14가구가 모여 사는 작은 마을에서도 가장 형편이 어려웠다. 그는 서당에서 교육을 받았고 어린 나이에 진주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였다. 진주 사범학교에 진학하여 3년 과정을 1년에 졸업한 천재였다. 그는 사범학교를 졸업하자마자 18살의 나이에 참봉에 제수되었고, 23살의 나이에 하이면 면장에 임명되었다. 면장이 된 후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는 것에 대한 회의를 느낀 그는 2년 만에 사표를 내고 경성으로 이주한다.

   1919년 경성으로 상경하면서 2만원의 자산(당시 20칸 한옥 두 채 값)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상경한 이듬해 최초의 근대식 부동산 개발회사인 건양사를 설립해 대규모 한옥단지 개발을 시작하고 10년도 안 되어 조선을 대표하는 부동산 재벌로 성장한다.

   일제 통치가 이어지면서 조선의 귀족과 왕족들은 자신들의 토지를 대거 시장에 내놓았고 정세권은 이를 사들여 한옥집단지구로 개발했다.

   당시 경성은 인구가 삼십만 명이나 되는 대도시였지만 경성을 소개하는 책이 한 권도 없었다. 여러 학자와 신문사 편집국장들이 협조하여 경성편람이란 소개서를 만들었는데 정세권은 건축계를 대표해서 여기에 건축계로 본 경성이란 글을 실었다.



   그는 큰 땅을 사서 중산층 이하 서민들을 위한 작은 집을 많이 지었는데 표준화, 규격화를 통해 같은 모양의 집을 대량생산함으로 건축비를 줄였고, 주택 구입 자금을 대출해주면서 서민들이 주택을 구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주택 가격이 폭락할 때는 전세나 월세 등 임대사업을 하면서 불황을 타개해 나간 그는 실로 건축왕이면서 또한 부동산 사업의 귀재다. 매일신보에 기재된 그의 기사 내용에는 집값 폭락시대에 살아남은 비결이 적혀있다.

 

3장 민족운동에 투신한 건축왕

   대자본가인 그는 신간회, 조선물산장려회, 조선어학회 등을 후원하면서 민족운동에 참여한다. 그는 사재를 털어 이런 단체들을 도왔고 이로 인해 일제의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결국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1년간 옥고를 치르게 되고 그의 많은 재산은 몰수 되었다.



   정세권은 낙원동에 4층짜리 건물을 지어 1층에는 조선물산장려회 물품을 파는 상점과 건양사 사무실, 2층에는 회의실과 물품 전시실을 짓고, 3층에는 자신의 살림집으로 사용했다. 옥상에는 정원을 만들었는데 80여 년 전에 벌써 옥상에 정원을 만든 점이 놀랍다. 아래 사진은 옥상 정원에서 찍은 가족사진이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은 일제가 조선어학회를 옭아매기 위해 의도된 사건이다. 이극로, 최현배 등을 포함해 33인을 검거했는데 이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수를 맞추려는 속셈이었다. 수차례의 물고문과 구타를 당한 사람들은 옥사하였고, 정세권도 무수한 고문을 당했다. 10년 넘게 준비해온 한글학회 큰 사전의 모든 원고들은 압수당했다.

   결국 해방이 지나고 한참 후인 1957년에 가서야 한글학회 큰 사전이 나오게 되었다. 정세권은 큰 사전 완성을 축하함이란 글을 실으면서 본인의 참여 동기를 이극로의 이런 말 때문이었다고 기술한다.

한 민족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통일된 말이 없으면 문화민족이 아니요,

통일된 말이 있어도 통일된 글이 없으면 문화민족이 아니요,

통일된 글까지 있어도 사전이 없으면 문화민족으로 행세할 수 없다.’



   정세권은 일개 집장사가 아니고 한국인의 얼을 지켜낸 독립투사요, 난세의 걸출한 위인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부어 나라를 지키고 민중을 지켜냈다. 나는 돈 없다, 힘없다 재주도 없다 하면서 없는 타령만 하고 있는데 나도 뭔가 내가 가진 것을 가지고 이 시대와 이 지구에 도움이 되는 인간이 되어야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